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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구룡의 디자인 책 읽기] 디자이너, 세상을 읽고 문화를 움직인다

    위키피디아에서는 문화를 ‘주어진 자연환경을 변화시키고 본능을 적절히 조절하여 만들어낸 생활양식과 그에 따른 산물’이라고 한다. 그 말처럼 인간은 양식에 따라 자신의 문화를 만들어 낸다.


    글. 강구룡

    발행일. 2014년 10월 16일

    [강구룡의 디자인 책 읽기] 디자이너, 세상을 읽고 문화를 움직인다

    최근에 근사한 차 한 잔을 마셨다. 중국에서 마시는 홍차였는데, 마치 말의 눈썹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에 가는 잎이 인상적이었다. 아쉽게도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차를 한 잔 마시니 커피를 마실 때와 달리 몸과 마음이 가다듬어졌다. 차를 우려내고 다시 따르고 또 우려내며 몇 번을 반복하여 마시니 차의 맛이 더해졌다. 차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찻잔을 잡고 입안에 한 모금 넣으며 그 과정을 조용히 살피니 작은 찻잔에도 나름의 마시는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 차 한 잔에 숨겨진 문화를 마시듯 우리 주변은 모두 작은 문화로 이루어져 조용히 자기만의 멋을 숨기고 있는 듯 보였다.

    ‘짐플리치시무스(Simplicissimus) 포스터’, 토마스 테오도르 하이네, 1986년 토마스를 비롯한 독일 작가와 미술가들이 창간한 『짐플리치시무스』는 당시 독일의 물질주의와 현대화에 반대하며 민중 지향적 경향을 띤 잡지였다. 독일 귀족의 모습을 풍자하며 나타난 붉은 불독은 귀족의 발에 오줌을 싸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이 포스터에서만큼은 끊어진 쇠사슬과 강렬한 붉은색에서 당시 타락한 정치와 귀족을 향해 경고를 던진다. 깔끔한 선과 목판화로 인쇄된 그래픽 이미지는 사진보다 더 강렬히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한 장의 포스터를 주변에 놓인 사회적, 문화적 환경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면 아름다운 조형적 형태로만 이야기할 수 없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출처 바로가기   

    위키피디아에서는 문화를 ‘주어진 자연환경을 변화시키고 본능을 적절히 조절하여 만들어낸 생활양식과 그에 따른 산물’이라고 한다. 그 말처럼 인간은 양식에 따라 자신의 문화를 만들어 낸다. 그냥 옆의 돌로 찧어서 음식을 자르고 먹는 데 쓰면 그만이지만, 젓가락과 숟가락이 나오자 먹는 방식도 세련돼지고 다양해졌다. 문화란 어쩌면 살아가는 방식을 쪼개고 나누어 자세히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망원경이지 않을까. 확대해서 보다가 축소해서 보면서 마이크로와 매크로의 시점을 오가듯, 삶의 방식을 나누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새롭게 만들어주는 사물처럼 보인다.

    디자인에도 물론 문화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스타일과 양식으로 보이지만 사실 미술사의 어느 한 부분처럼 “무슨 무슨 양식이야!” 하듯 20세기는 어떻고, 21세기는 어떻다며 사조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몇 단어로 어느 시대를 이런 양식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단조롭다. 사실 우리가 바라보는 문화와 정의된 문화는 차이가 크다. 디자인에서 문화는 다르게 보면 ‘시각 문화’이다. 어떤 형태가 어떤 시대와 만났는지 관계를 살펴보며 왜 그런 형태가 나왔는지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문화를 특정 형태와 함께 글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디자인에서 문화는 어떤 것일까? 문화를 인간의 환경을 담는 그릇으로 비유하자면 디자인은 좀 유별난 그릇이다. 미국의 디자이너 캐서린 맥코이는 “형식은 내용의 적이 아니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일 뿐 아니라 내용 자체가 될 수도 있다.”라고 했다. 우리는 디자인을 어떤 스타일과 양식으로 쉽게 말하며, ‘아방가르드 스타일! 포스트모던 스타일!’이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스타일 이면에는 형식뿐 아니라 내용과 섞여 있는 시각 문화가 있다. 쉽게 나누기 위해 내용과 형식을 무리하게 합치거나 한마디 용어로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문화는 명확한 것이 아니다. “관념, 가치, 판단과 같은 문화적 구조는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해체되고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또한 해독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문화는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손상되고 파괴되며 섞여질 수 있다. 디자인에서 작업 이면에 숨겨진 문화를 읽고 확장해서 보려는 움직임은 모더니즘이 힘을 잃기 시작한 20세기 중반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시작됐다. 이후에 시작된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문화는 더 복잡해지고 다양해졌다. 사람은 누구나 복잡해지면 정리하고 싶어지고, 의미를 읽고 싶어한다. 디자인을 단지 문제 해결로 본 모더니스트의 생각에서 벗어나 형식을 의미와 함께 찾고 만들어가는 단계로 넘어오면서 디자이너는 문화를 읽어 내려가며 조금씩 똑똑해졌다.

