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디자인을 하거나 글을 쓰면서 대부분 시간을 무언가 끄적이며 보낼 때가 많다. 낙서를 즐긴다. 대부분의 낙서를 A4 용지나 노트에 하는데, 웬만하면 안 버린다. 집에 낙서가 쌓여갈수록 ‘음…. 이 정도면 훗날 유명해진 나를 위해 미술관에서 아카이빙 자료로 쓸 거야. 역시 작가는 자료를 잘 모아야 해.’라는 망상을 한다. 그러니깐 낙서는 나를 위한 기록이자, 쓸데없는 상상을 그리는 창작 노트다.
사전을 찾아보면 낙서는 ‘글자, 그림 따위를 장난으로 아무 데나 함부로 쓴다’는 뜻이다. 여기에 ‘나도 모르게’라는 표현을 집어넣어야 한다. 나도 모르게 끄적이다 보면, 그리다가 문득 ‘이거야!’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물론 이 경우는 흔하지 않아요. 가뭄에 단비처럼 아주 가끔 옵니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한 번씩 지나간 낙서를 들춰보면 ‘요런 모양은 괜찮은데?’하는 정체불명의 모양이 꿈틀거린다. 문제는 이런 모양을 내가 왜 그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다. 불행히도 나는 안면인식장애가 있어 정면으로 본 사람의 얼굴이나 모양을 인지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리 믿을만하지 못한 금붕어의 기억력으로 몇 달, 몇 년 전에 그린 스케치를 기억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니, 이런 정체불명의 그림이 나오면 ‘새롭다. 멋진데?’ 남의 그림을 보듯이 본다. 어떤 뜻인지 알 수 없어 비효율적이지만, 이런 낭비와 쓸데없는 그림이 가득한 낙서를 볼 때마다 무언가 뿌듯한 기분이 든다. 참 쓸데없이 살고 있구나! 라는 잔소리보다는 언젠간 쓸 데 있을 거야! 라는 희망이 보인다.
낙서란 정체불명의 모양으로 그려져야 제맛이다. 이 모양은 이런 과정으로 왔습니다! 라며 남을 설득해야 하는 디자이너의 직업상, 쓸데없이 그리기가 어렵다. 언젠가부터 모든 게 명확해야 살아남는다. 왜 이 색깔을 썼나요? 이건 뭐지요? 라는 질문부터 너의 꿈은 구체적으로 뭐니? 라며 꿈까지 명확하게 강요한다. 그러니깐 디자이너에게 최대의 적은 ‘그냥’이 아닐까. 그냥 했습니다! 라는 말을 하면 무언가 전문성이 떨어진다. 금융업자가 퇴직연금을 팔면서, 이 상품은 뭐가 좋나요? 라고 고객이 물으면 ‘그냥 좋습니다.’라는 말과 똑같다. 그러니 무엇을 팔려면 부단히 정확해야 한다. 이게 왜 좋은지 비교하며 알려야 한다. 그냥은 없다.
그래도 뒤돌아 생각해보면 모든 게 명확하면 재미가 없다. 시험을 보는 학생 중 한 명이 번쩍 일어나, 노래를 부른다면… 미쳤구나! 라는 소리를 듣겠지만, 재미있는데! 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깐 이런 일탈이 일어나야 좀 재미난 사회가 아닐까 한다. 모두 똑똑하고 정상인 사람만 있다면, 낙서란 정말 쓸데없는 휴짓조각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래도 누구 하나는 신성한 도서관에서 쓸데없이 그림이나 그리는 사람이 한두 명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영화 〈판의 미로〉, 〈헬보이〉로 유명한 길예르모 델 토로는 『길예르모 델 토로의 창작 노트』라는 책에서 영화의 캐릭터와 공간을 이미 낙서와 스케치로 그려냈다. 그는 항상 ‘데이 러너(Day Runner)’라는 노트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영화를 찍을 때면 가지고 다니며 끄적인다. 〈헬보이〉에 나오는 녹색 식물 괴물이며 〈판의 미로〉의 요정도 이미 노트에 낙서로 그려졌다. 그러니 재미있는 무엇을 만들려면 열심히 쓸데없어져야 한다. 정체불명의 그림을 볼 때마다, 오늘 하루는 얼마나 쓸데없었나…. 반성해 본다. 낙서란, 그리고 창작이란 정체가 불명확해야 진정으로 쓸모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강구룡
그래픽디자이너, 디자인 저술가. 포스터와 책을 주로 디자인하지만,
디자이너로 작업하며 실패한 경험과 성공 이야기를 8:2로 버물려 글도 쓴다.
틈틈이 이 둘을 왔다갔다하며 낙서를 한지도 제법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그린 낙서로 조만간 새로운 책을 내려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