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디자인을 시작하면 국배판, 신국판, 46배판 등의 판형을 뜻하는 용어를 제일 먼저 듣게 된다. 선배를 통해 그 정확한 사이즈를 알게 되지만 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는 전혀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신입 디자이너가 선배 디자이너나 편집장에게 왜 그렇게 부르냐고 물어보면 정확하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종이 규격과 책 판형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현재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종이 규격은 독일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을 표준으로 삼고 있다. 이 규격의 기본인 A0는 가로와 세로 비율이 1:√2로 그 면적이 1㎡에 해당하는 크기이다. 따라서 1㎡=841X1,189mm=A0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이등분해 나가면 A1, A2, A3, A4… 등의 크기로 줄어들게 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복사지인 A4용지(210X297mm)의 바로 크기는 이렇게 결정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종이는 이 밖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일반적으로 종이 크기를 46전지, 국전지, 하드롱 전지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 역시 일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으면서 정착된 용어다. 그 각각의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국판은 메이지(明治) 14년경 신문용지를 미국에서 수입해 신문 이외의 일반 인쇄용으로도 재단하여 판매하면서 만들어진 용어다. 신문의 ‘문(聞)’을 일본어 발음으로 ‘기쿠’라고 하는데 이를 좀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서 동음이의어인 동시에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국화의 ‘국(菊)’ 자로 바꿔 붙여 ‘기쿠한(菊版)’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다. 이것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자음을 따라 ‘국판’으로 정착하게 된다. 따라서 A1 종이를 국전지라고 부르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A1보다 국전지는 가로 세로가 조금 더 크다.
46판은 영국에서 수입한 크라운판의 4배 크기로 31X41치로 만든 종이다. 이 종이에 한 대를 인쇄하여 32페이지로 접지해 재단하면 그 한 페이지의 크기가 가로 4치, 세로 6치의 크기가 되기 때문에 4X6판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드롱판은 국판의 약 2배 정도 크기의 종이다. 이 이름의 유래도 재미있는데, 당시 독일에서만 통용되던 종이였던 ‘하이드로넨 퓨루젠 파피아’로 약을 포장하는 전용지라는 의미라고 한다.
한편 B형 계열의 종이는 에도시대에 관용지(官用紙)로 사용하였던 미농지(美濃紙)의 크기에서 유래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4절지라고 부르는 것은 미농 전지를 4등분 한 것을 의미한다. 아직도 우리나라 관공서에서 사용하는 서식에 B5나 B6가 많은 것과 우체국에서 사용하는 규격봉투의 크기가 B 계열에 맞춰진 것은 전부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배판=A4, 46배판=B5, 국판=A5, 46판=B6라고 알고 있는 편집자나 디자이너도 많지만, 그 판형은 전지의 크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게 된다. 그 크기는 각각 다음과 같다.
그리고 종이 견본을 보면 두께 판형 이외에도 경을 뜻하는 Y, T, MD, CD 등의 기호가 있는데 이는 종이의 결을 의미한다. 신문지를 찢어보면 세로는 직선에 가깝게 잘 찢어지지만, 가로로 찢으면 직선으로 찢어지지 않고 휘어져 버린다. 그 이유는 종이에는 결이 있기 때문이다. 초지기에서 종이가 만들어질 때 펄프의 섬유질이 벨트와 롤러의 진행 방향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일본에서 수입한 종이 견본을 보면 ‘Y目’, ‘T目’이라고 표기된 것이 바로 이 결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Y’는 일본어로 가로를 뜻하는 ‘요코’의 영문 이니셜이고, ‘T’는 세로를 뜻하는 ‘다테’의 영문 이니셜이다. 서양에서 수입된 종이 견본에는 세로결은 ‘MD(Machin Direction)’로, 가로결은 ‘CD(Cross Diriection)’로 표기되어 있다.
김경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디자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다수의 심포지엄과 전시회 기획, 공공디자인 프로젝트 등에 참여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십인십색』, 『일본문화의 힘(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