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 실현
인간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개념으로서의 디자인은 행위를 통해 비로소 물질적으로 실현된다. 이처럼 개념적 디자인(Conceptual Design)을 물질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일단 디자인하기(Designing)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디자인하기는 개념적 디자인의 실현이지만, 이는 단지 행위 모델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일 뿐 아직 구체적 현실이 반영된 것은 아니다. 디자인 실현에서 구체적 현실의 반영이란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조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디자인 실현은 추상적인 도식이나 개별적인 행위가 아니라 일정한 시스템 속에서 이루어지며,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된다. 기본적이고 개별적인 수준에서의 디자인 실현이 디자이닝이라면, 일정한 시스템과 사회적 조건 속에서 디자인이 실현되는 것은 디자인 생산(Design Produc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이닝이 개별적인 행위라면 디자인 생산은 시스템적이고 사회적인 운동이다. 디자인 생산은 디자인이 실현되는 모든 차원과 국면을 포괄한다. 그런 점에서 디자인 생산은 사실상 디자인의 사회적 생산(Social Production of Design)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디자인을 사회적 생산으로 다룰 경우 그것은 주체, 행위의 양태, 결과의 배치 등 훨씬 다양하고 다층적인 상황들에 대한 시각과 분석을 포함하게 된다.
디자인 생산과 주체
그러므로 디자인 실현에 대한 인식은 반드시 디자이닝으로부터 디자인 생산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디자인 생산이 이루어지는 여러 차원과 국면들은 이렇게 구분해볼 수 있다. 먼저 객관적 조건으로는 생산 시스템과 사회적 성격이 있겠다. 주체적 조건으로는 주체의 위치가 중요한데, 디자인 생산과 관련한 주요 행위 주체는 디자이너, 경영자, 대중이다. 이들 주체 위치에 따라 디자인 생산의 층위와 국면, 그리고 강조점은 각기 달라진다. 디자인 행위 주체를 중심으로 디자인 생산의 여러 층위와 국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디자인 요구(Design Demand) 디자인 생산은 디자인 요구에 의해 발생한다. 그러므로 디자인 요구는 디자인 생산의 선행조건이다. 디자인 요구는 제작자, 경영자, 소비자, 또는 공공 주체에 의해 이루어진다. 디자인 생산은 이러한 디자인 요구에 응답함으로써 가능해진다.
2. 디자인 제안(Design Presentation) 디자인 요구에 응답하는 디자인 생산의 첫 단계는 디자인 제안이다. 디자인 제안은 디자이너에 의해 이루어진다. 디자이너에 의해 수행된 디자이닝은 디자인 생산 과정 내에서는 디자인 제안으로 이해된다. 현대적인 생산 시스템 속에서 디자이너는 디자인 제안자(Design Presenter)이지 디자인 결정자(Design Decision Maker)가 아니다. 영국의 디자인사가인 에이드리언 포티도 지적하고 있듯이, 오늘날 디자인 교육의 혼란은 바로 이러한 디자이너의 주체 위치에 대한 착각에 기인한다.1)
1) 에이드리언 포티, 허보윤 옮김, <욕망의 사물, 디자인의 사회사>, 일빛, 11~12쪽
3. 디자인 결정(Design Decision Making) 디자인 결정은 디자이너에 의해 수행된 디자인 제안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경영자의 몫이다. 경영자는 경영 행위의 일환으로서 디자인 제안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디자인을 결정한다. 현대적인 생산 시스템 내에서 디자이너와 경영자는 협업 관계에 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수평적이지 않다. 디자이너는 제안하고 경영자는 결정한다. 물론 어떤 디자이너는 디자인 결정을 하기도 하는데, 그때는 그에게 경영권이 위임되어 있거나 그 자신이 동시에 경영자이기 때문이다.
4. 디자인 선택(Design Selection) 디자이너에 의해 제안되고 경영자에 의해 결정된 디자인은 시장에 나옴으로써, 다시 대중에 의한 디자인 선택의 과정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기업의 디자인 생산 자체가 대중에게는 디자인 제안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물론 오늘날 소비자 대중이 어떤 상품을 선택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하지만 디자인의 측면에서만 보면 소비자 대중은 기업이 생산한 상품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최종적인 디자인 결정을 하는 셈이다. 개별적인 경영 행위의 차원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의 디자인 결정은 언제나 이러한 디자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소비자 대중에 의한 디자인 선택은 디자인 생산의 최종 심급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디자인 생산 과정은 두 단계의 디자인 결정 과정을 가진다. 디자이너에 의한 디자인 제안은 경영자에 의해 결정되고(1차 결정), 생산자에 의한 디자인 제안(상품 출시)은 소비자 대중에 의해 결정된다.(2차 결정) 이리하여 디자인 생산의 순환은 끝난다. 물론 대중이 디자인을 선택한다는 과정에는 사회적인 오피니언 리더나 디자이너와 평론가 등 전문가의 견해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디자인 생산 과정과 디자이너의 주체 위치
디자인 생산은 주체 위치와 국면에 따라 다층적인 상황을 가진다. 그러므로 디자인 생산을 디자이너 중심으로 협소하게 인식하는 것을 벗어나야 한다. 적어도 사회적 생산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디자인은 누구나 개입하는 행위이다. 어떤 때는 디자이너보다도 경영자의 선택이, 경영자의 선택보다 대중의 선택이 훨씬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물론 디자인 생산을 디자이너 중심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디자이너의 중요성을 기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디자인 생산 과정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경우, 디자이너는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디자이너를 넘어선 다양한 정체성 획득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로서 디자인 결정을 할 수는 없다. 디자이너는 결코 디자인 생산 과정의 독점적 주체가 아니다. 하지만 이 말은 거꾸로 디자이너가 디자인 제안자로서의 역할을 넘어설 때 오히려 자신의 디자인 제안을 훨씬 더 잘 관철시킬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디자이너가 현대적인 생산 시스템 내에서 경영자의 지휘를 받는 행위자 모델만을 유지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로서보다는 시민으로서 정치적 선택을 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행위일 수도 있다. 이것은 디자이너가 디자인과 관련하여 언제나 디자이너라는 한 가지 정체성만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는 없으며, 어떤 경우에는 효과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처럼 디자이너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훨씬 더 유연하고 복합적일 필요가 있다.
최범
디자인 평론가이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여러 대학에서 디자인 이론을 강의하며 디자인 연구와 전시, 공공부문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평론집으로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 한국 디자인 신화를 넘어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