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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민준의 서(書) #6 한글 서체의 완성 ‘궁체정자’

    서예가 오민준의 캘리그래피 시론 ― 궁녀들의 엄격하고 단정한 글씨 '궁체정자'


    글. 오민준

    발행일. 2013년 04월 15일

    오민준의 서(書) #6 한글 서체의 완성 ‘궁체정자’

    한글 서체는 크게 판본체와 필사체로 구분된다. 앞서 판본체에 대해 언급했으며, 이번에는 필사체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필사체는 육필서(肉筆書)로 크게 궁체와 민체로 나눌 수 있으며, 궁체는 다시 정자, 흘림으로 구분되며, 흘림은 다시 반흘림, 흘림, 진흘림으로 나누어진다.

    한글 서체를 대표하는 궁체는 붓글씨로서의 멋과 아름다움을 지니며 한문 서체에서도 찾기 어려운 독특한 성격과 독창성을 띠고 있다. 궁중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궁녀들에 의해 생성, 발전되어온 궁체는 궁녀들만이 쓴 글씨체를 말한다. 궁체를 ‘궁중 서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는 잘못된 언급이며, 궁중에서 쓰인 글씨가 모두 ‘궁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궁체에 대해 언급한 사전들을 보더라도 모두 하나같이 ‘궁녀들이 쓴 글씨체’라고 풀이하고 있다.

    궁체의 중심인 궁녀들은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이 갖추어야 할 몸가짐에 상전을 위한 한결같은 충성심과 한없이 참아야 하는 인내심, 그리고 자기 자신을 버리는 희생정신 등 오로지 상전만을 위한 삶을 살아야 했다. 궁녀들은 왕이나 왕비 또는 대비 등 궁 안의 윗전들에게 문안을 아뢰는 글월이나 친가의 어른들에게 드리는 문안 편지, 또는 문서 등에 글씨를 썼는데, 한 글자, 한 글자, 획 하나하나에 온갖 정성을 담아 써야 함은 물론, 반드시 법도에 맞게 바르게 써야 했다. 이러한 궁녀들의 정신에서 ‘궁체’만의 특징을 느낄 수 있다. 궁체의 엄격하고 단정한 글씨는 먼저 사대부 집안 여성들의 환영을 받았고, 점차 일반 서민층에까지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 후 여류문학, 서민문학이 활발하게 발달하였고, 궁중에서도 소설, 사기, 전기, 여계서 등을 많이 읽게 되면서 이것을 베끼는 일, 편지를 대필하는 일 등이 많아져 전문적으로 언문 글씨를 필사하는 서사 상궁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발전된 궁체는 예술성보다는 실용적 목적으로 쓴 글씨로 가냘프고 여리면서도 단정하고 아름다운 바른 글씨체가 만들어졌다.

    한글 궁체정자의 기본 획 형성과정

    서체의 기본 획이 되는 가로획과 세로획의 변화는 그 서체의 형성과 흐름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된다. 붓의 운필 방법에 따라 필획과 자형이 형성되기 때문에 기필, 행필, 수필 등의 운필법은 같은 서체의 글씨를 쓰더라도 각기 다른 필의가 느껴진다. 한글 서체 또한 기본 획인 가로획과 세로획에 따라 서체의 변천을 가져왔으며, 한글 서체의 완성이라 불리는 궁체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표1) 궁체정자의 가로획과 세로획의 형성과정

    한글 서체의 기본 획인 가로획과 세로획의 형성과정은 표1에서 그 변화된 모습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판본고체는 부드러운 원필에서 모가 난 방필로 변화하였고, 그 후 판본필사체는 궁체정자의 기본 획을 형성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판본필사체인 <세종어제훈민정음>과 상당히 유사한 부분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는 그 당시 조맹부의 ‘송설체’의 영향으로 한문 해서가 유행하였고,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판본고체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해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등 한글과 한문을 병행하여 필사해 왔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 필의가 비슷하다. 한글 서체 또한 한문 서체의 변천과 맥락이 비슷하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궁체정자의 기본 획을 살펴보면, 판본필사체의 가로획은 수평을 이루지만 궁체정자를 대표하는 <남계연담>과 <옥원듕회연>에서는 기울기가 생겨 오른쪽 위로 수필 부분이 올라갔으며, 수필 부분이 기필 부분보다 상대적으로 커서 상당히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세로획은 기필 부분과 수필 부분이 판본필사체보다 길다. 짧고 뭉툭한 판본필사체의 세로획보다 시원스럽게 쭉 빠져 상당한 세련미를 엿볼 수 있으며, 육필서로서의 멋스러움을 한껏 뽐낸 것으로 보인다. 궁체정자의 기본 획은 유려한 흘림의 기본 획으로 변화하였고, 다른 자음과 모음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한글 궁체정자의 자형 특징

