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는 뉴욕 블루밍데일 백화점의 잡화 코너.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장갑을 동시에 집으려던 남녀, 사라(케이트 베킨세일 분)와 조나단(존 쿠삭 분). 이들은 서로에게 장갑을 양보하다가 첫눈에 의기투합해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식당 이름은 ‘세렌디피티3(Serendipity3)’. ‘우연한 행운’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앞으로 펼쳐질 둘의 운명을 암시해주는 듯하다.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던 두 사람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헤어진다. 그러나 불과 몇 분 만에 다시 그 식당에서 마주친다. 조나단은 머플러를, 사라는 장갑이 담긴 쇼핑백을 두고 나왔던 것. 뭔가 인연이 있다고 생각한 그들은 센트럴 파크의 스케이트장 울먼 링크(Wollman Rink)에서 짧은 데이트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다시 헤어져야 할 시간. 조나단은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조른다. 사라는 쪽지에 전화번호를 적어 조나단에게 건넨다. 그 순간 갑자기 불어온 돌풍에 날아가버린 쪽지가 길거리의 쓰레기와 뒤섞인다. 운명을 강하게 믿는 사라는 불길한 예감에 그와 인연이 아니라며 돌아선다. 그러나 조나단의 끈질긴 애원에 사라는 지갑에서 5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조나단에게 전화번호를 적으라고 한다. 그러고는 그 지폐를 가판대에서 껌을 사는 데 사용한다. 조나단과의 만남이 운명이라면 그 지폐가 자신에게 되돌아올 테니 그때 연락하겠다는 것. 그러자 조나단은 사라의 연락처를 어딘가에 써놔야 자신도 나중에 찾으러 갈 것 아니냐고 반박한다. 사라는 가방 속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 표지 안쪽에 자신의 연락처를 적고서는 내일 아무 서점에 가서 중고로 팔 테니 언젠가 그 책을 발견하면 자기에게 연락을 하라고 말한다.
조나단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운명을 믿는 사라가 답답하기만 하다. 그는 오늘의 만남을 운명에 맡기지 말자고 사라를 설득한다. 그러자 사라는 근처의 호텔로 조나단을 이끈다. 서로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각자 원하는 층을 누른 뒤 같은 층에서 문이 열려 만나게 되면 운명이라는 것이다. 둘은 같은 층을 누르지만 다른 승객들의 방해와 엘리베이터 고장 탓에 만나지 못한다.
운명을 믿는 사라, 운명을 믿지 않는 조나단은 그렇게 헤어지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다. 서쪽 끝 샌프란시스코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는 사라와 동쪽 끝 뉴욕 스포츠 채널의 유망한 PD 조나단. 둘 다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아직도 서로를 잊지 못하는 상태이다. 게다가 옛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징후들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조나단은 여기저기서 사라란 이름의 여인들과 부딪히고, 사라는 조나단과 이야기했던 영화의 포스터와 마주친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 전 일말의 미련도 남기지 않기 위해 서로를 찾아 나선다.
조나단은 유명인의 사망 기사 전문 기자인 친구와, 사라는 뉴에이지 관련 용품을 파는 친구와 서로의 단서를 쫒아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오간다. 하지만 뉴욕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서 운명에 맡기듯 운전사에게 아무데나 데려다 달라는 식의 사람 찾기는 간발의 차이로 어긋나고,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
생각처럼 쉽지 않은 상황에 그만 포기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 사라. 그 순간 친구와 바뀐 지갑에서 조나단의 5달러 지폐를 발견하고 황급히 비행기에서 내린다. 한편 방황을 끝내고 결혼을 하려던 조나단은 예비 신부가 선물로 준 책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지난날 사라가 적어준 연락처를 발견한다. 습관처럼 5달러를 보며 뒷면을 확인했던 사라와 서점만 가면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펼쳐보던 조나단은 드디어 센트럴 파크의 울먼 링크에서 운명처럼 조우하게 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책은 『백년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의 작품이다. 1985년 스페인어로 발표된 그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1988년 미국에서 영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젊은 시절 사랑에 빠졌던 여인을 잊지 못하고 50여 년을 기다린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은 운명적 사랑을 믿는 사라의 무의식을 잘 표현해준다.
영화 〈세렌디피티〉가 제작된 해가 2001년이고, 조나단의 예비 신부가 이 책을 선물로 건네며 초판본이라고 이야기한 걸 보면 발간된 지 10년이 넘은 책이다. 미국의 경우 초판본과 저자 사인본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가 있다. 의미 있는 책이 처음 나온 그 순간과 그 책이 저자와 만났다는 점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낡은 책이라고 외면 당하는 게 아니라 세월이 흘렀기에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는 것이다.
