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유율이 어째 됐던 소비자야 개개인의 취향대로 라면을 사 먹을 일이지만 패키지와 브랜드 로고타입에도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얀 국물’ 라면전쟁에서 ‘색깔 대전’으로 진화
‘하얀 국물’ 전쟁을 치른 라면업계에 ‘색깔 대전’이 또 한 번 달아오르고 있다. ‘나가사끼 짬뽕’으로 하얀 국물 전쟁에서 승리한 삼양식품이 후속작인 ‘돈라면(갈색 라면)’을 내놓으며 색깔 대전에 불을 지폈고, ‘꼬꼬면’으로 돌풍을 일으킨 팔도는 ‘남자라면(빨간 라면)’으로 농심의 ‘신라면’ 20여 년 아성을 위협할 태세다.
하얀 국물 전쟁에 뒤늦게 뛰어든 오뚜기의 ‘기스면’과 농심의 ‘후루룩 칼국수’는 추격전에 불을 지폈다. 여기에 유통업체 이마트의 ‘라면이(e)라면’과 ‘계(鷄)운한면’이 가세하면서 팔도와 삼양식품이 주도했던 하얀 국물 라면 시장이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했다. 점유율이 어찌 됐던 소비자야 개개인의 취향대로 라면을 사 먹을 일이지만 디자이너로서 패키지와 브랜드로고타입에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제각각 다른 콘셉트와 맛을 이야기하면서도 하나같이 캘리그래피를 사용한 로고타입을 사용하고 있다. 최근 판매에서 조로증세를 보이고 있는 ‘꼬꼬면’이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투전략
이마트가 선보인 ‘라면이(e)라면’은 청양고추와 해물의 사용으로 삼양식품의 ‘나가사끼 짬뽕’과 재료가 비슷하며, 오뚜기의 ‘기스면’과 맛이 유사하다는 평도 있다. 역시 이마트가 선보인 ‘계운한면’은 닭 육수를 사용한 ‘꼬꼬면’과 재료와 이미지가 겹친다.
‘라면이(e)라면’의 제품 포장이 ‘나가사끼 짬뽕’과 유사한 것도 논란거리다. 삼양식품에서도 ‘라면이(e)라면’의 제품 포장을 두고 논의가 있었다고 하니 PB상품이라 할지라도 웃어넘길 일만은 아닌 것 같다.비슷한 갈색톤의 바탕색과 포인트로 빨간색을 사용한 점, 라면 이미지와 로고타입의 배열 위치, 대놓고 따라 쓴 듯한 둥그런 로고타입형태와 흰 외곽선을 준 처리 등 대표적인 따라 하기 미투제품으로 보인다.
게다가 제품의 로고타입을 한번에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단점도 있는데 이는 ‘e’와 ‘이’의 중복에서 오는 혼란과 글자크기의 우열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데서 오는 현상이다. 또한 세로배열의 로고타입에서는 무엇보다 가독성을 고려해야 하므로, ‘라면이(e)라면’은 ‘이’가 ‘일‘로, 꼬꼬면에서‘꼭’으로 읽히지 않도록 자소를 세밀하게 조절해야 한다.
팔도 ‘꼬꼬면’은 상단에 붉은 웨이브와 라면 용기의 모양을 통일하여 닭볏을 간접적으로 표현했으며, 로고타입 또한 닭의 이미지를 은유적으로 연상하게끔 하는 절제된 표현을 했다. 그에 반해 ‘계운한면’은 직설적으로 닭을 크게 넣고 ‘개’를 ‘계’로 바꿔 쓴 언어유희가 유치한 듯 재미있다. 또한, 닭 계(鷄)자 위에 잊지 않고 그려준 닭볏이 키치스러움을 더해준다.
한풀 꺾인 ‘꼬꼬면’의 인기에 고심하던 팔도는 소비자 관심을 높이려 ‘꼬꼬면’의 후속제품에 관한 정보를 흘렸다. 출시 전 흡사 영화 티져 포스터처럼 소개된 ‘男子라면’의 이미지는 광동 ‘男헛개차’와 일본 제품인 ‘오토코마에(남자 두부)’와 비슷하다. 물론 이경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서 따왔다고 하겠지만, 디자인을 보면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남’과 ‘자’에 다른 색을 사용한 이유가 로고타입의 주목성을 위해서인지 ‘男헛개차’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한자에서 한글로 바뀌면서 어딘지 모르게 힘이 빠져버려 이도 저도 아닌 밋밋한 느낌이 되어버렸다. 돈라면은 ‘돈’에서 ‘ㄴ’이 은근히 돼지 꼬리를 연상시켜 돼지 뼈 육수라는 제품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남자라면’과 ‘돈라면’은 식품에서 금기시하는 블랙 색감이 주조를 이루는데 이는 ‘신라면 블랙’이나 ‘男헛개차’가 없었다면 과연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짜장 라면으로 오인당할 위험도 있지 않을까?
