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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이너의 낙서 #2 규칙적으로 낙서하기 – 네모칸을 벗어나거나 말거나 

    스퀘어드 타입의 노트는 네모난 격자가 전면에 채워져 있어, 심리적으로 자유롭게 선을 이리저리 긋기 힘들다.(그물에 갇힌 물고기라고 할까.) 꼭 네모 칸과 선에 맞추어 면을 채우거나 선을 긋는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처럼, 한 계단씩 그림을 그리는 식이다.


    글. 강구룡

    발행일. 2015년 10월 29일

    디자이너의 낙서 #2 규칙적으로 낙서하기 – 네모칸을 벗어나거나 말거나 

    8년 전에 몰스킨 노트북을 우연히 구입하게 되었다. 비싼 노트지만, 피카소도 썼다고 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몰스킨 노트북은 무늬가 없는 플레인(Plain), 그리드가 있는 스퀘어드(Squared), 밑줄이 그어져 있는 룰드(Ruled)가 있는데, 이 중에 스퀘어드를 샀다. A5 종이쯤 되는 크기의 검은색 노트였는데, 때마침 졸업 논문을 준비해야 해서 모든 기록을 이 노트북에 했다. 스퀘어드 타입의 노트는 네모난 격자가 전면에 채워져 있어, 심리적으로 자유롭게 선을 이리저리 긋기 힘들다.(그물에 갇힌 물고기라고 할까.) 꼭 네모 칸과 선에 맞추어 면을 채우거나 선을 긋는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처럼, 한 계단씩 그림을 그리는 식이다. 면을 그릴 때는 벽돌을 쌓고는 다시 틈을 맞추어 다음 벽돌을 올리는 식으로 구조적으로 그리기 좋다. 선을 그릴 때도 자석에 이끌리듯 네모 칸을 따라 직선과 대각선을 긋기 쉽다. 테트리스는 쌓아서 없애는 맛이지만, 스퀘어드 노트의 낙서는 쌓아서 채우는 맛이다.

    스퀘어드 노트 속 한 낙서 중 일부. 사각형과 원이 격자무늬의 크기에 맞게 그려지고 레고 블록처럼 하나, 둘씩 모여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 낸다. 오른쪽 한글 ‘욕’을 최대한 정갈하게 쓰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  
    다양한 블록. 사각형과 원에 무늬가 더해지며 여러 가지 블록이 만들어졌다. 왼쪽의 자유로운 곡선의 한 남자가 규칙적인 블록과 합쳐져 있다. 아마 ‘+’와 ‘-‘ 나사 볼트로 자동차를 정비하는 정비공을 그리려고 했던 것 같다.  

    문제는 딱 맞게 짜인 틀 때문에 자유롭게 휘갈기기 조심스러워진다. 더구나 몰스킨이라니…. 비싼 가죽 노트에 하나라도 더 채워서 써야지! 라는 압박감으로 성실하게 규칙적으로 낙서를 한다. 낙서뿐이 아니다. 격자가 그려진 화면이나 화장실 타일 무늬를 보면 지금도 네모난 상자와 계단을 그려 넣고 싶어진다. 체스나 바둑은 이런 격자를 이용해 규칙을 지키며 게임을 한다. 한 칸, 두 칸이라 표현하지 이만큼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격자에 갇힌 낙서는 게임처럼 규칙을 만든다. 가장 작은 단위를 정하고 원, 네모, 마름모로 그림을 그린다. 사람의 눈을 사각형으로 그러거나, A, B, C…. 알파벳을 사각형 몇 개로 만든다. 이런 규칙을 지키다 보면, 전화로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몇 번째 격자에 네모를 그리고, 그 옆에 다음 네모를 그리시오.”라는 설명서를 받으며 말이다. 이런 규칙에 갇혀 낙서를 하다 보면, “나오는 게 뻔할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 규칙적인 것에서 불규칙한 모양이 나온다. 생각 없이 한 칸씩 선을 줄에 맞추어 그리거나 면을 채우다 보면 이상한 모양이 나타난다. 그러다가 나 같은 덩치 큰 놈이… “작은 노트에 이러고 있다니!”라는 생각이 들면 격자를 탈출하여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때도 있다(역설적으로 이런 그림은 귀여운 얼굴 또는 아이가 대부분이다). 어찌 되었든, 격자에 갇힌 낙서는 생각처럼 규칙적이지도 않고, 생각만큼 불규칙하지도 않다. 오히려 다양한 규칙적 형태가 모여, 불규칙한 전체 이미지를 만든다.

    『디지털이다(Being Digital)』이라는 책을 쓴 니콜라스 네그로폰테라는 MIT미디어랩의 설립자가 있다. 아날로그는 만질 수 있는 아톰(Atom)으로 이루어져 있고, 디지털은 0과1로 구분되는 가상의 비트(Bit)로 되어 있다고 한다. 격자무늬 속 낙서는 아톰과 비트가 뒤섞인 묘한 매력이 있다. 규칙적인 0과1의 디지털 격자무늬에 펜의 불규칙한 잉크 방울이 만나 이상한 화음을 연주하는 거랄까. 오선지에 그려진 음표가 번져나가 음을 이탈하는 것처럼, 규칙 속에서 미묘한 떨림을 만들어 낸다. 낙서란, 규칙 속에서 발견하는 어색한 모양과 예상치 못한 결과가 아닐까. 그러므로 하얀 종이에 자유롭게 그림만 그린 창작자에게는 스퀘어드 노트가 이상한 매력으로 다가올지 모르겠다. 하얀 종이를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안 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규칙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은 모두 그리는 이의 몫이다.

    스퀘어드 노트에 그린 모듈형 글자. 가장 작은 네모 칸을 바탕으로 곡선과 직선, 대각선을 이용해 형태가 자유자재로 변하는 알파벳을 그렸다. 스퀘어드 노트는 모듈형 글자를 만드는데 탁월하다. 오른쪽 아래의 작은 그림이 유난히 눈에 띈다. ‘도미노(DOMINO)’라는 글자와 한 아이가 양팔을 벌리고는, ‘포스터로 제작하자.’는 문구가 보인다. 아마 도미노 피자를 먹은 행복을 포스터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 
     네모난 격자 위에 그려진 다양한 사람 얼굴. 한동안 추상적인 원과 직선 그리기가 지겨워지면 격자 노트에 사람 얼굴을 그렸다. 네모난 틀에 벗어나 프로레슬링 선수, 배트맨, 핀란드 사람 등…. 사람 얼굴을 그리면 ‘다시 규칙적으로 그려보자!’라는 힘을 얻는다. 
    기타 낙서. 낙서란 규칙과 불규칙한 형태를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사이에서 그리는 활동이 아닐까. 스퀘어드 노트의 격자무늬가 규칙적인 가이드 라인이라면, 잉크는 번지고, 채워지며 무의식의 형태를 그려준다. 노트와 팬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창작 도구이다.  
    강구룡 
    그래픽디자이너, 디자인 저술가. 포스터와 책을 주로 디자인하지만,
    디자이너로 작업하며 실패한 경험과 성공 이야기를 8:2로 버물려 글도 쓴다.
    틈틈이 이 둘을 왔다갔다하며 낙서를 한지도 제법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그린 낙서로 조만간 새로운 책을 내려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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