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배우 기타노 다케시의 『다케시의 낙서 입문』이란 책을 읽었다. 정확히 봤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아이처럼 그려진 색색의 그림이 재미난 책이다. 파란색과 녹색의 그림이 아이처럼 해맑아 보였다. 마치 수영장에 형광 튜브를 몸에 끼고, 물장난을 치는 6살짜리 꼬마가 떠오른다. 이거 굉장하군! 하며 신기하게 책을 넘기고 있는데, 책의 제목이 이상했다. 낙서라니…. 이런 멋진 그림이 어떻게 낙서일까. 다케시는 그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냥 그렸어, 라는 느낌이랄까. 그러니깐 우리는 “왜 그림을 그려야 하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리고 싶은 사람은 그리고 아니면 말지요.”라고 쿨하게 대답해야 한다. 기타노 다케시처럼, 영화배우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거고, 무라카미 다카시처럼 미술가가 그림을 안 그려도 된다. 직업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그냥 그리고 싶은 사람이 그리는 거다. 다케시의 그림은 그냥 아이의 그림인데, 여간 재주가 뛰어난 게 아니다. 아이의 에너지랄까. 그런 기운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다카시: 다케시 선생님은 영화감독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도 개그도 버리지 않는 게 역시 대단합니다.
다케시: 좋아서 하는 것뿐이죠. 유럽이나 미국 쪽 사람들은 왜 너는 아직 코미디언을 하고 있냐며 신기해해요. 그러니까 배신의 연속이랄까. 상대의 손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게 내 태도인 것 같아요. (중략) 고독하긴 하겠지만 하나의 세계에 갇히면 끝장이다 싶어요. 다카시: 저도 제가 붙들려 있는 아티스트라는 포지션에서 어떻게 빠져나갈까, 궁리하는 중 입니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아요.
– 『다케시의 낙서 입문』 중
낙서란 그림의 가장 원초적인 시작점이다. 아이의 그림을 낙서라고 부르는 것도, 어떤 의식을 가지고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무얼 그려야지…, 라는 의식이 들어가는 순간 그림이 되고 만다. 나이가 들어가면 뭐든지 의식하며 하게 된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어떤 목적이 있어야 하고, 술을 마셔도 누구에게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등…. 무엇을 바란다. 어른이 된다는 건 한편으로 의식이 발달하여 남에게 폐를 안 끼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낙서를 더 이상 안 하는 어른이 된다는 게 나는 영 재미가 없다. 환갑이 가까운 기타노 다케시는 어떻게 아이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무엇을 만드는 사람은 아이의 혼령이 몸 안에 남아있는 게 아닐까. 등에 아이의 기운이 환갑이 되어도 남아 있어서, 자꾸 낙서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그러니깐 이런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면, 회의장에 앉아 종이 문서 귀퉁이에 만화 주인공 캔디를 그릴지 모른다. 진지한 회의장에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 있어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니 환갑이 되어도, 캔디를 그릴 수 있는 아저씨가 되자…, 라는 말은 아니다. 그런 아저씨, 아니 아이 같은 어른이 한두 명은 있어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모두 서예와 동양화를 그리는 어른만 있으면, 너무 조용하고 재미없으니깐 말이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논리적이고 질서가 있는 디자인도 필요하지만, 형광 튜브를 메고 바닷가에 헤엄치는 아이의 천진난만이 묻어나는…. (아 숨이 차다) 디자인도 필요하다. 사진을 오리고, 그림도 그리고 글자를 삐뚤게 배치하며 자유로운 표현도 필요하다. 치밀하게 계산된 형태도 필요하지만, 즉흥적인 형태도 필요하다. 역시나 모두 똑같은 네모만 그리기보다는 누구 하나는 삐뚤삐뚤한 네모도 그려야 하지 않을까. 그리드와 수치에 의지해 디자인하다 보니 언제부터 본능적으로 무엇을 표현하려는 재미를 잃어버렸나 보다. 우리는 너무 틀에 갇혀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 대책 없이 바다에 풍덩 들어가자.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디자인…. 또는 낙서를 해보자.
강구룡
그래픽디자이너, 디자인 저술가. 포스터와 책을 주로 디자인하지만,
디자이너로 작업하며 실패한 경험과 성공 이야기를 8:2로 버물려 글도 쓴다.
틈틈이 이 둘을 왔다갔다하며 낙서를 한지도 제법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그린 낙서로 조만간 새로운 책을 내려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