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ulto(디꿀또)는 김엘리아나가 자신의 모토로 쓰는 말이다. 스페인어 diseño(디세뇨, 디자인), culto(꿀또, 문화), oculto(오꿀또, 숨겨짐)의 철자로 만든 조어다. 김엘리아나의 DiCulto는 ‘라틴 아메리카와 한국의 숨겨진 디자인 문화를 밝히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그녀의 표현을 빌면 “디자인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의 과(課)와 업(業)”을 함축한 말이기도 하다. 김엘리아나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디자인을 공부하고 한국에서 박사학위(서울대학교 디자인역사문화전공)를 받았다. 지금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를 무대로 활발히 학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아직은 다소 낯선 ‘라틴 아메리카 디자인’을 국내에 알리고, 한국과 중남미 디자인계의 교류를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타이포그래피 서울』 시리즈 [김엘리아나의 DiCulto]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중남미 디자인계의 문화와 역사, 현지에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와 타이포그래퍼, 디자인 스튜디오를 소개한다. 이 시리즈를 통해 우리 인식 체계 안의 ‘디자인 영토’가 라틴 아메리카 대륙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오스칼 게레로(Óscar Guerrero)는 콜롬비아의 타이포그래피 전문가로 불린다. 오스칼의 서체 디자인과 그가 운영하는 스튜디오 ‘수모타입(Sumotype)’의 업적은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있다.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오스칼 게레로의 열정은 비교적 늦은 시기에,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타올랐다고 한다. 오스칼은 2011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대학교(Universidad de Buenos Aires, UBA)의 타이포그래피 대학원(Maestría en Tipografía)에 진학하여 타이포그래피와 인연을 맺었다. 이제는 타이포그래피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라고.
오스칼 게레로는 다양한 국제 수상 경력을 쌓았고, 지금은 타이포그래퍼 활동뿐 아니라 콜롬비아 보고타의 타데오 로사노 대학교(Universidad Jorge Tadeo Lozano)와 UBA에서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치고 있다. 또 그는 라틴 아메리카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에 매번 초청 받는 디자이너이자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오스칼 게레로가 만든 서체들, 그러니까 수모타입의 글자들에서는 독특한 캘리그래피 스타일이 묻어난다. 오스칼과 수모타입의 이러한 디자인 스타일은 타이포그래피 역사 연구에서 기인한다. (오스칼의 표현을 빌면) “클래식 타이포그래피”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리디자인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모든 작업의 시작점이다.
『타이포그래피 서울』 시리즈 [김엘리아나의 DiCulto] 두 번째 시간은 오스칼 게레로와의 인터뷰다. 그의 디자인 스타일과 철학,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직접 들어봤다.
타이포그래피에 빠져든 때가 서른 살 무렵이라고 들었다. 스스로에게는 새 출발이기도 했을 것 같다.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스승, 또는 좋아했던 타이포그래퍼들이 궁금하다.
운 좋게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자마자 아르헨티나 타이포그래피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벤 폰타나(Rubén Fontana)의 수업을 수강할 기회가 있었다. 그의 열정과 가르침이 내 타이포그래피 철학의 탄탄한 기반이 되었고, 타이포그래피 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만들었다.
타이포그래피를 점점 더 알아가면서 클래식 타이포그래퍼들—타이포그래피를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후세대에 큰 영향을 준 인물들에 대한 존경심이 점점 싹텄다. [어도비 젠슨(Adobe Jenson)] 서체를 만든 로버트 슬림바흐(Robert Slimbach), [보도니(Bodoni)]의 아버지 지암바티스타 보도니(Giambattista Bodoni)는 타이포그래피 입문 과정에서 길잡이가 되어준 스승들이다. 현대 디자이너들 중에서는 브람 더 되스(Bram de Does)나 프레드 스메이어스(Fred Smeijers)의 작업들을 많이 공부했다.
아르헨티나 유학을 마치고 ‘수모타입’을 설립한 것인가? 스튜디오 이름에 담긴 의미와 지향하는 디자인 스타일이 궁금하다.
타이포그래퍼로서의 본격적인 활동과 연구는 2012년 UBA 대학원 졸업 이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 오고 있다. 2014년 타이포그래피 분야에 전념하게 되면서 스튜디오 수모타입을 설립했다. 처음 구상을 한 시기는 유학 시절이었다. 디자인을 너무도 사랑했던 나였기에(웃음), 스튜디오 이름을 ‘수모 플라세르(Sumo Placer)’로 지으려 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부터 타이포그래피 분야에 몰입하게 되어 ‘아주 많다’를 의미하는 ‘수모(Sumo)’만 남겨두고 거기에 ‘타입(Type)’을 덧붙여 ‘수모타입’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타이포그래피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 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
역사적인 타이포그래피를 분석·연구하여 재해석하려는 의지와 철학, 이것이 수모타입의 디자인 스타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른바 클래식 타이포그래피를 새로운 시대 배경에 맞게 상업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인 디자인 프로젝트에 사용 가능한 폰트로 구현하는 것이 수모타입의 과업이자 디자이너 오스칼 게레로의 지향점이다.
