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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컬 타이포 브랜딩: 개항로 서체 개발기 #원도수집 #기본자_파생

    목간판 손글씨 원도 수집부터 기본자 파생까지


    글. 이정은

    발행일. 2023년 05월 25일

    로컬 타이포 브랜딩: 개항로 서체 개발기 #원도수집 #기본자_파생

    [개항로 프로젝트]는 2018년 시작된 민간 주도 도시 재생 사업이다. 이 사업을 기획하고 지금까지 지속해 오고 있는 이들(개항로 노포 상인들, 브랜딩 전문가, 쉐프 등 10~20명이 협업한다)의 단체명이기도 하다. [개항로 프로젝트]는 인천 구도심(중구 동인천역 일대)의 낙후한 건물들을 리모델링하고, 오랜 시간 한자리를 지킨 노포들에 브랜딩이라는 새 숨을 불어넣기 위해 기획되었다.
    
    19세기 말 이 지역, 그러니까 제물포항(지금의 인천항) 일대는 이른바 ‘개항’[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부산, 원산, 인천 등 3개 항구도시들이 차례로 대외 무역의 문을 열며 개항장(開港場)으로 불렸다. 이 시기가 이른바 ‘개항기’다.]과 함께 외래 신문물이 유입되면서 근대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정확히는 발전을 ‘당했다’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지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문장으로 부연할 수 있다. “제물포 개항은 인천 지역 사회에 또 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외세의 진입과 이질적 문물의 유입에 따른 갈등에서도 그러하였지만, 그보다는 일본이 원인천을 한국 식민지 경영의 발판으로 삼은 데 있었다.”
    
    시절의 명암이야 어떻든, 당시 개항의 격랑을 살아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오랜 살아냄, 혹은 이겨냄의 흔적들이 지금껏 거리 곳곳에 남아 있다. [개항로 프로젝트]는 그 흔적들에 다시금 빛을 비추는, 그곳에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사람들을 밝히는 작업이다. [개항로 프로젝트]의 발단과 전개를 기획한 이들은 이창길(경영 컨설턴트)과 권순만(브랜드 디렉터). 두 사람은 ‘플레이스랩’이라는 법인을 공동 설립하여 개항로 로컬 브랜딩을 지속·지원하고 있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23년 초 [개항로 서체] 개발 사업도 시작되었다. 윤디자인그룹 TDC(Type Design Center) 디자이너들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타이포그래피 서울』은 이 [개항로 서체] 개발 과정을 초창기부터 최종 공개 시점(8월 예정)까지 순차적으로 소개하는 시리즈를 매달 한 회씩 연재한다. 개발 담당 디자이너들이 일종의 일기체로 기록하는 에세이 연작이다. 이들은 이번 작업을 ‘로컬 타이포 브랜딩’이라 명명했다. 단순히 주목도 높은 서체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글자 디자인으로써 도시 재생에 기여하는 사례를 기록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목적이다.

    [개항로 프로젝트] 팀을 이끄는 이창길 대장님과 권순만 디렉터님, 그리고 [개항로 서체]의 모본 글자인 ‘개항로 맥주(개항로 라거)’ 글씨를 쓰신 전원공예사 전종원 사장님. 이분들과 2022년 겨울 [개항로 서체] 개발의 정식 계약을 맺었다. 당시 나는 전종원 사장님께 “새해에 꼭 찾아 뵐게요”라고 약속을 드렸고, 2023년 첫 주가 되자마자 개항로로 달려갔다. 방문의 목적은 원도(原圖) 수집.

    손글씨 서체와 일반 서체 개발 과정상 가장 큰 차이점은 원도의 유무다.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바로 글자를 그리기도 하는 현대에 와서는 원도의 개념을 확장해 사용하기도 하지만, 원도의 본래 의미는 ‘서체를 제작하기 위해 그린 글자의 원형’이다. 그러니 전종원 사장님의 목간판 글씨들이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개항로 서체]의 원도라 할 수 있다.

    손글씨 서체 개발 과정 한 큐 요약

    손글씨 서체 개발 과정

    위 표는 손글씨 서체 개발의 사례에 대한 이미지와 그 과정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우선 원도를 수집한다. 최대한 많은 원도를 수집해야 글자의 특징 파악이 용이하고, 제작 과정에서 헤매지 않으며 본래 글씨를 쓴 창작자의 글씨와 최대한 유사하게 제작할 수 있다. 원도 글자가 부족하면 원도 작가에게 글자 샘플을 추가 요청하기도 한다.

