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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이너의 낙서 #5 낙서와 레시피 – 자신 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 낙서를 합시다

    한번쯤 아침에 일어나 ‘오늘 저녁은 직접 만들어 먹어야지.’라는 생각이 들면, 대략 어떤 요리라는 결과물을 구상한다. 찜 요리가 될 수도 있고 탕 요리가 될 수도 있고 이것도 아닌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요리를 떠올리기도 한다.


    글. 강구룡

    발행일. 2016년 01월 28일

    디자이너의 낙서 #5 낙서와 레시피 – 자신 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 낙서를 합시다

    좋은 디자이너는 뛰어난 요리사다. 요리사가 자기만의 레시피를 이용해 훌륭한 요리를 만드는 것처럼, 디자이너에게 낙서는 과정을 기록하는 작업 지시서이자 노하우다. 

    한번쯤 아침에 일어나 ‘오늘 저녁은 직접 만들어 먹어야지.’라는 생각이 들면, 대략 어떤 요리라는 결과물을 구상한다. 찜 요리가 될 수도 있고 탕 요리가 될 수도 있고 이것도 아닌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요리를 떠올리기도 한다. 목적이 어떻든 일단 무엇을 만드는 순간, 재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스파게티를 만들어야지 하면 일단 어떤 재료가 필요한지 머릿속에 떠올린다. 동네 마트에 가서 매운 토마토소스를 쓸 것인지, 부드러운 카르보나라 소스를 쓴다든지…. 소스를 생각하고, 면은 어느 정도 굵기의 면을 사야 하는지 오징어 먹물 파스타를 해볼까 하면서 먹물을 찾거나…. 그러다, 아니야 봉골레를 먹어야지! 생각을 바꿔 바지락과 모시조개를 찾아 헤맨다. 요리를 한다는 건…. 그러니깐 어떤 재료를 찾아, 어떻게 쓸지 고민하는 과정이다.

    낙서도 작업을 위해 이런, 저런 형태를 미리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요리 레시피와 비슷하다. 직사각형을 그리거나 원을 그리면서 한 장의 포스터를 구상하거나, 색도 칠해보면서 대략 이런 느낌일 거야 감을 익힌다. 머리와 손의 시차와 틈을 줄이는 레시피가 낙서다. 돈을 조금 모아서 한번 이름난 고급 레스토랑에 가보면, 정갈한 글씨로 메뉴가 적혀있다. 굵은 글씨로 A와 B 코스가 있고, 대부분은 육류나 생선을 기준으로 많이 나뉜다. 각 메뉴 아래로는 서브 메뉴가 코스로 적혀있는데 이런 과정을 보면서 대략 이런 재료의 요리를 이런 레시피로 만드는군…, 이라고 떠올리면 당신은 요리 덕후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디자이너의 낙서를 보면서 대략, 이런 분위기의 포스터를 만들겠군…, 이라고 떠올리면 좋겠지만, 요리만큼 디자인도 직접 만드는 과정에서 처음의 생각이 바뀌거나 뜻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요리나 디자인이나 모두 과정을 겪는다는 점에서, 레시피가 필요하다. 직감에 의존해 만들거나, 저울에서 그람을 재면서 치밀하게 만들거나 모두 제 맘이다. 그러나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점에서 부분의 합이 최종 결과물의 조합 이상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 이상이거나(이러면 성공?), 그 이하(그러면 실패?)일 수 있다. 1번부터 10번까지 순서대로 가는 레시피처럼, 낙서에도 작업 지침이 치밀하게 기록된 디자인 과정이 있고, 그냥 그림을 쓱쓱 그려놓고 핵심만 적은 레시피처럼 이것만은 지키면 나머지는 자유! 라는 식의 유연한 레시피도 있다.

    앱솔루트 보드카를 그리기 위한 관찰 낙서. 관찰은 어떤 순서로 최종 작업을 만들지 구분해주고 순서를 만들어 준다. 낙서는 이런 관찰의 결과물이다.

    작업 과정을 치밀하게 따지는 건축가에게 낙서는 설계도처럼 치밀한 문서가 되기도 하고, 감각적인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낙서는 감정을 기록한 마음가짐이 될 수 있다. 사진과 텍스트를 다뤄야 하는 아트디렉터에게 낙서는 치밀한 편집이다. 어떤 과정으로 머릿속 이미지를 활용하느냐는 마치 바다에 나가 어떤 생선을 잡아 그때그때 다른 요리를 즉흥적으로 하냐에 가깝다. 상황대처에 뛰어나야 하며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창의적인 예술가나 디자이너는 모두 좋은 요리사다. 문득 떠오른 이미지로 감각적인 샐러드를 만들어 보거나, 치밀하게 계산된 방식을 이용해 세밀한 일본의 가이세키 요리를 만들 수도 있다. 모두 자기만의 스타일로 요리를 하는 만큼, 세상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미지를 만들고 형태를 만드는 디자이너가 존재한다. 오늘 그들의 낙서가 어떤 레시피로 탈바꿈하여 내일 손님에게 내놓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한 그릇의 접시에 놓인 창작물이 어떤 맛을 낼지는 모두 자기만의 레시피에 감춰져 있다.

     프린트기 설명서 콜라주. 기계를 순서대로 작동하는 것처럼, 낙서도 완성된 요리로 이르기까지 순서를 생각해야 한다.

    어떤 재료를 찾아, 어떤 순서로 요리하여, 어떻게 조합을 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한번에 정확히 떨어지는 문장으로 기록할 수 없다. 디자이너는 기계가 아니라, 요리사다. 어떤 요리를 하든지 부산물이 따라오는 법이다. 생선을 요리해도, 남겨진 부분과 쓸데없는 부분으로 나뉜다. 생각도 그러하다. 낙서라는 레시피를 끄적이다 보면, 모든 과정에서 필요한 것만 스케치할 수 없다. 어떤 재료를 찾기 위해 수십 가지 낙서가 필요하고 요리의 순서를 위해 비효율적인 낙서의 과정을 극복해야 한다. 수십 장의 스케치가 머릿속의 낙서로 남거나 종이 위에 기록으로 남든지 무언가 불필요한 기억과 기록이 필요하다. 레시피란 이런 반복에서 가장 효율적인 부분을 기록으로 남겨 다시 한번 똑같은 요리를 만들어내는 지침서다.

    글을 쓰기 위해 기록한 낙서. 어떤 순서로 글을 쓰고 어떤 순서로 작업을 할지도 모두 낙서에 남겨진다. 생각을 기록하는 점에서 낙서는 생각을 담아내는 접시이다. 

    레시피를 수천, 수만 번 반복하며 무엇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와 디자이너에게 낙서는 최고의 레시피를 찾기 위한 기록의 연습인지 모른다. 낙서는 기록이고, 생각은 기억이며, 요리는 실행이다. 어떤 기록을 다시 기억하여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낼지는 모두 자기만의 레시피를 찾아 헤매는 과정이다. 오늘의 요리가, 내일의 요리를 똑같이 만들어낸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디자이너는 규칙과 불규칙을 오가며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낙서를 해야 한다. 쓸데없는 낙서가 결국 가장 쓸모 있는 레시피가 될 때까지 말이다.

    강구룡  
    그래픽디자이너, 디자인 저술가. 포스터와 책을 주로 디자인하지만,  
    디자이너로 작업하며 실패한 경험과 성공 이야기를 8:2로 버물려 글도 쓴다.  
    틈틈이 이 둘을 왔다갔다하며 낙서를 한지도 제법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그린 낙서로 조만간 새로운 책을 내려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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