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거리를 가득 메운 차량 행렬. 그중 유독 노란 택시가 많다면 십중팔구 그곳은 뉴욕 맨해튼이다. 맨해튼에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들을 옴니버스로 구성한 영화 〈뉴욕, 아이 러브 유〉(2009)의 시작은 한 택시에 동시에 올라탄 두 남자의 조우로 시작된다. 토박이 뉴요커인 두 사람은 택시 운전사에게 서로가 잘 아는 지름길로 가기를 고집하다가 결국 승차 거부를 당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히 요약되지 않는다. 에피소드 열두 가지를 감독 열한 명이 주연급 배우 스물일곱 명과 촬영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유대교 남자를 위해 삭발을 하는 나탈리 포트만부터, 거리의 여자인 매기 큐를 유혹해보려는 일러스트레이터 에단 호크, 전화로만 이야기하는 음악감독의 비서 크리스티나 리치와 사랑에 빠지는 올랜드 블룸까지. 어떻게 이런 배우들을 한 영화에 담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출연진이 화려하다.
게다가 뉴욕이 배경인 영화답게 다양한 인종과 문화, 그리고 사랑의 에피소드가 이리저리 얽힌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 같지만 각 에피소드들의 주인공이 스치듯 연결되면서, 영화는 맨해튼이라는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들을 속삭이듯 풀어낸다. 12개 에피소드들을 이어주는 매개는 다름 아닌 뉴욕의 거리, 바, 식당 그리고 뉴욕의 아이콘인 택시다.
뉴욕의 검은 아스팔트를 노랗게 뒤덮는 택시. 그러나 이 노란 색깔은 뉴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60년대 초반 뉴욕에는 다양한 색상의 택시가 있었다. 그러다가 1967년, 불법 영업 택시(gypsy cab)와의 구별을 위해 등록 택시를 노랗게 도색하는 법안이 실행되었다. 그런데 뉴욕 택시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인식되어 있는 이 노란색과 체크무늬가 사실 1915년 시카고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렌터카(rent-a-car) 업계의 대명사인 허츠(Hertz)의 창업자 존 허츠(John Hertz), 택시 회사를 운영하던 월든 쇼(Walden W. Shaw)는 혼잡한 거리에서도 인식하기 쉬운 색을 연구해달라고 시카고대학교에 의뢰했고, 그 결과 노란색과 체크무늬가 채택되었다.
뉴욕의 택시는 색깔뿐 아니라 차종도 세월에 따라 변화했다. 뉴욕 택시는 1890년 전기 택시(Electric Taxi)로 시작되어 1920년 체커 택시(Checker Taxi)로 전성기를 맞았는데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한 〈택시 드라이버〉(1976) 속 택시의 차종이 바로 체커다. 1920년대부터 생산되어 뉴욕 택시의 주력이었다가 1980년대 들어 단종되었다.
그 뒤는 쉐보레의 카프리스(Chevrolet Caprice)와 포드의 크라운 빅토리아(Ford Crown Victoria)가 이어갔다. 현재 뉴욕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택시의 차종이 크라운 빅토리아다. 2014년부터 교체될 새로운 뉴욕의 택시 차종은 투명 천정, 승객의 USB 충전 기능, 항균 좌석 등을 갖춘 닛산의 NV200(Nissan NV200)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연간 5천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뉴욕의 택시는 약 13,000대에 달한다. 이를 6만 명의 기사가 운행하는데 그중 82%가 미국 외에서 출생한 자들이라고 한다. 1980년대 이후 급증한 이민자들의 영향일 것이다.
