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전문가라면 다양한 측면을 고려한 디자인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해 높은 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 현재의 기술, 소재, 정보를 토대로 분석하고 형태를 만들 뿐 아니라 전략을 세우고 전망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디자인 역량은 생산과 판매를 전제로 한 특정 브랜드의 제품과 서비스를 차별화하고 사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현실에서 정부부처나 기업에서 통용되는 디자인 역량은 디자이너 개인의 직무역량, 기업의 디자인 경쟁력에 집중되어 있다. 직무역량의 경우는 디자인 분야가 다양해지고 있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래서 특정한 분야의 디자인 역량을 좁혀서 어떠한 능력이 필요한지 논의하게 된다. 한국디자인진흥원에서 제품 디자이너, 시각 디자이너 등의 직무 역량을 조사하고 예시한 바 있다. 이것은 국가직무능력표준(National Competency Standards)과도 연결되어 있다.
기업의 경우는 디자인 역량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부 기관에서는 중소기업의 디자인 혁신 역량 강화 지원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오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 임원으로 영입된 이돈태 디자이너의 인터뷰에서도 디자인 역량 강화가 언급되었다.
직무 역량이든 조직의 역량이든 디자인 역량이라는 표현은 경쟁력의 맥락에서 쓰이고 있다.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역량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디자이너 개인의 경우 직무 역량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디자이너는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공감 능력 등 사회적 역량도 중요하다. ‘역량’은 기술(skill) 이상의 수준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량’이라는 용어 자체는 1970년대에 전문 지식보다도 전문가의 직무 수행 능력을 강조하면서 생겨났다. 경영자 또는 기관 운영자의 입장에서 인재의 개발과 관리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다른 측면의 역량을 보자면,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의 역량 접근법을 들 수 있다. 누스바움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척도로서 이 접근법을 제안했다. 이때 역량(capabilities)은 디자인 역량(competence)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근본적으로 누스바움이 말하는 역량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개개인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역량 접근법은 삶의 질을 비교 평가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이론이다.
이러한 입장이 이른바 디자인 현장, 비즈니스 현장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일 수 있다. 비즈니스로 돌아가더라도 디자인 역량 담론은 한계가 있다. 예컨대, 제품 디자이너의 직무 역량이라고 정리된 항목(디자인 구체화, 모형 제작, 양산 관리 등)을 잘 수행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흔치 않다. 정부부처와 디자인 진흥기관을 비롯한 공공기관이 역량 강화를 강조하여 정책을 펴는 것은 산업에서 디자이너가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는 현실, 즉 정책 실패를 은폐하는 것이다. 대기업이 디자인 프로젝트를 내부 조직이나 해외 컨설턴시에서 해결하고 중소기업은 대기업 의존도가 높아 자체 개발력이 낮고 디자인 회사나 스타트업은 사회 안전망이 취약한 현재 상황은 앞으로도 나아지기 힘든 전망이다.
역량을 지정하는 사회보다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디자인 역량은 사회가, 또는 산업이 그 역량을 수용할만한 ‘역량’이 있어야 함을 뜻한다. 특정한 역량을 강화하도록 압박하는 사회는 공기관과 기업의 역량 결핍을 교육기관과 전문가 집단에 떠넘기는 것일 수 있다.
김상규
가구회사, 디자인회사, 미술관에서 디자이너와 큐레이터로 활동했고 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 디자인학과 교수로 있다.
『사회를 위한 디자인』을 번역했고 『의자의 재발견』, 『착한디자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