    이렇게 수집된 원도는 모두 스캔하여 자소별로 정리하는 집자(集字) 과정을 거치고 자소별 특징과 글줄 등을 파악한다. 손글씨의 경우 어떤 도구를 사용해서 글자를 썼는지, 어디에 썼는지, 종이에 썼다면 번짐이 강한 종이에 썼는지 재질이 느껴지는 종이에 썼는지 등까지 세심하게 파악해야 한다.

    다음은 글자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이다. 보유한 글자를 참고하여 견본 문장을 설정하고, 스캔 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벡터화하는 작업을 거쳐 문장의 인상을 확인한 후 시안 작업을 한다. 원도의 특징과 범용성을 고려하여 작업한 시안 중 하나를 최종안으로 결정한다.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한다. 빈출자(頻出字,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글자) 파생에 용이한 뼈대 글자를 우선적으로 작업하고, 표준어 표기가 가능한 KS코드에 맞춰 한글 기본 2,350자를 파생한다. 경우에 따라 표기 가능한 모든 한글을 포함하는 유니코드 11,172자로 작업하기도 한다.

    숫자와 라틴 알파벳 디자인도 비슷한 프로세스를 따른다. 필자의 경험상 원도 창작자가 라틴 알파벳에 익숙하지 않아 한글과 라틴의 인상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 이럴 때는 원도를 기본으로 하되 한글에서 보이는 특징적 요소를 서체 디자이너의 상상력으로 라틴 알파벳 영역 글자들에 반영하고는 한다.

    이렇게 해서 폰트 한 벌이 되기 위한 최소 조건인 한글 2,350자 및 라틴 알파벳 94자(스페이스 포함 95자), 특수문자 986자를 완성한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수차례 검수와 수정 작업을 마쳐야만 최종 납품, 즉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전원공예사에서(ft. 근자필성 & 2G폰)

    우리(윤디자인그룹 TDC 이정은·이가희)는 원도 수집을 위한 고성능 카메라, 전종원 사장님께 요청드릴 견본 문구 인쇄물을 챙겨 전원공예사를 찾았다. 사장님의 작업대 위에 커다란 목판이 놓여 있었다. 좀 전까지 작업 중이셨던 듯했다. 목판에는 謹者必成(근자필성)이라는 사자성어가 근사하게 적혀 있었다. 첫 글자를 몰라 사장님께 여쭈니 ‘삼갈 근’이라고 하신다.

    “겸손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뜻이에요.”
    “우와. 뜻도 멋지지만 사장님의 한자도 정말 멋지네요!”

    전원공예사 전종원 사장님이 쓰신 ‘謹者必成’
    (삼갈 근, 사람 자, 반드시 필, 이룰 성)

    우리는 본격적으로 원도 수집을 시작했다. 나는 공예사 바깥에 켜켜이 쌓인 목간판의 글씨들을, 동행한 이가희 디자이너는 사장님의 작업대 위 자료들을 각각 촬영했다.

    사장님의 작업 공간을 촬영하다 보니 [개항로 프로젝트] 글자의 원도를 찾을 수 있었다. 신문지를 길쭉하게 잘라 붙이고 그 위에 거친 붓으로 써 내려간 모습은 간판 위에 새겨진 글자의 인상과는 또 달랐다. 목간판 글자를 새기기 위해 종이에 붓으로 쓰고, 글씨 외곽을 정리하며 그리고, 그것을 다시 나무판에 옮기고, 칼로 새기고, 붓으로 다시 칠하는 과정까지, 같은 글자를 최소 다섯 번을 써야 목간판 글씨가 완성된다. [개항로 프로젝트]의 태초와 함께한 이 원도가 오랜 유물처럼 귀하게 보였다.

    [개항로 프로젝트] 글자 원도

    이가희 디자이너와 나는 전원공예사 구석구석을 살펴가며 나름 열심히 자료를 찾았다. 그런데, 사장님의 오랜 경력에 턱없이 못 미치는 원도 분량에 조금 당황했다. 사장님께 혹시 따로 모아둔 자료나 찍어두신 사진이 없는지 여쭈었다. 사장님이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열었다’. 나의 2차 당황⋯. 스마트폰 보급률 세계 1위인 우리나라에서 아직 2G 피처폰을 쓰시는 분을 너무 오랜만에 뵀기 때문이다.

    “사진 잘 안 찍어요. 찍어도 휴대전화 바꾸면 또 없어지고 그러니까… 사진을 어떻게 빼는지도 모르고. 그래도 뭐가 있나 좀 볼까요?”