디자인 스타일에 대하여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서체를 제작할 때 플랫 팁 캘리그래피(flat tip calligraphy)나 휴머니스틱 이탤릭(humanistic italic)의 요소를 자주 적용한다. 오스칼 게레로라는 작업자의 흔적을 남기려는 시도다. 특히 캘리그래피는 타이포그래피 연구 과정에서 글자 자체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캘리그래피 속성이 뛰어난 디지털 활자를 적극적으로 개발하려고 한다.
수모타입의 과업이자 디자이너로서의 지향점이 ‘클래식 타이포그래피의 재해석·재구현’이라는 것이 인상적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글자를 만드나?
음… 일반적인 다자인 프로젝트와 별 다를 게 없을 것 같은데….(웃음) 먼저, 본격적인 제작 단계 전에 새로운 활자가 물려받을 역사적 속성에 대한 분석과, 그 역사를 이해하는 과정을 반드시 선행한다. 이를테면 2020년 발표한 [에피카 프로] 패밀리의 세리프 버전을 보면, [어도비 젠슨]이나 [센토(Centaur)]와 유사성을 지닌다. 그러나 산세리프 버전을 디자인할 때는 훨씬 복잡한 개인적인 해석과 재구성이 필요했다. 작업자로서 내가 매 순간 내려야 했던 결정은, 클래식 타이포그래피의 형태를 존중하는 방향이 아니라, [어도비 젠슨]과 [센토]의 틀을 부수고 새로운 조형의 밸런스를 찾는 쪽을 향해 있었다.
[에피카 프로] 산세리프체 작업은 고전미를 유지함과 동시에 활자의 주요 특징인 세리프를 없애야만 했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완성하는 데 무려 8년이 걸렸다. [에피카 프로] 패밀리를 내놓으면서 타이포그래피 사회에서 인정도 받고 국제적으로 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기나긴 프로젝트 기간 동안 정말 많이 공부했고, 그만큼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사랑도 더 굳건해졌다.
[에피카 프로]는 이름처럼 그야말로 대서사시(epic)를 써내려간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든다. 세리프에서 산세리프로 전환하는 과정도 어렵지만, 패밀리 서체 전부를 체계적으로 디자인하는 과정도 만만찮은 작업이다. 베리어블(variable) 같은 특정 구성 요소를 만들 때 어려움은 없었나?
정확한 지적이다. 체계적인 활자 가족을 구현하는 것이 바로 타이포그래퍼의 가장 큰 과제다. 사용자들의 용도에 맞게끔 가족군을 구성하면서도, 활자체 고유의 특징이 균일하게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예를 들어 볼드(bold)나 블랙(black)은 18포인트 넘는 크기로 제목(헤드라인) 영역에 많이 쓰인다. 이와 달리 본문체로 적합한 라이트(light)나 콘덴스드(condensed)는 대개 9~12포인트로 사용된다. 이러한 굵기 변화를 감안하여 최대한 글자의 고유성이 손상되지 않도록 균형감을 잡아 가는 데 애를 쓴다.
그리고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의 어려운 점을 꼽는다면, 역시나 ‘소통’에 관한 것이다. 활자의 궁극적 목표는 올바른 소통이다. 스타일을 지나치게 돋보이게 하려다 가독성을 희생시킨 사례를 간혹 보게 된다. 스타일리시함과 소통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야말로 타이포그래퍼의 평생 숙제가 아닐까 싶다.
예전에 한 맥주 브랜드의 로고 제작을 의뢰 받은 적이 있다. 게일(Gaelic) 및 켈트(Celtic) 문화 알파벳의 유형을 조사·분석하여 활자에 역사성이 묻어나면서도 고리타분해 보이지 않고, 무엇보다 ‘잘 읽히도록’ 하기까지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이 과정을 통해 타이포그래피에서 ‘소통’이 얼마나 주요한지 다시금 깨달았다.
올해 새로운 패밀리 서체를 선보일 예정인 것으로 안다.
[브리가다]와 [푸가]라는 두 가지 패밀리를 디자인하고 있다. 수모타입과 오스칼 게레로만의 스타일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새 가족’이 될 것이다. 아마도 올해 말쯤 모든 작업이 끝날 것 같다. 이 외에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생각과 수모타입의 작업들을 한국에 소개하게 되어 반갑고, 이런 좋은 기회를 마련해준 인터뷰어 김엘리아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린다.
스튜디오 ‘수모타입’ 오스칼 게레로
사이트 ➲ sumotype.com / 인스타그램 ➲ @sumotype
디자인 연구자, 교육자.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디자인을 공부하고 한국에서 석박사 학위(서울대학교 디자인역사문화전공)를 받았다. 중남미 국가들과 한국을 오가며 학술 행사에 참여하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아르헨티나, 칠레 등 라틴 아메리카의 디자인 잡지들과 국내의 월간 『디자인』 및 『디자인 프레스』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했다. @DiCul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