1967년 노란색으로 변신한 뉴욕의 택시는 별다른 심벌이나 로고도 없이 색상 자체로 뉴욕의 명물로 인식되어 왔다. 기존에는 스텐실로 새겨진 ‘N.Y.C. TAXI’가 전부였다. 그러던 중 뉴욕시 택시·리무진 위원회(TLC, Taxi & Limousine Commission)의 요청에 의해 새로운 로고타입 디자인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위원회는 스마트 디자인(Smart Design)이라는 회사에게 뉴욕 택시를 대표할 로고타입과 외장 디자인을 의뢰했다. 이 작업은 클라우디아 크리스틴(Claudia Christen)이라는 스위스 출신 디자이너가 중심이 되어 팀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세계 각국의 택시와 함께 뉴욕 택시의 변천을 조사하고자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 짐 자무시 감독의 〈지상의 밤〉 등이 포함된 뉴욕 필름 아카이브까지 연구했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25개 시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디자인의 여정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스마트 디자인사와 뉴욕시장실의 조율 과정이 길어지면서 여러 가지 수정이 가해졌다. 초기 시안이 주목성이 떨어진다는 시장실 측의 지적에, 스마트 디자인사는 과감히 모든 단어를 배제하고 검정색 원으로 감싼 대문자 T를 제시한다. 모두 택시인 것을 아는 마당에 굳이 단어를 넣을 필요가 없으니 상징적으로 크게 넣자는 것이 스마트 디자인사 데빈 스토웰(Davin Stowell) 대표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뉴욕시가 지하철 신규 노선의 명칭을 ‘T 라인’으로 할 것을 계획 중이었던지라 반대에 부딪혔다. 뉴욕의 지하철 노선 표시가 원형 속 알파벳 대문자인 것을 고려하면 너무 유사한 느낌이라 혼돈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일부에서는 보스턴의 운송 시스템 심벌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결국 디자인은 원형 T에 AXI와 NYC가 추가되었다. 문제는 디자인사와 상의 없이 NYC라는 단어의 서체가 뉴욕시 관광 마케팅사(NYC & Company)에서 새로 제정한 뉴욕시 관광 로고로 변경되었다는 데 있다. 이 디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 뉴욕의 대표 신문 『뉴욕 타임스』는 자사 디자이너, 디자인 회사 탠그램(Tangram) 소속 디자이너를 포함한 여덟 명에게 의뢰한 리디자인 시안을 지면에 게재했고, 한술 더 떠 일반인을 상대로 한 리디자인 공모까지 진행하기도 했다. 그만큼 뉴욕의 택시는 뉴요커들에게 간과할 수 없는 애정의 대상인 것이다.
논란의 대상을 살펴보면 몇 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동그라미 T 부분부터 살펴보자. T를 원형으로 감싸면서 왼쪽의 NYC와 오른쪽의 AXI의 시각적 균형을 꾀했을지 모르지만 TAXI가 T/AXI로 분절되면서 가독성이 떨어졌다는 의견이 있다. 게다가 원형 T와 A, 그리고 A와 X 사이의 간격이 제대로 조정되지 않아 엉성해 보인다는 지적이다.
다음으로는 NYC 로고 부분이다. 기존의 가독성 좋은 스텐실 로고와 달리 뉴욕시 관광 마케팅사에서 제정한 로고는 굉장히 두껍다. 두껍다 못해서 아예 검정 덩어리로 보인다. 교통 표지판 등의 가독성은 글자 안의 빈 공간이 여유로울 때 효과적이다. 이에 비해 현재의 로고는 여백이 너무 없다는 지적이다. 특히 속도를 내며 달리는 택시 문에 새겨진 상태로는 가독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혹자는 지금은 사라진 3.5인치 플로피 디스크의 재림이라고까지 비웃고 있다.
사실 이 로고는 택시 로고와는 별도로 뉴욕의 관광 마케팅을 위해 울프 올린스(Wolff Olins)라는 광고 대행사가 디자인한 것이다. 애초에 인쇄물과 웹 사이트 등 매체에 사용될 것을 전제로 디자인한 로고였다. 그런데 움직이는 자동차에 쓰이면서 엉뚱하게 불똥이 튀어 욕을 먹게 되었다. 서로 다른 용도로, 각각 다른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것을 발주처인 관공서에서 편의적으로 조합하다 보니 용도와 기능에서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문제는 뉴욕에서도 피할 수 없는 고질병인가 보다.
2009년 5월부터 적용된 서울시 해치 택시의 색상은 ‘꽃담황토색’이다. 회색빛 서울의 도심에 생기를 준다는 취지로 선택된 것이다. 전통 색으로서의 꽃담황토색은 분명 중요한 의미다. 하지만 전통 건축물에 사용된 색과 현대적 교통수단에 적용된 색은 매체의 재질 차이만큼이나 휘도와 색감에서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이 색들이 친숙하지 않고 이물감을 주는 이유는 생활 속에서 사라졌던 예전의 색을 인위적으로 되살려낸 탓에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의 아이덴티티를 담는 작업은 유행보다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변치 않을 힘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해치라는 구체적인 형상과 장식적 디자인은 많은 우려를 표하게 한다. 디자인은 더하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란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려봐야 할 때이다.
장성환
디자인 스튜디오 203 대표.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 타이포분과 이사, 디자인단체 총연합회 실행위원을 역임했다. 홍익대학교 재학 시절 홍대신문 문화부장을 맡으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졸업 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입사해 잡지를 만들며 서체 디자인 작업을 했고, 이후 『주간동아』 및 『과학동아』 아트 디렉터로 활동했다. 『시사저널』, 『까사리빙』, 『빅이슈 코리아』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서울대학교·서울여자대학교·호서대학교 등에서 편집 디자인 강의를 해왔다. ‘홍대앞’(서교동·망원동·연남동·합정동 등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일대를 일컫는 고유 명칭)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2009년 홍대앞 동네 잡지 『스트리트 H』를 창간하여 홍대앞이라는 역동적 장소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