    다소 오래된 책이지만 2001년에 출간한 『디자이너, 세상을 읽고 문화를 움직인다』(원제 Design Literacy: Understanding Graphic Design, 1997년)는 그래픽 디자인을 어떻게 읽어 나갈 수 있는지 사례 중심으로 글을 모은 책이다. 원제에서 보듯 이 책은 어떻게 그래픽 디자인을 이해할 수 있는지, 읽는다는 관점에서 본 책이다. 단 읽는 대상을 디자인 작업 안에만 한정 짓지 않고, 사례를 중심으로 당대의 문화와 사회의 맥락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사례 중심으로 이루어져 내용이 단편화될 수 있는 한계에도, 이 책이 가지는 장점은 디자인을 조형적 의미에서 벗어나 사회적, 정치적 의미로 확장하려는 지은이의 의도에 있다. 근래에 오면서 디자인 비평이라는 학과가 생기고 연구하는 움직임도 이 책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책은 설득, 미디어, 언어, 아이덴티티, 정보, 아이코노그래피, 스타일, 비즈니스까지 총 8가지로 분류되어 있으며 각 챕터에는 포스터와 성냥갑, 잡지부터 작자 미상의 제품들까지 다양한 사례를 보여준다.

    최근 작고한 마시모 비넬리의 『뉴욕 지하철 지도』의 사례를 보면, 당시 뉴욕 교통국과 비넬리의 마찰부터 어떻게 일을 따냈는지, 그리고 왜 호수와 공원을 파란색과 녹색이 아닌 회색으로 표현했는지 세세히 언급되어 있다. 중요한 대목은 당시 뉴욕 지하철 지도에 도입한 기호학적 그리드의 도입이다. 비넬리는 “우리는 기호학적인 그리드에 따라 모든 것을 분석했다. 이것은 알파벳의 ABC처럼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라는 말처럼 비넬리는 당시 뒤죽박죽이었던 뉴욕의 지하철 시스템을 개별 단위로서 디자인된 사인의 모듈러 시스템을 고안했다. 마치 지하철에 사용되는 문자부터 그래픽까지 모든 요소를 하나의 단위부터 확장할 수 있게 수학적으로 분류하여 ABC처럼 정보 문자를 만든 것이다. 이런 규칙에 따라 호수와 공원도 회색의 그리드 공간에 놓이게 되었으며, 모든 노선도는 직선과 대각선으로 표시되었다. 지금은 이런 식의 정보 디자인이 흔해졌지만, 1972년에 만들어진 비네리의 지하철 지도는 거부감이 커서 1979년에 당시 프로젝트 관리자가 교체되면서 바뀌고 말았다.

    1939년의 뉴욕 지하철 지도와 1972년 마시모 비넬리가 디자인한 뉴욕 지하철 지도. 실제 지형에 맞추어 만들어진 1939년의 지도를 비넬리는 “정보 과잉”이라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1972년에 디자인된 그의 지도에는 크게 2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모든 라인은 다른 색을 가져야 하며, 모든 것은 점에서 멈추어야 한다.”였다. 그리고 이 원칙은 다른 요소로 인해 끊어지거나 분할되어서는 안 되었다. 오로지 정보를 최우선으로 불필요한 요소는 제거된 그의 지도는 모더니즘 디자인의 상징이 되었다. 이런 전후 맥락 속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읽어나가 보면 지도 한 장이 당시 사회에 끼친 영향과 의미를 지도 밖으로까지 확장해서 읽어나갈 수 있다. 출처 바로가기

    잡지 『에미그레』를 언급한 사례도 인상적이다. 1984년에 창간된 에미그레는 네덜란드인 루디 반데란스와 체코슬로바키아 태생인 주잔나 리코가 만든 대안적 문화 잡지였다. 엄밀히 말하면 에미그레는 모더니즘의 망령에 빠진 그래픽 디자인계에 디지털 타이포그래피와 포스트 모더니즘 문화를 몸에 걸고 나타난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이었다. 대게 기성세대의 문화가 새로운 세대에 도전을 받으면 두려움을 떨듯, 에미그레는 모든 문제를 하나의 규칙으로 해결할 것 같은 모더니즘에 개인의 개성과 다양함으로 무장한 개성 넘치는 내용과 스타일로 맞섰다. 에미그레를 단지 잡지의 측면으로 보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당시 미국 디자인계에 불어닥친 진보적인 시각 문화의 움직임으로 본다면, 스타일의 변화로만 치부할 수 없는 문화 현상이었다. MTV를 비롯한 새로운 세대의 문화를 대변한 에미그레는 실험적 서체와 논란에 중심이 된 에세이로 당시 기성세대의 문화를 공격했다.

