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문의





    검색

    닫기
    t mode
    s mode
    지금 읽고 계신 글

    로컬 타이포 브랜딩: 개항로 서체 개발기 #시작하며

    로컬 브랜딩 + 지역 서체 개발 = ‘로컬 타이포 브랜딩’


    글. 이정은

    발행일. 2023년 02월 28일

    로컬 타이포 브랜딩: 개항로 서체 개발기 #시작하며

    [개항로 프로젝트]는 2018년 시작된 민간 주도 도시 재생 사업이다. 이 사업을 기획하고 지금까지 지속해 오고 있는 이들(개항로 노포 상인들, 브랜딩 전문가, 쉐프 등 10~20명이 협업한다)의 단체명이기도 하다. [개항로 프로젝트]는 인천 구도심(중구 동인천역 일대)의 낙후한 건물들을 리모델링하고, 오랜 시간 한자리를 지킨 노포들에 브랜딩이라는 새 숨을 불어넣기 위해 기획되었다.
    
    19세기 말 이 지역, 그러니까 제물포항(지금의 인천항) 일대는 이른바 ‘개항’[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부산, 원산, 인천 등 3개 항구도시들이 차례로 대외 무역의 문을 열며 개항장(開港場)으로 불렸다. 이 시기가 이른바 ‘개항기’다.]과 함께 외래 신문물이 유입되면서 근대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정확히는 발전을 ‘당했다’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지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문장으로 부연할 수 있다. “제물포 개항은 인천 지역 사회에 또 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외세의 진입과 이질적 문물의 유입에 따른 갈등에서도 그러하였지만, 그보다는 일본이 원인천을 한국 식민지 경영의 발판으로 삼은 데 있었다.”
    
    시절의 명암이야 어떻든, 당시 개항의 격랑을 살아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오랜 살아냄, 혹은 이겨냄의 흔적들이 지금껏 거리 곳곳에 남아 있다. [개항로 프로젝트]는 그 흔적들에 다시금 빛을 비추는, 그곳에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사람들을 밝히는 작업이다. [개항로 프로젝트]의 발단과 전개를 기획한 이들은 이창길(경영 컨설턴트)과 권순만(브랜드 디렉터). 두 사람은 ‘플레이스랩’이라는 법인을 공동 설립하여 개항로 로컬 브랜딩을 지속·지원하고 있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23년 초 [개항로 서체] 개발 사업도 시작되었다. 윤디자인그룹 TDC(Type Design Center) 디자이너들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타이포그래피 서울』은 이 [개항로 서체] 개발 과정을 초창기부터 최종 공개 시점(8월 예정)까지 순차적으로 소개하는 시리즈를 매달 한 회씩 연재한다. 개발 담당 디자이너들이 일종의 일기체로 기록하는 에세이 연작이다. 이들은 이번 작업을 ‘로컬 타이포 브랜딩’이라 명명했다. 단순히 주목도 높은 서체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글자 디자인으로써 도시 재생에 기여하는 사례를 기록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목적이다.

    인천의 개항 시기는 1883년으로 올해로 벌써 140년이 되었다. 개항로는 인천 서쪽 중구 경동 일대의 1㎞ 남짓한 짧은 거리지만, 오랜 역사만큼이나 이야기의 켜가 두텁다. 일찍이 개항로의 매력에 푹 빠져 있던 나는 주관적인 애정을 듬뿍 담아 [개항로 서체]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혼자 생각하고는 했다.

    생각이 커지니 결국 몸이 저절로 움직여졌다. 개항로의 이야기를 파헤치고, 개항로를 수시로 방문하고, 관계자를 무작정 만나보고, 진심을 담아 기획서를 작성하고, 개항로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린 결과⋯ 2022년 겨울 드디어 [개항로 서체] 계약을 정식 체결했다. 서체는 오는 여름 폰트 마켓 폰코(FONCO)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보통은 현재 개발 중인 서체의 대외 노출을 하지 않는다. 최종 완성까지는 짧게는 수 개월, 길게는 수 년이 소요되는데, 이 기간 중에 서체는 숱한 수정 작업을 거친다. 중간 단계의 형태와 최종 형태가 큰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적잖다. 그래서 한 벌을 모두 완성하여 시장에, 그리고 세상에 모습을 보이기 전까지 웬만해서는 개발 과정을 노출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개항로 서체]는 그 시작부터 완료까지의 모든 여정을 가능한 한 세세히 기록해두려 한다.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 프로젝트의 개요는 ‘서체를 만들다’가 아니라, ‘서체로써 ⋯을(를) 만들다’가 되어야 한다. 글자를 짓고 디자인하는 일이 어떻게 도시 재생과 로컬 브랜딩에 기여하고 기능하는지, 디자이너들이 만든 글자가 어떻게 도시를 재생시키고 브랜딩하는지, 이러한 맥락을 따라가는 여정이 이번 [개항로 서체] 프로젝트의 과정이 될 것이다.