그래서 뉴욕에는 초판본과 사인본만을 파는 ‘레프트 뱅스 북스(Left Bank Books)’ 같은 전문 서점도 있다. 아마도 영화 속 예비 신부도 이곳에서 ‘그 책’을 샀을 것이다. 북 디자이너들 또한 자신이 디자인한 책이 나오면 저자의 사인을 받아 간직하고 싶어 한다. 비록 책의 내용은 저자의 몫이지만 디자인을 하며 그 내용과 교감했던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사라의 지갑에서 가판대로, 그리고 다시 친구의 지갑을 통해 돌아온 5달러 지폐. 사실, 달러 발행량 전체의 6%를 차지하고 평균 수명이 16개월인 5달러 지폐가 영화에서처럼 몇 년이 흐른 뒤 사라에게 되돌아올 확률은 거의 없다. 그야말로 우연한 행운, ‘세렌디피티’이다.
얇디 얇은 이 지폐에는 두꺼운 소설책만큼이나 긴 이야기가 담겨 있다. 1861년 최초 발행된 5달러에는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아니라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그 후 몇 번의 개정을 통해 1914년에 이르러서야 링컨의 초상화가 담긴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두 지폐는 발행된 시기의 간극만큼이나 디자인과 위조 방지 장치에 많은 차이가 있다.
국제간 금융 거래에 통용되는 기축 통화인 달러는 그 중요성과 가치 때문에 항상 위조의 대상이 되어왔다. 위조가 어렵도록 발행 당시의 최고 기술과 보안 장치를 디자인에 반영하지만, 위조하는 쪽도 만만찮은 기술로 쫒아오고 있다. 2008년 미국은 최첨단 보안 기술을 반영한 새 디자인의 5달러 지폐를 내놓았다. 지폐는 사용되는 용지부터 특별하다. 워터마크 또는 은화를 전용지 생산 때부터 삽입하는데, 이 종이는 당연히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
흔히 보는 인쇄물들은 평판 인쇄(옵셋)를 하지만 지폐는 요판 인쇄를 한다. 지폐를 만질 때 느껴지는 도드라진 촉감이 그 결과다. 그리고 일반 프린터나 인쇄기로는 구현할 수 없는 미세 인쇄를 추가한다. 이 부분은 돋보기로 보아야만 판별할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며, 일반 스캐너나 복사기에서는 뭉개진다. 그런가 하면 위폐 감별용 블랙 라이트로 지폐 표면을 비출 때만 드러나는 숨은 장치도 있다. 세부 사항을 아래 그림에서 살펴보자.
지폐는 발행국의 역사와 성격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새운 나라답게 지폐에도 신이 언급되어 있다. 뒷면에 ‘IN GOD WE TRUST’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앞면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미국의 국가 문장(紋章)에 포함되는 독수리가 삽입되어 있다. 이 독수리는 오른쪽 발로는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를, 왼쪽 발로는 13개 화살을 쥐고 있다. 이 화살들은 독수리 머리 위의 13개 별과 함께 영국과 독립 전쟁을 벌였던 식민지들의 수를 의미한다. 독수리는 보통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가지 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전쟁 중에는 화살을 든 쪽을 바라본다고 한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랄까.
독수리가 물고 있는 리본에 적힌 라틴어 ‘E PLURIBUS UNUM’은 ‘여럿이 모여 하나가 되자’라는 뜻이다. 통일과 협동을 강조한 말로 1956년까지 미국의 비공식 표어였다. 이것이 ‘IN GOD WE TRUST’로 바뀐 것이다. 이런 부분들을 보면 지폐가 경제적 역할을 넘어 미국의 정체성과 정책을 홍보하는 한 장짜리 선전물 같은 느낌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숨겨진 많은 의도와 상징이 존재한다.
장성환
디자인 스튜디오 203 대표.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 타이포분과 이사, 디자인단체 총연합회 실행위원을 역임했다. 홍익대학교 재학 시절 홍대신문 문화부장을 맡으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졸업 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입사해 잡지를 만들며 서체 디자인 작업을 했고, 이후 『주간동아』 및 『과학동아』 아트 디렉터로 활동했다. 『시사저널』, 『까사리빙』, 『빅이슈 코리아』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서울대학교·서울여자대학교·호서대학교 등에서 편집 디자인 강의를 해왔다. ‘홍대앞’(서교동·망원동·연남동·합정동 등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일대를 일컫는 고유 명칭)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2009년 홍대앞 동네 잡지 『스트리트 H』를 창간하여 홍대앞이라는 역동적 장소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