    에미그레 창간호, 1984년에 최초로 발행된 에미그레는 2005년까지 69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처음 창간 당시 등장한 매킨토시 컴퓨터의 영향으로 사진과 텍스트의 조작이 수월해졌고 이는 자연스레 새로운 형식의 잡지를 태동하게 했다. 에미그레 폰트라 불리는 서체와 타이포그래피는 손으로 그린 글자에서 디지털 비트맵 서체의 개발로 이어지며 형태와 내용 면에서 기존 모더니즘의 문화에 자리잡힌 일관된 규칙을 허물고 자유와 실험을 표방한 스타일로 디자인과 문화를 대변했다. 철저한 모더니스트인 마시모 비넬리는 에미그레를 보고 ‘쓰레기 창고’라고 평가 절하했지만 그가 죽은 지금까지 그 영향은 이어지고 있다.출처 바로가기

    이처럼 디자인 작업을 당시의 주변 환경과 문화의 맥락에서 읽어내려 하다 보면 조금씩 디자인을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확장해서 읽어나갈 수 있다. 물론 짧은 예제가 아쉽지만, 당시 이 책이 시도한 읽기라는 방식은 ‘디자인 들여다보기(Looking Closer) 시리즈’를 비롯한 디자인 읽기 현상으로 함께 전파되었다. 작자 미상의 디자인을 언급한 대목에서도 이 책은 숨겨진 디자이너와 작업을 소개하며 우리가 소비하고 끝내는 디자인을 문화로 읽어 내려고 시도한다.

    다시 차로 넘어가 보자. 디자인에서 문화는 매력적인 찻잔이다. 담는 내용에 따라 모양이 수시로 변하니 말이다. 하지만 왜 그런 모양의 찻잔에 놓였는지는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조용히 차를 한 잔 따르면서 그릇에 비친 이미지가 무엇인지 곰곰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문화를 읽는다는 것이 차를 깊이 마시고 혀끝으로 느끼며 마음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라면, 복잡한 단계의 흡수과정을 거쳐야 한다. 한번 보고 멋지다! 로 끝날 수 없다. 문화를 읽는 틀로써 또는 문화 자체로 디자인은 과거에 비해 적극적으로 현상을 파악하고 침투하는 방법으로 바뀌고 있다. 생각하는 방식이며,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디자인하는 말처럼 이제는 그 의미를 다층적으로 사용한다.

    차를 한잔 대접받고 요즘 커피 대신 차를 마시려고 몇 개를 샀다. 확실히 차는 몇 잔을 마셔도 또 마실 수 있다. 질리거나 속이 쓰리거나 그런 부작용이 없이 슬며시 몸 안에 녹아든다. 그냥 홀짝 마시기보다는 우려내고 따르고 하는 과정에서 묘한 매력이 있다. 이런 모든 과정이 녹아있지 않는다면 그냥 차는 맹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맛이 깊이 물에 스며 나오듯, 그렇게 문화는 살며시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지 모른다. 디자인이 문화라는 말은 누구나 동의하지만, 그 과정은 자연스레 읽히지 않은 것 같다. 2001년에 나온 이 책을 책장에서 몇 번 꺼내 읽을 때마다, 짧게 이뤄진 사례를 다시 볼 때마다, 이런 사례를 최근에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 국내의 디자인에도 비교하여 찾아보고 싶어진다. 마치 오래된 차를 한 잔 우려 마시듯, 우리에게 디자인은 이미 문화의 멋으로 슬며시 녹아내려 가고 있는지 모른다.

    책 정보(좌 국내판, 우 원서)

    디자이너, 세상을 읽고 문화를 움직인다

    저자: 스티븐 헬러, 카렌 포메로이
    역자: 강현주
    출판사: 안그라픽스
    출간일: 2001.03.
    가격: 15,000원
    Design Literacy: Understanding Graphic Design
    저자: Steven Heller, Rick Poynor 출
    판사: Allworth Press
    출간일: 1997.

    강구룡
    그래픽 디자이너, 디자인 저술가, 공저로 『위트 그리고 디자인』, 『디자인 확성기』가 있으며 버라이어티 디자인 토크쇼 〈더티&강쇼〉를 진행하며 디자인과 사회, 문화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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