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서랍에 어떤 물건이 몇 개 있나요?”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받으면 “연필이 2개, 쓰다 남은 건전지 3개, 음…. 지우개는 1개? 음….” 이런 식으로 점점 기억이 가물가물 해지지 않을까. 역시 구체적인 개수를 물으면 자신이 없어진다. 사람의 기억은 생각만큼 구체적이지 않다. “어제 본 영화 어땠어?”라고 물으면 “굉장해! 진짜 재미있어!”라고 얘기하기 쉽지만, “어떤 장면이 재미있었어?”라고 구체적으로 물으면 “음….” 또다시 고민한다. 누구나 구체적인 기억에 자신감이 뚝뚝 떨어진다.
싫어하는 사람 중에 “정말로?”라고 종종 되묻는 사람이 있는데, 예를 들어 “미국은 평등한 나라야.”라고 대충 그럴듯한 대답을 하면, “정말로?”라고 물어오는 식이다. 여기서 정말로는 ‘정말 그럴까?’, ‘그렇지 않아’라는 말이 깔렸다. 이런 말 공격의 최고봉은 ‘왜?’이다. 아무리 정확하게 이야기해도 “왜?”라는 질문에 누구든 순식간에 무너진다.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1+1=2야”라고 설명하면 “왜?”라는 질문이 여지없이 나온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이 가장 무섭다.
다소 엉뚱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기억, 진리도 ‘얼마나, 정말로, 왜….’ 등의 수식어로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큼 아는 것인지…. 대부분 이런 공격을 받고 나면 뜬구름이 되어버린다. 이런 이유는 구체적인 예가 없어서가 아닐까. 무언가 구체적으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적용된 예나 세세한 장면이 있어야 한다.
디자이너에게 폰트도 그런 공격을 받기 쉬운 대상이다. 뛰어난 디자이너가 아닌 이상, 일반인이나 그렇고 그런(?) 나 같은 디자이너에게 폰트는 아직도 어려운, 그러니깐 구체적으로 알기 힘든 대상이다. 아직도 ‘어떤 서체를 쓸까?’를 놓고 작업 의뢰가 들어오면 끙끙대기 일쑤고, ‘왜 이 글자를 선택했어?’라는 질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마치 소설가에게 ‘왜 3인칭이 아닌 1인칭으로 글을 썼나요?’ 만큼 난감하고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진지하게 대답해야 할 경우가 있다. 동료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폰트를 모르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게 될 때이다. 사실 우리가 말하는 폰트는 대부분 디지털 폰트이다. 이미 컴퓨터에 저장된 수천 가지의 서체 중 하나를 골라 쓰는 것. 나무에 조각하거나 그려보며 몸으로 경험하지 않는 이상 폰트 대부분은 이미 몇 가지 정도 주로 쓰는 정도로 제한되어있다.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글자를 구분할 수 있고, 이름을 알고 있을까?
타입 디자이너인 고바야시 아키라가 쓴 『폰트의 비밀』은 다행히도 일반인이나 조예가 깊지 않은 디자이너에게 폰트의 매력을 쉽게 느낄 수 있게 쓴 책이다. 책은 총 4장으로 브랜드 로고에 감춰진 글자의 매력을 알려주는 1장, 유럽 거리에서 볼 수 있는 폰트를 소개한 2장, 폰트 선택 과정을 보여준 3장, 글자에 숨겨진 기호와 부호에 대한 마지막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샤넬이나 루이비통 등 브랜드 제품에서부터 런던의 지하철, 파리의 거리를 오가며 찍은 사진까지 실제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글자의 모습을 자신의 폰트 제작 경험과 함께 보여주기 때문이다.
루이비통을 언급한 부분을 보자. 명동 롯데면세점에서 길게 줄 서며 구경해본 것이 루이비통과 인연이 전부인 필자에게 루이비통의 로고 타입은 어딘가 이상하게 글자 사이의 간격이 넓어 우아하면서도 다가가기 힘든 명품의 느낌이 든다. 컴퓨터에 포함된 푸투라(Futura) 서체를 이용해(루이비통의 로고는 푸투라로 만들어졌다.) 만들어보니 실제 루이비통 로고의 품격이 잘 나타나지 않았다. 책에서 보여준 대로 글자의 간격을 실제 로고에 맞추어 넓혀주면 이내 다른 느낌으로 바뀐다. 이를 두고 저자는 “마치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얘기하는 어른의 음색처럼 권위가 있습니다. 글자의 간격에 무언가 비밀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책을 디자인할 때 자간을 -25, -50(실제 컴퓨터 디자인 프로그램에 나오는 자간의 디폴트 값이다.)으로 습관적으로 사용한 디자이너에게 고바야시 아키라의 이런 접근은 명품 로고에 숨겨진 매력을 몸으로 체득하듯 이해하기 쉽게 한다.