    일반적으로 글자의 중심축은 자형의 중심에 있다. 한문 서체나 한글 판본체만 보더라도 글자의 중심축은 가운데에 맞춰져 글자의 밸런스를 취하지만, 한글 궁체정자 자형의 중심축은 오른쪽에 있는 특징을 가진다. 세로쓰기 서사 형식을 한 당시의 상황에서 한글 궁체정자의 자형을 글자의 가운데에 중심축을 갖는다면, 글자의 중심이 흐트러지고, 세로획의 위치가 일정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글자를 읽는 데 어려움이 있다. 아래 표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눈에 글자가 잘 들어오지 않고, 단아하고 정갈한 모습은 사라지고 어수선하게 보인다. 우리 선조의 자형 감각과 글자의 구성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표2) 궁체정자의 중심축 비교

    일정한 규칙을 갖는 한글 궁체정자이지만, 고전 자료를 보면 각각의 특징을 가진다. 물론 글씨를 쓰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운필 방법과 자신이 좋아하는 붓, 좋아하는 궁체정자의 스타일, 먹물의 양 등 글을 쓰는 사람의 기호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보은기우록>의 경우 다른 글씨에 비해 상당히 많은 양의 먹을 사용하고 있고, <손텬사녕이록>과 <태상감응편>은 세로획의 수필을 왼쪽으로 꺾어 빼내는 모양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경쾌하게 한다. 조금씩의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모두 글자의 중심축을 오른쪽에 두면서 필선의 아름다움과 단아하고, 정갈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표3) 한글 궁체정자의 고전 자료 부분

    한글 궁체정자의 모음에 따른 자음의 변형

    궁체정자의 대부분 자음은 모음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한다. 이것은 한글 궁체만의 특징으로 보이며, 한문 서체뿐만 아니라 다른 문자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한글 궁체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한글 자형은 자음과 모음 또는 자음, 모음, 자음의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그때마다 글자의 구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글자의 중심을 잡는데 자음이 각각 변한 것으로 보인다. 모음에 따라 공간이 다르게 형성되기 때문에 자음의 시작 부분, 또는 끝 부분에서 각기 다른 외형의 모양과 획의 기울기, 길이, 크기가 나타난다.

    모음에 따라 자음 형태의 변화는 크게 ‘ㄱ, ㅋ’, ‘ㄴ, ㄷ, ㄹ, ㅌ’, ‘ㅅ, ㅈ, ㅊ’의 3가지 패턴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ㅍ’은 마지막 획의 길이와 크기의 변화가 나타난다. 모음에 따라 변화하지 않고 일정한 형태를 취하는 자음은 ‘ㅁ, ㅂ, ㅇ, ㅎ’이다. 모음에 따라 변화하는 자음의 형태를 파악한다면 궁체 정자의 자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표4) 모음에 따른 자음 형태의 변화(꽃들 이미경 글씨)

    한글 궁체정자 고전자료

    남계연담 권지삼

    <남계연담>은 명나라 개국 초기의 혼란한 정국을 다룬 연의(演義)소설로 명 태조가 천하를 통일한 후 공신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 등을 다룬 내용으로 작자, 연대 미상의 고소설이다. 조선 말기에 번역 소설을 필사한 것으로 전부 3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닥나무 종이에 9행씩 배열하고, 행마다 20여 자씩 배자했으며, 글씨 크기는 0.7~0.9㎝ 정도이다. <남계연담>은 궁체정자를 대표하는 글씨로 글씨의 결구와 필획이 단정하고, 단아하여 한글 궁체정자의 교본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글씨이다.

    역대기년 남됴송

    <역대기년>은 중국 역대 제왕의 일람표이며, 한글로 쓴 필사본으로 정자로 쓴 것과 흘림으로 쓴 것 두 가지가 있다. 9행씩 배자하여 정자체로 쓴 이 글씨는 글자의 대소 관계, 서선의 굵기가 알맞고, 자음과 모음의 결구가 좋아 궁체 정자체의 단아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글씨이다.

    손텬사령이록 권지일

    <손텬사령이록>은 작자와 창작 연대가 미상인 한글 창작 소설로 중국 송나라가 배경이며, 주인공 손기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한 면에 10행, 행마다 17~20자씩 궁체 정자체로 쓴 필사본이다. 글자 간의 사이가 좁고 글자의 크기는 작지만, 글자의 결구와 태세가 좋으며, 자신감 넘치는 운필에서 궁체 정자체이지만 강한 필획을 느낄 수 있다.

    산성일기 병자

    <산성일기>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지내던 당시의 사정을 기록한 일기체로 쓴 단권의 필사본이다. 모두 세 종류로 하나는 궁체 반흘림(국립중앙박물관소장), 나머지 두 가지는 정자와 흘림으로 쓰인 낙선재본(한국정신문화원소장)이다. 이 글씨는 전쟁터라는 당시 상황과 환경에서 궁체정자체로 또박또박 쓴 것에 대단한 의의가 있다. 자간의 간격과 글자의 대소 관계가 다소 불안한 느낌이 들지만, 안정된 궁체 정자의 결구를 취하고 있다.

