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glyface. 최근에 만들고 있는 글자. 낙서하면서 습관적으로 주로 나타나는 직선과 곡선을 이용하였다. 부정확하고 엉성한 느낌의 선과 선의 만남을 통해 즉흥적으로 그리듯 글자의 형태를 만들었다.
일요일 아침, 또는 공휴일이나 시간이 나는 날이 있으면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글자를 디자인한다. 글자를 전문적으로 만들지는 않지만, 흰색 공간에 글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디자인을 하다 보면 제법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할 때가 많다. 그러니깐, 글자의 형태를 직접 요리조리 만지는 게 어느 정도 취미가 되었다. 책을 디자인하거나, 포스터를 만들다 보면 이미 있는 글자를 가지고 작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뭔가 갈증이 생긴다. ‘내가 직접 해보면 어떨까.’ 기회가 나면 적어도 알파벳 26자는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한글은 제목만큼은 다르게 사용하려고 간격을 넓히고, 부리를 조정하고 만진다.
디자이너에게 글자는 가장 매력적인 대상이다. 누구나 쓰는 것이면서도, 디자이너가 쓰면 남과 다르게 전문가로 보이는 미세한 흔적이 나타난다. 본문용 글자는 더 그러하다. 영화로 비유하면 디자인에 사용하는 글자는 주연 배우에 가깝다. 최근에 끝난 〈응답하라 1988〉처럼, 시대 배경에 어울리는 배우도 필요하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처럼, SF영화 이미지와 어울리는 미래 지향적인 배우도 필요하다.
낙서장에 가장 많이 쓰는 것도 글자다. 모든 작업은 글자에서 시작하고, 글자로 끝난다. “글자는 인간의 생각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다.” 그러니, 디자이너나 예술가에게 글자는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표현하기 힘든 재료다. 누구나 쓰는 말과 글이기 때문에, 익숙함을 익숙하지 않게 해야 한다.
글자를 직접 그려보거나, 낙서하다 보면 가장 매력적인 순간은 직선과 곡선의 만남에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대성당』에는 눈을 보지 못하는 나이 든 시각장애인이 젊은이를 찾아와 서로의 손을 잡으며 눈을 감고 자신이 그리는 선을 따라 그리게 하는 장면이 있다. 선을 그리는 노인과 다시 그 선을 그리는 나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주인공은 자신과 타자의 경계를 뛰어넘는 경험을 한다. 눈을 뜨지 않고, 글자의 외곽선을 그어보면 글자에는 수만 가지 선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냥 하나의 형태로 인식하지만, 직선과 곡선의 만남이 수만 가지 경우의 수를 가지고 만난다. 이미 누군가 디자인한 선을 따라 그려보면, 그 시대의 기품이나 만든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글자를 그냥 쓰는 도구에서 직접 그려보는 경험을 해보면 내 머릿속에 굳어진 관념적인 형태와 실제 글자의 차이를 여지없이 깨닫는다.
기존의 사용되고 있는 글자를 종이에 따라 그려보면, 수많은 선을 발견한다. 잘 다듬어진 한 벌의 글자도 누군가의 수많은 실패와 낙서의 선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형태를 표현하는 방식은 규정할 수 없이 많다. 최근에는 3D 프린트와 홀로그램의 발전으로 형태를 입체적으로 만들고 제작하기도 쉬워졌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표현 도구를 찾으라면 여전히 종이에 그리는 것이며 그 대상은 글자를 꼽겠다. 흰색 종이에 검은색 펜으로 낙서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 아직 자신의 색을 갖지 못한 미숙한 생각이 글자를 통해 일차적으로 쓰이고, 선으로 표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글자는 가장 원초적인 표현 도구다. 갓난아이가 벽에 크레파스로 낙서할 때부터, 나이가 들어 노트나 컴퓨터를 이용해 기록하기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글자로 쓰고, 또한 표현하고 있다.
아직 서명은 직접 손으로 써서 자신의 기록을 남긴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성향인지…. 이러한 인품마저 글자에 드러난다. 그러니, 일요일 오전 또는 시간이 남는 날이 있으면 취미 삼아 글자를 쓰는 여러 활동을 하면 어떨까. 낙서하거나, 서예 또는 컴퓨터로 글자를 만들거나 말이다.
흰 종이가 놓여있다. 뭘 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냥 구기고 버려도 되고, 불태워도 된다. 그러나 책상에 앉아, 종이를 펼치고 조용히 한 자, 한 자 글자를 그려보자. 어떤 생각이 피어오른다면, 그것을 놓치지 말고 선을 그어보자. 생각은 바람처럼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글자는 형태를 남긴다. 바쁘게 하루가 돌아간다. 우리는 빨리 보고 판단하고 거침없이 말한다. 고민하고, 망설이는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지 모른다.
강구룡
그래픽디자이너, 디자인 저술가. 포스터와 책을 주로 디자인하지만,
디자이너로 작업하며 실패한 경험과 성공 이야기를 8:2로 버물려 글도 쓴다.
틈틈이 이 둘을 왔다갔다하며 낙서를 한지도 제법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그린 낙서로 조만간 새로운 책을 내려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