전문가 인정풍토가 아쉽다
믹키유천이 TV광고에 등장해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스면’은 최근 판매 호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기스면’의 최대약점은 패키지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패키지디자인은 아쉽다. 노란 바탕색 포장은 ‘너 정말 하얗구나!’라는 광고카피와는 다름을 느낀다. 제품포장과 광고의 연관성에서 무신경함을 드러내 신제품을 인식하는 소비자들이 쉽게 연상하기 어렵게 한다. 아무리 오뚜기의 주조색이 노란색이라 할지라도 제품 특성에 맞는 색상선택이 아쉬운 부분이다.
브랜드로고타입 또한 그렇다. ‘기스면’의 한자는 ‘鷄絲麵’인데 닭고기로 육수를 내서 가는 면을 말아 먹는 중국요리이다. 하지만 브랜드로고타입 어디서도 제품의 특징인 깔끔한 맛을 연상하기 어려우며 얇고 부드러운 면의 느낌도 전해지지 않는다. 글자 간 굵기의 균형이 무너지며 억세고 우악스럽게까지 보이는 이 로고타입은 붓으로 쓴 글자라는 것 이외의 어떤 의미도 찾아볼 수 없다.
광고모델료와 매체광고비로 매달 수억 원 이상을 지출할 텐데 ‘기스면’의 글씨는 아쉬움을 넘어 안타깝기까지 하다. 지속해서 노출되는 브랜드의 얼굴인 캘리그래피 타이틀을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고 소홀히 한다는 것은 좋은 제품을 만들고 멋진 광고를 만들어 놓고도 그 제품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소비자들이 직접 ‘이게 좋은 글씨다, 아니다’를 논하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제품의 품격에 관한 판단이 무의식중에 자리 잡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부분 비용의 문제에서 비롯되는데, 외주 비용절감을 위해 내부의 디자이너가 로고타입을 쓰게끔 상황이 만들어지거나, 주위의 조금이라도 싼 곳에 의뢰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사진을 찍을 줄 안다고 모두가 전문 사진가가 되지 않듯이 글씨를 좀 쓴다고 캘리그래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전문가를 잘 인정하지 않는 사회이기도 하고, 나도 할 수 있는데 식의 무조건적인 참여와 실행이 시장을 더 혼탁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일차적으로는 패키지디자인에 대한 지출비용 자체가 적어서겠지만, 처음부터 브랜드로고타입에 투자할 비용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전체 이미지에 마이너스를 줄 수 있는 중요한 일인데 작은 비용을 아끼고 큰 것을 놓친다고 하겠다.
주말에 찾은 홈플러스 매장에서 획일적으로 휘갈겨 쓴 로고타입의 PB제품을 보고 있자면, 제품 포장이 마치 글씨 연습장이 된 듯해 한숨과 웃음이 교차한다. 식품은 대부분 저관여도 상품이고, 출시경쟁 역시 그 원인이라 할 수 있겠지만 해도 너무하다. 미투제품의 난립과 패키지디자인의 유사성, 브랜드 로고타입의 무신경함은 아쉽기만 하다.
* 참고: 삼양식품, 농심, 팔도, 오뚜기, 이마트, 패키지디자인시대 네이버카페
박선영 그래픽디자이너이자 996크리에이티브랩 소장.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창립회원으로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동양적인 문화요소와 조형을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으로 융화시키는 작업에 관심이 많은 그는 독립적인 프로젝트 활동 및 문화 관련 프로젝트와 전시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래픽디자인 관련 과목을 강의 중이다. 논문 〈캘리그래피(손멋글씨)의 조형적 표현과 활용에 관한 연구〉발표했고, 이탈리아 Utilila Manifesta/Fight Poverty design contest 2010에서 작품이 선정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