마이클 잭슨의 앨범에 소개된 트레이전 폰트(Trajan Font)도 흥미롭다. 앞의 푸투라가 1927년에 만들어진 현대적인 서체라면 의 타이틀로 쓰인 트레이전의 원형은 2000년 전을 거슬러 고대 로마 건축의 비문에서 출발한다. 황제의 공적을 기록한 비문은 권위자의 당당함을 표현하기 위해 대문자 간격을 넓혔고, ‘N’과 ‘O’처럼 폭이 큰 글자는 더 넓히고 ‘S’와 ‘E’처럼 좁은 폭의 글자는 더 좁혔다. 저자는 이를 “폭이 큰 글자는 더욱 넓히고, 좁게 들어간 글자는 더욱 좁혀야 품격이 살아납니다.”라고 말하며 고대 로마의 비문에서 찾은 원리를 보여준다. 아마 ‘THIS IS IT’ 타이틀을 디자인한 디자이너도 마이클 잭슨이 팝의 황제라는 것을 다시 증명하듯 트레이전을 선택하고 사용한 것이 아닐까.
어떤 폰트를 선택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3장에서는 볼드와 라이트, 이탤릭처럼 대부분 디자이너가 쓰는 서체 용어를 실제 사례와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다. 폰트를 쓸 때 굵고 가는 정도로 볼드와 라이트라는 말을 쓰는데, 요즘 일상에서는 어떤 경향으로 쓰고 있을까? 책에 나오는 독일 거리의 휴지통에서 헬베티카(Helvetica)로 쓴 Glas와 Papier의 글자는 과거에 비해 가늘어졌다. 예전 휴지통에 쓰인 굵은 글씨는 크고 굵게 소리치며 시선을 끌었다면, 요즘 공공장소에 사용된 폰트는 잡음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느낌의 가늘어진 글자가 많아지는 추세다. 폰트의 굵기도 사용되는 장소와 경향에 따라 그 쓰임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폰트에 대해 숨겨진 사실을 가장 잘 알게 된 것은 마지막 4장이다. 알파벳 A의 오른쪽 선이 굵은 이유를 설명한 대목에서 A의 오른쪽 대각선이 왼쪽에 비해 굵어진 점을 과거 붓으로 글을 쓰면서 자연스레 오른쪽이 굵어진 과정을 보여준다. 차이가 심한 세리프 서체뿐만 아니라, 같은 굵기로 만들어졌을 것 같은 산세리프 서체의 A를 좌우로 뒤집으면 오른쪽 대각선이 더 굵다. 저자가 말하듯 같은 굵기로 A가 되어있다면, 사람이 걸을 때 오른팔과 오른쪽 다리를 같이 내미는 모습처럼 엉성해 보인다. 이는 시선의 흐름도 영향을 주지만, 폰트 제작이 디지털 환경에서 더 많이 만들어지는 최근에 와서도 과거의 영향이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키보드로 입력하는 A에도 로마 시대 비문 돌에 새기고, 붓으로 쓴 전통이 자연스레 계승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고바야시 아키라는 로마 알파벳을 연구하고 서체를 만들지만, 역설적이게도 일본인이다. 당시 일본에서 로마자 서체 디자인은 동양인이 만들기 힘든 미지의 영역이었다. 다소 늦은 29세의 나이에 유학을 떠나 혼자 독학으로 글자의 역사와 형태를 공부했다. 아마 이런 영향 때문인지 그가 쓴 『폰트의 비밀』은 다분히 원론적인 이론과 추상적인 개념으로 접근하기 힘든 ‘폰트의 비밀’을 흥미로운 경험과 예시로 독자를 인도한다. 방대한 주제를 짧은 예시와 이야기로 마무리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 책은 폰트에 대한 궁금증이 많은 대중에게도 쉽게 읽어볼 수 있는 폰트 입문서이다. 만약 루이비통 매장에서 줄을 서게 될 경우 가만히 기다리지만 말고, 왜 저 글자는 간격이 넓은지 살펴보자. 『폰트의 비밀』은 실제 거리에 이미 그 힌트를 알려주고 있는지 모른다.
책 정보
폰트의 비밀
저자: 고바야시 아키라
역자: 이후린
출판사: 예경
출간일: 2013.08.20.
가격: 18,000원
강구룡
그래픽 디자이너, 디자인 저술가, 공저로 『위트 그리고 디자인』, 『디자인 확성기』가 있으며 버라이어티 디자인 토크쇼 〈더티&강쇼〉를 진행하며 디자인과 사회, 문화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