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주거 전시에서 건축가 한 분이 “건축은 특수해를 제공한다.”라는 말을 한 것이 기억 났다. 건축의 비용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건축가에게 집을 맡기면 일반적인 집을 짓기보다 비싸다. 특수해란 일반해와 달리 정량화하고 수치화하기 힘든 문제 해결 방식이다. 가격이 비싼 이유도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모양이나 규칙적인 형태가 아니라 건축가에 의해 매번 다른 형태의 집이 나오기 때문이다. 즉, 특수해는 한번 사용하고 나면 다시 사용할 수 없는 해결법이다. 잠시 주변을 돌아보면, 세상에는 일반해만큼 특수해로 만들어진 결과물이 많다. 예술작품이나 공예품도 그러하며, 무엇보다 사람은 모두 저마다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다. 보편적으로 이론이나 공식은 일반해를 구하지만, 예술이나 창작활동은 특수해를 구한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건축가에 가깝다. 디자이너의 작업물은 한번 쓰고 나면 다시 사용하기 힘들다. 물론 재활용하듯 지나버린 로고나 디자인을 다시 다른 용도에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은 디자이너는 일정한 돈을 받고 자신의 해결법을 판다. 이런 거래에 익숙하게 몇 년을 지내다 보면 디자이너는 얼마나 빨리 고객이 원하는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지 속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경쟁 구도에서는 창의적이나 예술적으로 불리는 이런 특수한 해결 방법이 그냥 돈의 가치로 평가절하되는 씁쓸한 기분도 맛보게 된다.
한편으론 이런 특수한 상황 때문에 디자이너는 매번 다른 시도와 결과를 내야 하는 재미를 얻을 수 있다. 이번에는 어떤 종이를 사용할까? 어떤 서체를 사용하지? 어떤 맛을 내볼까? 매번 다른 변화와 조건에서 콘셉트를 구하고 표현 과정을 새롭게 개발하다 보면 처음의 제약 조건이 재미있는 변화의 조건으로 바뀌게 된다. 특수해를 가지고 일하는 직업 중에 디자이너만큼 매번 다른 답과 풀이를 요구하는 직업도 드물다. 얼마 전 다시 읽은 『영혼을 잃지 않는 디자이너 되기』라는 책을 보며 이런 생각이 더 명확해졌다. 자칫 영혼이라는 말이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거창한 정신이나 디자이너만의 순결주의를 벗어버리면, 영혼은 곧 특수해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깐 10년이 지난 이 책의 제목이 지금에서는 ‘매번 다른 결과를 내는 디자이너 되기’로 보인다. 특수해를 가지고 결과를 만드는 디자이너에게 영혼은 자연스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실험과 노력으로 볼 수밖에 없다.
10년이 지난 후 이 책을 다시 읽은 이유는 지은이 아드리안 쇼네시의 경험담에서 우러나온 글쓰기의 능력도 한몫 했지만, 제목에서 느껴지는 영혼이라는 단어가 예전과 다르게 읽혔기 때문이다. 10년 전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영혼을 잃지 않기는 디자이너만의 정신이나 태도처럼 어떤 기예나 품위를 잃지 않기로 보였으나, 이제는 오히려 자연스레 실험하는 디자이너로 보였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언제부턴가 똑같은 결과와 비슷한 작업 과정으로 게을러진 디자이너에게 실험은 매번 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 면에서 책에서 몇몇 기억나는 문장이 있다.
이 책 중 「현대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자질」이라는 챕터에서 나오는 문장이다. 실제로 일을 하다 보면 전화로 클라이언트에게 작업의 의도나 콘셉트를 말로 설명할 때가 온다. 아나운서처럼 매끄럽게 얘기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디자이너는 자신의 작업 키워드는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는 비언어적인 분야지만, 딱 그만큼은 말로(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작업 외에 스튜디오를 운영하다 보면 문서나 견적서를 작성하면서 수없이 적절한 단어, 문장과 싸워야 한다. 디자이너가 선택한 단어가 작업뿐만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생각의 방향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위 이미지 속 「스튜디오 운영하기」 챕터에 나오는 글을 읽어보면, 언젠가 디자인을 한 디자이너 이름이 크레딧에 ‘디자인 바이~’라는 문구로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하지만 크레딧에 디자이너의 이름은 책임감보다는 자신감에 가깝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이름으로 작업을 하고 그것을 알릴 수 있을 때 힘을 얻는다. 작은 차이일 수 있지만, 가끔 지역 신문이나 뉴스에서 로고나 포스터를 공개하면서 그것을 만든 디자이너의 이름은 없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의도적으로 이름만 알리는 홍보 수단으로 전락하면 안 되겠지만, 이 일을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창작품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창의적인 프로세스」라는 챕터에 나오는 위 문장을 보면, 한동안 디자인을 일방적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정답을 내놓는 과학적인 프로세스로 이해하는 현상이 보인다. 이에 더불어, 과학적으로 설문 조사를 하고 왜 이런 형태가 나왔는지, 인지·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경향도 있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문제만 해결해서는 디자이너의 활동을 설명하기 부족하다. ‘창의적이다’라는 말에는, 글의 초반에서 설명한 특수해처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표현이 존재한다. 문제 해결은 당연하고, 그것 이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 디자이너의 활동 범위와 역할을 넓혀준다.
위는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다. 아마 가장 별 볼 일 없는 디자인은 지난번에 한 디자인이 아닐까. 매번 다르게 디자인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직접 디자인을 하다 보면 피부로 와 닿게 된다. 한두 번은 그냥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 이상 쌓이다 보면 다르게 디자인을 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공포는 누구나 두려운 것이지만 실험을 게을리 하다 보면 두려움이 익숙함으로 바뀌어 버린다. 지은이 아드리안 쇼네시(Adrian Shaughnessy)는 공포를 먼저 경험한 입장에서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노하우를 알려준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디자인 이론이나 에세이는 아니다.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리고 프리랜서가 되는 방법 등 선배 디자이너의 경험담을 적어 놓은 실용서에 가깝다. 책의 중간 중간에 나오는 인터뷰도 현실적으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질문과 경험을 끄집어낸다. 제목의 무게에 비해 내용은 훨씬 구체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책의 제목이 가지는 매력을 간단히 넘길 수 없다. 영혼을 잃지 않는 것은 어떤 뜻일까? 디자이너에게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누구에게는 실험이나 변화가 아닌 순수한 디자이너의 정신이 될 수도 있다. 영혼이라는 말이 가지는 무게만큼 디자이너가 되는 것은 그리 가벼운 과정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언제부턴가 비슷한 결과물이 놓여있는 주변을 돌아보며, 나에게 영혼은 어떤 것이지 한 번쯤 물어볼 수 있는 시간을 준다면 이 책을 다시 읽은 보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도서 정보
영혼을 잃지 않는 디자이너 되기
(원제: How To Be a Graphic Designer Without Losing Your Soul)
저자: 아드리안 쇼네시
역자: 김형진, 유진민
출판사: 세미콜론
출간일: 2007년 2월 1일
가격: 15,000원
강구룡 그래픽 디자이너, 디자인 저술가, 공저로 『위트 그리고 디자인』, 『디자인 확성기』가 있으며 버라이어티 디자인 토크쇼 〈더티&강쇼〉를 진행하며 디자인과 사회, 문화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