    현재 서체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이들, 이 직업을 준비 중인 이들, 평소에 서체와 서체 디자인을 관심 있게 지켜본 이들 모두에게 [개항로 서체] 프로젝트 진행 과정, 아니 여정은 이른바 ‘로컬 타이포 브랜딩’의 한 사례로서 흥미로운 읽을거리·볼거리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매달 1회, [개항로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를 차례로 기록·연재하려 한다. 마치 즐거운 여행기를 쓰듯.

    [개항로 서체]의 본체가 되는 개항로 맥주 로고

    배짱 두둑한 세 글자, ‘개항로’에 반하다

    윤디자인그룹 서체 디자이너들이 모인 부서인 TDC에서는 내부 스터디 모임을 정기적으로 운영한다. 단지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디자이너로서의 자기 생각(만들고 싶은 서체, 표현해보려는 스타일, 트렌드에 대한 입장 등등)을 함께 나누는 소통 모임이기도 하다. [개항로 서체]를 만들어보자, 라는 결의(?)가 처음 다져진 현장도 바로 이 스터디 모임이었다.

    우리가 같은 일을 하는 서체 디자이너라고는 해도, 글자에 관한 각각의 관심이나 취향은 다르다. 그 방향성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좀더 세부적으로 글자를 공부해보자는 목적으로 스터디 모임을 결성한 것이고, 공부의 갈래에 따라서 타이포그래피 리뷰 스터디, 라틴 알파벳 스터디, 게임서체 스터디 등으로 그룹을 삼분했다.

    나는 서체 트렌드에 관심이 많아 타이포그래피 리뷰 스터디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모임 첫날, 앞으로 이 스터디를 어떻게 진행할지 각자 자유로운 의견을 내며 브레인스토밍을 했는데, 이때 평소 관심이 많았던 로컬 문화에 관한 이슈를 던져보았다. 각자 여행하듯 스스로가 정한 지역을 방문하여 글자를 수집하고 공유하는 자리로 운영해보면 어떨까, 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만약 이걸로 결정된다면 나는 인천 개항로를 가겠다고 했다. “인천 개항로요⋯?” 이름도 처음 들어본다는 팀원들에게 내가 왜 개항로에 가고 싶은지, 내가 알고 있는 개항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음, 써놓고 보니 [개항로 서체] 프로젝트의 시작은 TDC 스터디 모임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내가 개항로라는 지역에, 그리고 이 지역의 글씨에 처음 매료된 순간을 정확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바로 2022년 3월 22일 화요일. 잠깐 그날로 돌아가봐야겠다.

    나에겐 오래된 버릇이 있다. TV나 잡지, 인스타그램 피드에 등장하는 멋진 공간이나 맛집, 아이들(나는 두 아이의 엄마다)과 함께 갈 만한 박물관, 자연 경관이 뛰어난 장소들을 구글맵에 핀을 꽂아두는 것이다. 2022년 3월 22일 화요일 낮,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지인과 점심 식사를 한 후 어떤 카페를 가볼까 고민하며 여느 때처럼 구글맵 앱을 실행하여 나만의 ‘핀’들을 들여다봤다. 예전부터 가보고 싶던 ‘일광전구 라이트하우스’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곧장 그리로 자리를 옮겼다.

    일광전구 라이트하우스는 재생건축의 좋은 사례로 꼽힌다. 본래 이 건물은 40여 년간 산부인과로 운영되다 주요 상권과 사람들이 이동하며 지역이 쇠퇴화되자 10년동안 폐건물로 방치되어 있었다. 일광전구가 병원 본관과 뒤편의 원장 사택까지 사들여서 수천 개 백열전구를 달아 쇼룸 겸 카페로 탈바꿈했다. 카페로서는 최초로 2019년 국제 디자인 상인 ‘굿 디자인 어워드(Good Design Award, GDA)’를 수상했다.

    재생 건축물이 더이상 신선한 이슈가 아니라 하더라도 여전히 유효한 뉴트로(new-tro)라는 흐름 아래 ‘힙’한 곳으로 주목 받고 있음은 분명하다. 나 역시 오래된 건물이 품은 묵은 시간과 트렌디한 감각의 조화를 엿보는 일이 재밌어 재생 건축물, 더 나아가 도시 재생과 로컬 문화 전반으로까지 관심사가 넓어져 있던 상황이었다.

    카페 1층에서 커피와 디저트를 주문하려고 대기 중이었는데, 한편에 로컬 굿즈가 진열된 공간을 구경하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개항로 맥주’였다. 500㎖ 맥주병의 짙은 갈색 표면 전면에 아무 정보도 없이 그저 묵직하고 배짱 두둑해 보이는 세 글자 ‘개항로’. 내 눈에 이 형태는 굉장히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대체 이 로컬 맥주는 어디서 누가 만드는가, 이 글자는 누가 썼는가, ⋯. 뒷이야기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19세기 개항로와 현재 개항로, 두 시공간을 이은 ‘개항로 맥주’

