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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선영의 캘리 & 그래피 #1 꼬리에 꼬리를 무는 캘리그래피이야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캘리그래피이야기 ― 박선영의 캘리 & 그래피(aka 캘리그래피 야화)


    글. 박선영

    발행일. 2012년 01월 05일

    박선영의 캘리 & 그래피 #1 꼬리에 꼬리를 무는 캘리그래피이야기

    기억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그 여자를 지켜주는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로 올겨울 안방극장을 ‘수애앓이’에 빠지게 한 드라마 ‘천일의 약속’이 얼마 전 종영했다. 〈천일의 약속〉은 두 주인공 지형(김래원)과 서연(수애)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물론 매회 드라마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타이틀에도 눈길이 갔다. 캘리그래피를 사용한 타이틀 중 ‘약속’이라는 단어가 어딘지 모르게 묘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림] 〈천일의 약속(2011)〉 캘리그래피 강병인

    드라마 〈천일의 약속〉 타이틀에 사용된 캘리그래피를 쓴 강병인 작가는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타이틀을 소의 뿔 모양을 빌어 뿔난 형상을 시각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타이틀에서는 ‘약속’이라는 단어가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약’의 ‘ㅑ’와 ‘속’의 ‘ㅗ’가 ‘ㅅ’을 뚫고 이어져 있는데, 이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영원히 함께하자던 약속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무리하게 보일 정도로 강하게 결합되어 있지만 가독성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덕분에 ‘약속’이라는 의미의 상징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글자가 아닌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가게 된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약속’이라는 단어의 자소가 모두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속’의 ‘ㄱ’이 ‘ㅗ’에 붙어 있어 결합, 즉 약속이라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이어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ㄱ’의 얇고 허약함은 주인공의 불안한 상태를 보여주는 듯 위태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드라마의 컨셉과 의도에 맞춰 전략적으로 만들어진 캘리그래피 타이틀은 시청자들의 감성을 자극했고, 이는 드라마 속 이야기로 감정을 이어가는 효과를 주었다. 즉, ‘약속’과 슬픈 스토리의 의미를 상기시키며 시청자가 슬픈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힘을 실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꼬리 1. 획, 어떻게 쓸 것인가?

    〈불꽃처럼 나비처럼(2009)〉 / 우 – 포스터 1, 좌 – 포스터 2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첫 번째포스터(포스터 1)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불’이다. ‘ㅜ’가 ‘ㄹ’에 똑바로 연결되지 못한 채 ’ㅂ’과 ‘ㅜ’ 사이의 허획과 두께가 같아 자칫 ‘블’로 읽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흘려쓰기’에 중점을 둔 탓인데, 실제로 이 포스터는 홍보 포스터로 정식 포스터가 배포될 때는 ‘ㅜ’획의 두께를 두껍게 해 가독성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포스터 2).

    하지만 ‘꽃’에서 ‘ㅗ’가 불안정하게 처리돼 전체적인 자형의 완성도 면에서는 여전히 의문을 품게 하는 작품이다. 게다가 복사하여 두 번 연속으로 사용한 ‘처럼’이라는 글자는 캘리그래피의 자연스러움을 깨뜨려 인위적으로 보인다. 조형적으로는 ‘꽃’의 ‘ㅊ’이나 ‘비’의 ‘ㅣ’가 무사의 칼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천일의 약속’의 ‘약속’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야기의 상징성을 함축적으로 형상화해 내기에는 버거웠던 것 같다.

    캘리그래피를 사용해 타이틀에 독창성과 차별성을 주고 싶다면 우선 한글의 자형과 획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허획과 실획의 구분을 명확하게 둬 가독성을 해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즉, 흘려 쓰더라도 한글의 기본적인 구조는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이다.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타이틀과 달리 흘려 쓰거나 힘찬 표현을 할 때도 획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표현한 작품도 있다.

    〈퍼펙트 게임(2011)〉 / 〈타짜(2006)〉 캘리그래피 이상현

    영화 〈퍼펙트 게임〉의 타이틀에 사용된 캘리그래피는 힘찬 속도감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으로 자형 하나하나의 완성도는 높아 보이지 않으나 전체적인 구도와 표현이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 방향성을 느낄 수 있다. 이상현 작가가 쓴 영화 〈타짜〉의 캘리그래피는 거친 칡뿌리를 사용해 타짜들의 거친 삶을 강력하게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매우 거친 칡뿌리로 만든 붓을 쥐고 약간 두꺼운 종이에 먹이 팍 튀도록 써서 패를 자신 있게 내리치는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글자들이 한 방향으로 일정하게 향해 있음을 볼 수 있다. 

    꼬리 2. 캘리그래피 재료에 관하여

    영화 〈타짜〉의 타이틀 제작에 칡뿌리가 사용된 것처럼 영화 타이틀 중에는 붓이 아닌 다양한 재료로 상징성을 강하게 표현한 캘리그래피가 많다. 그 중 하나가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인데, 영화 타이틀 제작에 한글 타이포그래피 열풍을 불러일으킨 작품이기도 하다.

    나무젓가락을 사용해 거칠고 역동적으로 표현한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타이틀은 먹이 번지고 튀는 느낌이 주인공 류승범이 피를 토하는 장면과 조화를 이뤄 마치 혈서에 피가 튄 것 같은 효과를 준다. 즉, 타이틀에 사용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캘리그래피는 핏덩어리를 형상화한 글꼴로, 영화의 치열하고 잔인한 폭력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결국 상징성과 주목성이 부각된 글자(캘리그래피) 자체가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 캘리그래피 김혜진 /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2008)〉 캘리그래피 조원준

    이처럼 타이틀의 캘리그래피를 통해 영화의 느낌을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꼭 붓이 아니더라도 각종 펜과 나뭇가지, 롤러, 면봉, 휴지 등 여러 가지 재료와 다양한 재질의 종이를 이용해 컨셉에 맞는 캘리그래피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물론 같은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작가의 개성과 물의 농도 등에 따라 표현의 폭은 매우 넓다.

    먹물이 번지는 비슷한 표현임에도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정반대의 느낌을 주는 작품이 있다. 영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의 타이틀인데, 눈물이 번지는 듯한 어눌한 글자들을 통해 영화의 감성을 표현했다. 특히 글자의 배치가 주인공 공효진의 시선 방향과 어우러져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 타이틀에 사용된 캘리그래피를 그냥 잘 쓴 글씨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캘리그래피는 단순히 잘 쓴 글씨가 아니라 작품의 컨셉과 줄거리에 따라 달리 쓰일 뿐 아니라 그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의 글꼴이다. 모양과 색, 레이아웃 등을 통해 여러 가지 감정을 표현하듯 캘리그래피 역시 글자의 이미지화를 통해 감성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박선영
    그래픽디자이너이자 996크리에이티브랩 소장.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창립회원으로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동양적인 문화요소와 조형을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으로 융화시키는 작업에 관심이 많은 그는 독립적인 프로젝트 활동 및 문화 관련 프로젝트와 전시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래픽디자인 관련 과목을 강의 중이다. 논문 〈캘리그래피(손멋글씨)의 조형적 표현과 활용에 관한 연구〉발표했고, 이탈리아 Utilila Manifesta/Fight Poverty design contest 2010에서 작품이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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