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슨과 노먼의 정의
어포던스는 ‘afford’의 명사형으로, 제임스 J. 깁슨(James J. Gibson)이 1977년에 만들어낸 용어이다. 국내에서는 도널드 노먼의 저서 『디자인과 인간심리(The Design of Everyday Things)』를 통해서 더 잘 알려졌다. 인지공학자 또는 인지심리학자인 노먼은 심리적 측면을 강조하여 실수의 원인을 분석하고 현명한 제품 개발을 위한 방법을 제안했다. 설계자와 사용자가 이른바 ‘개념 모형’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동차의 창문을 올리고 내리거나 문을 밀고 당기는 것을 착각하지 않게 하려면 그것을 쉽게 인지할 수 있도록 버튼과 손잡이를 디자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는 어포던스가 물건을 올바르게 사용할 ‘강력한 단서'(strong clues)를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인터랙션 관련 서적에서도 곧잘 이 용어를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앨런 쿠퍼(Alan Cooper)의 저서 『퍼소나로 완성되는 인터랙션 디자인(About Face 3: The Essentials of Interaction Design)』에서는 노먼의 어포던스 개념을 충실히 요약한 뒤, 조작성을 강조하여 버튼 디자인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도쿄 쇼세키에서 출간한 『디자인 생태학(デザインのせいたいがく)』에서 사사키 마사토와 후카사와 나오토가 토론한 내용에서도 어포던스가 등장한다. 토론 내용이 생태학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에 생태심리학 용어로 어포던스를 다루었고 깁슨이 그 용어를 사용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물의 형태에 어포던스를 비롯하여 생태학적 접근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오늘날 디자인 분야에서 다루는 어포던스 개념은 대부분 인지공학자의 정의를 따르게 되는데 그 핵심은 도널드 노먼의 정의에서 시작된다. 그는 주장한 ‘강력한 단서’라는 것이 디자인을 할 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포던스의 개념을 인공물, 인터랙션에 적용할 때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노먼의 개념에 대한 반론
어포던스에 대한 논쟁의 핵심은 사용성(usability)과 효용성(effectivity)에 대한 관점이다. 쥴카 앨름퀴스트(Julka Almquist)와 줄리아 럽튼(Julia Lupton)은 노먼의 어포던스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사용성과 효용성의 편견을 지적한 바 있다(『Design Issues』의 2010년 겨울호( Vol. 26)에 실린 논문 ‘Affording Meaning: Design-Oriented Research from the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참조). 그들은 깁슨이 자연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를 노먼이 인공물의 설계에 무리하게 적용한다고 비평했다. 즉, 노먼은 마치 설계자가 마치 컴퓨터에 입력하듯 ‘강력한 단서’를 ‘보편적 언어'(universal language)’로 제품에 주입해 두면, 사용자가 그것을 해독해서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앨름퀴스트와 럽튼은 “이 프로세스는 결정론적인 디자인을 낳을 수 있고 인간의 사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위험하리만치 유토피아적인 이상에 가두는 것”이라고 노먼의 논리를 반박했다.
이러한 반박 논리로 보자면, 어포던스의 개념에 일상의 경험, 문화적 다양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점도 거론될 수 있다. 깁슨이 어포던스의 예로 든 것은 넓게 펼쳐진 평지가 ‘걷는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동물이든 인간이든 인지 수준과 상관없이 알아차릴 만하지만, 기계와 제품의 경우는 설계자가 부여한 메시지를 누구든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깁슨이 정의에서 어포던스와 행위의 관계는 자극과 반사의 관계와는 다르다. 즉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처럼 특정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지각자가 탐색하여 발견하는 것이다.(『디자인생태학』 27쪽 참조)
의미 부여와 전달의 문제
앞에서 살펴본 노먼의 어포던스에 대한 논쟁은 디자인에 언어이론으로 적용하려 했던 80년대의 해프닝과 몹시 닮아있다. 당시 크랜브룩 아카데미의 교수였던 마이클 맥코이(Michael McCoy)는 기호학과 후기 구조주의를 인용하면서 제품 의미론(Product Semantics), 해석적 디자인(Interpretive design)이라 불리는 디자인 방법을 발전시켰다. 한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그의 이론은 단편적인 의미 부여와 해석 요구, 풍부한 의미 전달의 부재, 해석의 오류 가능성 등으로 비판을 받았다. 노먼의 어포던스 개념은 깁슨이 처음 정의한 맥락에서는 다소 벗어났지만, 인공물을 디자인할 때 어떤 행동을 유도하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은 분명하다. 다만, 노먼의 지각적 어포던스(perceptual affordance) 개념은 특정한 행동을 유도한다는 생산자 중심의 개념이지만 향후에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특정 집단의 관습으로 굳어진 행동 패턴을 차용하는 수용자 중심의 개념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무비판적 해석의 극복
인접 분야에서 빈도가 높은 용어를 끌어오는 것은 해외 문헌을 번역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어포던스의 예에서 보듯이, 다른 분야를 거쳐서 의미가 전해진 경우는 마치 서구 문헌의 일본어 번역본을 (원전 대조 없이)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과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기 본지페(Gui Bonsiepe)의 주장을 참고할 만하다. 그는 사용성 엔지니어링 방법론에서 기인하여 웹디자인에서도 예술과 엔지니어링의 이분법 탓에 디자인을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사용성 엔지니어링이 디자인을 이미 집어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거기서 디자인은 증발해 버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기 본지페, 『인터페이스』, 박해천 옮김, 257쪽)고 하면서 사용성에 대한 무비판적 해석을 우려했다. 인지공학, 인지과학이 우위를 차지한 이후에 디자인 분야에서 적절한 방법론을 발전시키지 못한 탓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효용성을 입증할만한 정량적인 방법론이 디자인 영역에서 제공되기 어려운 특성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 개인 또는 집단이 선언적으로 차용한 용어를 디자인 영역에서 그대로 끌어와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디자인 영역의 전문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김상규
가구회사, 디자인회사, 미술관에서 디자이너와 큐레이터로 활동했고 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 디자인학과 교수로 있다.
『사회를 위한 디자인』을 번역했고 『의자의 재발견』, 『착한디자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