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길을 걷다 보면, 앞으로 꽉 막힌 길이 찾아온다. 돌아가거나, 뒤로 피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쪼르륵 나와서 샛길을 알려주면 좋겠다. 디자이너에게 일은 뭔가 꽉 막힌 도로를 다시 뚫어가는 과정이고, 수십 가지 갈림길에서 이 길을 가야겠다고 정하는 일이다. 전자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고, 후자는 콘셉트를 정하는…. 그러니깐 기준을 세워서 판단하는 일이다.
문제 해결력과 판단력….
그러나 이 두 가지 능력을 적절히 찾아 쓰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서 정작 아무것도 하기 힘들 때는 밖에 나가 산책을 하는 게 정신건강에 낫다. 뭔가 만들겠다고 집중할수록 더 일이 꼬인다. 어쩌면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능력은 뛰어난 문제 해결이나 명확한 판단이 아닌, 그냥 밖에 나가서 싸돌아다니는 게 아닐까.
프랑스 사회학 교수인 다비드 르 브르통(David Le Breton)이 쓴 <걷기예찬>이라는 책이 기억난다. 2002년에 나온 이 책은 당시에 걷기 열풍을 일으켰다. “걷는다는 것은 지극히 본질적인 것에만 이 세계를 사용한다는 것을 뜻한다.”라는 책의 한 구절처럼, 군더더기 없이 그냥 밖을 나가 공원이나 조용한 곳을 걷다 보면 걷고 있다는 걸 까먹은 채 생각에 잠긴다. 결국, 자기 내면을 걷고 있는 순간을 발견한다. 세계와 내가 하나 되는 순간이다. 10년이 넘은 지금은, 더 걷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페이스북을 보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정작 누구와 만나기도 귀찮아졌다.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로 목소리를 전하기보단 메신저나 카톡으로 짧게 말하고 끝난다.
디자이너의 작업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점점 손으로 만져가며 상상하던 시간은 줄어들고 머릿속에 잠깐 떠오른 생각을 컴퓨터로 표현하기 바쁘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대화하는 시간도 줄었다. 비핸스(behance)나 온라인 매체에 올라온 다른 사람의 작업을 보고 감탄하기 바쁘다. 작업 환경은 더 편해졌지만, 그만큼 우리는 서로 비슷해졌다.
그렇다고 무작정 추운 날에 밖을 나가서 걷기도 뭐하다. 그래서 적어도 머릿속을 비우거나 생각을 내려놓기 위해 낙서가 필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 종이를 쳐다보면서 끄적이다 보면 걷기처럼 생각 속을 돌아다니게 된다. 그냥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생각만 한다면 우리는 바보가 된다. 몸으로, 손으로 움직여야 한다.
잉여라는 말은 부정적이다. 비효율적이고 쓸데없고, 낭비로 본다. 오죽하면 ‘잉여 인간’이란 단어도 나왔을까. 그러나 잉여는 필요하다. 컴퓨터가 하는 일에서 우리는 잉여적인 것을 찾기 힘들다. 디지털 코드는 0과 1처럼 대부분 분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낙서는 잉여적이다. 어디까지 쓸모 있는 아이디어인지 경계가 불확실하고 모호하다. 낙서는 한가롭게 걷는 산책이다.
빠른 문제 해결력과 명확한 판단력은 비록 천부적으로 갖고 태어나야 하지만, 낙서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냥 밖에 나가 걷기도 어려울 만큼 여유가 없다면, 쓸데없이 낙서하자. 자유롭게 손을 사용해 걷다 보면 어느새 아무 생각 없이 끄적이고 있는 순간이 온다.
길이 막혀있다. 뚫을 수도 없고, 샛길도 없다. 그러나 막힌 길 앞에서 서성일 수 있다. 방황하고 고민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끄적이고 움직이자. 걷고 돌아다니자.
강구룡
그래픽디자이너, 디자인 저술가. 포스터와 책을 주로 디자인하지만,
디자이너로 작업하며 실패한 경험과 성공 이야기를 8:2로 버물려 글도 쓴다.
틈틈이 이 둘을 왔다갔다하며 낙서를 한지도 제법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그린 낙서로 조만간 새로운 책을 내려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