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을 ‘위한’ 연구와 디자인에 ‘관한’ 연구
디자인 연구는 디자인을 ‘위한’ 연구와 디자인에 ‘관한’ 연구로 구분할 수 있다. 디자인을 위한 연구는 보통 디자인 리서치(Design Research)라고 하고 디자인에 관한 연구는 디자인학(Design Studies)이라고 한다. 디자인 리서치가 디자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라면 디자인학은 디자인을 잘 알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디자인 리서치가 ‘어떻게’에 관한 지식(Know-how)이라면 디자인학은 ‘무엇’에 관한 지식(Know-that)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가 디자인 방법론이라면 후자는 디자인 인식론이다.
디자인을 위한 연구: 디자인 리서치
보통 디자인 연구라고 하면 좁은 의미의 디자인 리서치를 일컫는 경우가 많다. 디자인 리서치는 디자인을 잘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그 속에서의 연구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디자인 리서치는 기본적으로 디자인 개발을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물론 디자인 리서치는 마케팅 기반의 시장 조사에서부터 소비자 행동연구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것이 본격적인 디자인 개발과정에 적용되면 디자인 방법론이 된다. 최근에는 기존의 과학적 디자인 방법론을 넘어선 새로운 방법론에 대해서도 다각적인 관심이 일고 있다.1)
1) 토마스 미첼은 디자인 사고를 중심으로 다양한 디자인 리서치와 방법론을 소개하고 있다. C. 토마스 미첼, 김현중 옮김, <혁신적 디자인 사고>, 도서출판 국제.
디자인에 관한 연구: 디자인학
디자인학은 디자인을 대상으로 삼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디자인학은 일차적으로 디자인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여기에서 디자인을 잘하기 위한 것은 이차적인 것이며, 디자인학은 일단 디자인이란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를 아는 데 초점을 둔다. 디자인학은 디자인을 대상으로 삼는 유일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학문으로서의 디자인학은 단일한 이론의 집적체가 아니라 다양하고 이질적인, 심지어 상반된 지식을 포함한다. 다만 그러한 지식이 개별적이거나 나열적이지 않고 일정한 질서에 따라 배열되고 연결될 때 디자인학은 구성될 수 있다. 따라서 디자인 지식을 디자인학으로 만드는 형식적인 원리는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학의 체계는 여러 가지 관점과 접근 방법에 따라 구성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도 모두가 동의하는 단일한 모델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디자인학의 체계가 제대로 제시된 적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디자인학이라기보다는 공학적 디자인과 리서치 분야에서의 한 가지 사례로서 영국의 디자인 이론가인 나이젤 크로스의 모델이 있다. 크로스는 디자인 리서치가 각기 인간, 프로세스, 산물이라는 세 가지의 범주에 기반을 둬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연구 영역을 제시하고 있다.
· 디자인 인식론(Design Epistemology): 디자인적인 인식 방법(Designerly Ways of Knowing)에 대한 연구
· 디자인 실천론(Design Praxiology): 디자인 실천과 프로세스에 대한 연구
· 디자인 현상학(Design Phenomenology): 인공물의 형태와 구성에 대한 연구
크로스의 접근 방법은 매우 실천지향적이다. 대표적인 디자인 방법론자인 크로스가 제기하는 연구 영역은 기본적으로 잘 디자인하기 위한, 즉 실천을 위한 이론이다. 그러나 실천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이론이 곧 실천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체계적인 이론으로서 학문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대상을 잘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은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관심으로 인해 협소해져서는 안 되며, 가능한 한 일반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크로스의 방식도 보다 일반적인 틀 안에서 얼마든지 포섭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크로스의 방식보다는 빅터 마골린의 인문학적 모델이 훨씬 더 일반적인 체계에 부합된다고 생각한다. 마골린이 제시하는 체계는 문학과 미술사에서 연유하는 것인데, 이는 디자인과 그런 분야의 내용적 유사성보다는 지적 체계의 유사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모델에 따르면 디자인학의 체계는 이론과 역사와 비평으로 이루어진다.2)
그러므로 디자인학은 디자인의 개념과 의미, 체계에 대해 공시적으로 접근하는 이론(Theory), 디자인의 역사적 발전과 현상 형태를 통시적으로 연구하는 역사(History), 디자인 일반 이론에 바탕을 두고 개별적인 디자인 행위와 산물을 평가하는 비평(Criticism)으로 구성된다. 이 세 영역은 디자인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서, 디자인학은 디자인 실천을 이론적으로 성찰하고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하며 특수하게 평가하는 가운데 디자인의 바람직한 존재 방식과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디자인학의 기본 영역을 기반으로 다른 학문과의 접맥을 통해 더욱 다양한 응용 분야들도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2) Victor Margolin(ed.), Design Discourse: history, Theory, Criticism,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9., p.5.
최범
디자인 평론가이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여러 대학에서 디자인 이론을 강의하며 디자인 연구와 전시,
공공부문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평론집으로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 한국 디자인 신화를 넘어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