    옥원중회연 권지육

    <옥원중회연>은 작자 미상의 한글 창작 소설로 <옥원재합기연>의 이본이다. 21권 21책으로 한글 궁체로 쓰인 책 중의 제6권에 해당한다. 1면을 10행씩 배열하여 궁체정자체로 정성껏 세로로 쓴 이 글씨는 여러 필사본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받고 있어 한글 궁체 교본으로 많이 쓰고 있다. 대체로 글씨의 크기가 작은 편이나 필획의 힘찬 운필과 자음과 모음 간의 조화, 글자 간의 대소 조화, 결구가 잘된 것으로 한글 궁체정자를 대표하는 글씨이다.

    태상감응편 권지뎨일

    <태상감응편>은 중국 도교경전으로 선을 행하면 태상이 복을 내린다는 내용이며, 10권 10책으로 된 번역서이다. 정자체로 필사한 이 책은 1면을 9행씩 세로로 배열하였으며, 다른 필사본들보다 글자 크기가 작은 편이다. 글자의 태세와 결구가 좋지만, 글자의 크기가 고르지 않다. 받침이 있는 글자들은 받침이 없는 글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필사하였다. 세로획의 수필 부분을 왼쪽으로 꺾어 붓을 빼낸 모양과 대체로 가로획을 길게 써 시원스러운 느낌이 든다.

    여사서

    <여사서>는 중국 유교경전 사서를 모방하여 만든 여훈 서집으로 여자들의 수신(修身)과 행동규범에 관한 글들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이 글씨는 조선 말기 개화기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으로 보기 드물게 가장자리에 곽선과 세로로 사난을 만든 종이에 썼다. 글자의 태세가 크지 않고, 필획이 좀 가늘고 힘이 없어 보이는 느낌이 난다. 글자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는데, 받침이 없는 글씨와 받침이 있는 글자의 크기 차이가 상당히 크다. 하지만 글자의 자모음에 대한 짜임과 결구는 좋아 단아한 맛이 있다.

    보은기우록 권지십

    <보은기우록>은 조선 후기 작자 미상의 국문 소설이다. 한글 궁체 정자체로 필사한 책으로 모두 18권 18책으로 되어있는 것 중에 제10권에 해당하는 책이다. 붓 맛이 잘 표현된 글씨로 자간과 행간이 일정하고, 글자의 대소 관계, 결구가 좋다. 행의 끝 부분에서 다른 글씨들에 비해 다소 작은 글자들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단아한 글씨이다.

    서사상궁글씨본

    조선 말기에 궁중에서 정식 서사상궁이 되기 위해 궁체 쓰기 공부를 하던 일명 글씨본이라는 쓰기 연습 자료이다. 큰 화선지에 세로로 체본이 될 만한 모범 글씨를 선임 상궁이 써 주고, 그다음에 그대로 따라 쓸 수 있도록 빈칸을 두어 만들었던 자료이다. 어느 상궁이 모범 글씨 사이에 똑같은 궁체를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한글 필사체 궁체정자를 정리하며

    궁체는 궁중에서 언해본의 활용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각종 소설류의 책을 베끼는 일, 편지를 대필하는 일 등 예술적인 측면보다 실용을 목적으로 쓴 글씨체이다 보니 자유스러운 창작보다는 궁중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법도와 질서에서 단정하고 아름다운 바른 글씨가 만들어졌으며, 궁체 정자체만이 갖는 독특한 자형과 결구, 그리고 필획에서 극도로 정제된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궁체의 자형과 결구에 대한 특징은 글자의 중심축이 가운데가 아닌 우측인 점과 모음에 따라 자음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한글 문자 구조의 단순함을 우측 기선의 설정과 독창적 형태를 만들어 냈고, 모음에 따른 공간 구성을 자음의 변화로써 자형을 표현한 부분은 한문 서체나 다른 서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궁체 정자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캘리그래피에서 궁체, 그 중에서도 궁체정자의 활용은 그렇게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감성적 표현과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을 표현하기에는 궁체 정자라는 서체는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궁체 폰트가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한다. 하지만 궁체가 가지고 있는 정제된 멋과 아름다움에서 표현되는 운필법과 자형은 캘리그라피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정확한 운필법은 필선의 다양함을 꾀할 뿐만 아니라 표현하고자 하는 자형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캘리그라피에 대해 교육을 받은 후, 궁체를 공부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생각된다. 모음에 따라 변화되는 자음의 형태는 자형의 구성하는 능력과 공간구성의 효과를 가질 수 있으며, 자음과 모음의 결구는 또 다른 표현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글 서체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궁체 정자는 우리들의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한글 서체임을 알아야 한다.

    오민준
    현재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에서 대학정통서예를 공부한 후 신고전주의 캘리그라피/서예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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