    개항로가 위치한 동인천역 일대를 가끔 오는 편이라 이곳 역사를 아주 모르는 바도 아니었는데, 개항로에 대한 깊은 이야기는 알면 알수록 흥미로웠다. 개항(開港)은 말 그대로 항구를 연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개항은 외국과 국교를 맺고 외교 통상 관계를 갖는 일을 말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의 개항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게 된 사건을 일컫는다.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항(1876년)이 가장 먼저 개항되고, 이어 원산항(1880년), 인천항(1883년)이 개항하게 된다. 그렇기에 개항로의 현재를 말하기 위해서는 1883년 인천항(구 제물포항) 개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경인선(경인철도)이 놓이기 전, 제물포항은 수도 한성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곳을 통해 열강들이 앞다퉈 자기들의 문화를 들여왔다. 최초의 서구식 근대 공원인 자유공원과 르네상스식 석조 건물인 인천일본제1은행지점, 우리나라 첫 실내 극장인 애관극장, 국내 최초 서양식 숙박 시설 대불호텔 등 다양한 문화권의 근대 건축물들이 그 예다. 일본과 청나라의 상인 및 외교관뿐 아니라 서양의 선교사들까지 잇따라 조선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조선의 실질적인 개국이 인천항의 개항을 통해 이루어졌다.

    해방 이후에도 1980년대 초까지 개항로는 인천의 번화한 중심지로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인천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전하고, 2000년대 들어 주요 상권이 주안이나 부평 등지로 옮겨 가면서 개항로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십여 년 전부터는 송도와 청라 등 경제 자유 구역으로 대표되는 국제도시까지 들어서며 지역 불균형은 더욱 가속되었다. 결국 원도심(구도심)에서 인구가 빠른 속도로 떠나기 시작해 몇몇 노포만 개항로 일대에 남게 되었고, 이 지역은 활력을 잃어 갔다.

    하지만 이런 역사를 가진 개항로가 2018년부터 로컬 문화의 붐과 함께 크게 주목 받기 시작했다. 뉴트로 감성에 열광하는 MZ세대, 과거를 추억하는 중장년층이 개항로를 거점으로 서로 통하게 된 것이다. 개항로의 이러한 분위기는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개항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구체적 의지, 바로 [개항로 프로젝트]가 있었기 때문인데, 개항로 맥주 역시 이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것.

    개항로 프로젝트는 인천 중구의 구도심, 즉 동인천이라고 불리는 지역을 중심으로 기능이 중단된 건축물들을 업사이클링하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콘텐츠를 기획·운영·마케팅하는 도시 재생 및 로컬 브랜딩 프로젝트다. 인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창길 대표와 뜻을 함께하는 각 분야 전문가 10~20명이 모여 개항로의 기존 건물을 부수지 않고 활용해 개성 있고 트렌디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대표적인 공간은 1960년대 말부터 2002년까지 운영했던 오래된 병원을 통째로 리모델링한 카페 브라운핸즈와 일광전구 라이트하우스지만, 개항로를 널리 알린 일등공신은 바로 ‘개항로 맥주’였다.

    개항로 맥주는 신포동에 위치한 양조장인 인천맥주에서 약 7개월간의 기획과 연구를 거쳐 나온 결과물이다. 전 세대가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익숙한 진갈색 500㎖ 유리병에 담긴 라거(larger) 맥주인데, 디자인에 특히 신경을 썼다. 개항로만의 자원인 노포를 활용하여 인근에서 50년 넘게 목간판 작업을 이어 오신 전원공예사 전종원 사장님의 글씨를 전면에 배치하여 ‘개항로다움’과 개항로 맥주만의 담대함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 재밌는 것은 기존 맥주들이 젊고 아름다운 사람을 모델로 기용하는 반면, 개항로 맥주는 로컬 맥주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인천의 영화 간판 화가 최명선 어르신을 포스터 모델로 모셨다는 점이다.

    개항로 맥주 초기 디자인 시안 두 가지
    [개항로 프로젝트]는 이 두 시안을 공식 인스타그램에 게시해
    팔로워들에게 선호도를 물었는데, 오른쪽 시안이 압도적으로 높은 호응을 얻었다.
    출처: @gaehangro
    지역 어르신과의 협업이 돋보이는 개항로 맥주 포스터
    출처: @gaehangro

    나는 이 모든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개항로를 속속들이 파헤쳐보지 않고서는 못 배길 지경까지 되었다. 결국, 급히 연차를 내고 개항로를 답사해보기로, 그리고 전원공예사에 가서 전종원 사장님을 꼭 뵙기로 결정했다. 나의 이 갑작스러운 강행에 기꺼이 동조해준 TDC 동료 이가희 디자이너와 함께 인천행 지하철에 몸을 싣는데⋯⋯. (다음 연재에서 계속)

    윤디자인그룹 TDC(Type Design Center) 소속 서체 디자이너. 2000년대부터 글자를 짓기 시작했으며 서울시 전용서체 [서울남산체]·[서울한강체] 개발 참여를 시작으로 [어반빈티지], [YTN 뉴스 자막 서체], [KoddiUD 온고딕] 등 다양한 서체를 만들었다. 2023년 [개항로 서체]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로컬 타이포 브랜딩’의 효용성과 그 가치를 알리고 있다. @booooktype

    Popular Series

    인기 시리즈

    New Series

    최신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