    도트가 다 보이는 조그만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주시는데⋯ 이건 안개 속에서 찍으신 건가요, 물속에서 찍으신 건가요…⋯. 도저히 형태를 파악할 수 없는 사진들 몇 장만 사장님의 휴대전화 앨범에 있을 뿐이었다. 아차, 내가 잠시 사장님의 나이를 간과했구나. 전종원 사장님이 엄청난 동안이셔서 그렇지, 사실 올해로 87세셨다. 디지털이 익숙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그동안의 작업물 아카이빙에 대한 기대를 거는 것은 우리의 과한 욕심이었던 것이다.

    전종원 사장님께 추가 견본 글자 작성에 대해 설명해드렸다. 한글 340자, 라틴 알파벳 영역 전체와 짧은 예시문을 드리며 ‘개항로 맥주’와 ‘개항로 프로젝트’를 썼던 글씨와 비슷한 인상으로 종이에 써주셔야 한다 부탁드렸다.

    실은 모본이 됐던 글씨와 동일한 인상을 갖기 위해 추가 글자를 모두 목판에 큰 사이즈로 제작해주셔야 함이 맞지만, 사장님의 건강과 나이를 고려하여 합의를 본 결론이었다. 사장님은 “허허, 숙제가 생겼네. 열심히 해볼게요.”라고 하신다.

    이제부터는 서체 디자이너의 시간

    우리가 다시 전종원 사장님을 뵈러 온 것은 한 달 후. 그사이 전원공예사를 방문했던 [개항로 프로젝트] 이창길 대장님이 사장님의 견본 글자 작업 상황을 우리에게 공유해주기도 했다.

    사장님께 받은 추가 글자들은 모본이 된 ‘개항로’ 글자와는 사뭇 인상이 다르긴 하지만, 지난번 방문 때 수집한 실제 목간판 자료의 글씨를 바탕으로 샘플 글자를 진행하고, 이번에 추가로 받은 원도에서 사장님 글씨의 특징을 파악해(특히 흘림 부분을 많이 참고했다) 반영하는 것으로 글자 디자인 방향을 잡아 나갔다.

    전원공예사에서 촬영한 목간판 글자, 전종원 사장님이 쓰신 추가 견본 글자를
    집자(集字) 후 폰트 파일에 옮겨 정리하는 과정

    ‘개항로’ 세 글자로 시작된 만큼 그 글자를 기본으로 두고 크기감과 자폭, 부리의 모양이나 흘림의 방향 등을 매번 비교하고 확인해 가며 원도의 특징은 갖고 가되 폰트로서의 전체적 통일성을 갖추는 방식으로 기본자를 작업했다.

    [목]과 [문]의 초성 [ㅁ] 모양, [전]과 [정]의 초성 [ㅈ] 모양은 너무 상이하고, [각]과 [작]의 중종성 이음새, 두 개의 [판] 글자에서 보이는 종성의 인상이 너무 달라 한 글자 한 글자 모두가 고민과 선택, 합의의 과정이었다. 기본자 파생만 해도 예상 일정을 훨씬 넘기는 엄청난 시간이 소요됐다. 나중에는 속으로 ‘저 좀 살려주세요…’ 하고 우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개항로 서체] 시안: 문장 테스트
    [개항로 서체] 기본자 파생

    드디어 시안 글자가 어느 정도 완성이 되고 140자 정도의 기본 글자가 파생되었다. ‘개항로 인천맥주’ 글자를 보니 격랑의 개항로 역사가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이 흡족했다. 글자 수정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에 수없이 또 고쳐질 것이고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할 것이다. 이후 2,350자로의 파생은 윤디자인그룹 TDC 이찬솔 디자이너가 맡기로 하여 현재 열심히 진행 중이다.

    다음 편은 이가희 디자이너의 [개항로 서체] 라틴 알파벳 제작기, 그다음 편은 이찬솔 디자이너의 한글 2,350자 파생 후기를 싣는다. 우리 [개항로 서체] 제작 팀은 ‘근자필성’의 자세로 정진 중이다. (다음 연재에서 계속)

    윤디자인그룹 TDC(Type Design Center) 소속 서체 디자이너. 2000년대부터 글자를 짓기 시작했으며 서울시 전용서체 [서울남산체]·[서울한강체] 개발 참여를 시작으로 [어반빈티지], [YTN 뉴스 자막 서체], [KoddiUD 온고딕] 등 다양한 서체를 만들었다. 2023년 [개항로 서체]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로컬 타이포 브랜딩’의 효용성과 그 가치를 알리고 있다. @booookty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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