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냉장고를 무턱대고 열어 무엇을 먹을지 고민만 하고 다시 닫곤 한다. 무엇을 만들어 먹어야지! 의욕이 앞서다가도 무작정 냉장고를 열고 나면 좌절하고 마는 것. 무엇을 만들어 먹을까? 라는 의욕은 느낌표에서 물음표로 불과 몇 초면 바뀐다. 냉장고를 열었을 때 냉장고의 센서가 나의 머리를 인식하고 “주인님께 추천할 음식은 고등어찜입니다. 재료는 고등어와 생강, 양파….” 이런 식으로 줄줄 외워준다면 좋겠지만, 차가운 냉기만 머리를 지끈 누른다. 진짜 무엇을 먹어야 하나? 배는 고픈데. 이럴 때 왠지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반대로 맥도날드에 가면 가볍게 미소를 띤 점원의 뒤로 새로 나온 추천메뉴와 다양한 햄버거가 메뉴판 위에서 깔끔하게 맛을 뽐내고 있다. 집안의 냉장고가 마치 쏟아버린 레고 블록이라면, 맥도날드의 메뉴판은 크기와 색깔별로 분류된 레고 블록 정도로 비교할 수 있겠다.
사람은 저마다 분류하고 나누면서 정리하는 습성이 있다. 물론 습관적으로 책상을 어지럽히는 사람도 있지만, 어지러운 것을 보면 본능에 따라 무언가를 나누고 다시 연결한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머릿속엔 여러 가지 소재가 담긴 폴더가 책상 서랍처럼 들어있다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만약 사람의 머리가 컴퓨터 바탕화면처럼 만들어져 있으면, 불필요한 생각은 쓰레기통에 비우고 최근 파일이나 중요파일은 따로 폴더를 구분해 저장할 수 있어 정말 편할 것 같다. “음…. 오늘은 그림 폴더 안의 음식 폴더에 있는 스파게티 폴더를 열어서 저녁 메뉴를 선택해야겠어.”라고 생각하면 쉽지만, 무턱대고 외친 스파게티는 스파게티? 라고 다시 물음표로 바뀌고 미궁으로 빠진다. 사실 우리는 매우 많은 음식을 먹었고, 이름과 종류를 알지만 정작 머릿속을 파헤쳐보면 늘 먹던 음식이나 해오던 방식으로 요리하고 있다.
BBC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된 『브레인 스토리』라는 책의 한 서평에서는 “뇌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신경결합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정한 필요에 부합하는 물리적 구조를 생성, 발전시킨다.”는 언급이 있다. 즉 사람은 무엇을 직접 해보거나 만들어보면서 머릿속에 정보와 지식을 새로운 관계로 저장할 수 있는데, 우리가 한 번쯤 들어본 뉴런(neuron)은 이런 관계가 형성된 신경계의 주된 세포이다. 아마 냉장고를 열고 차갑게 굳어진 필자의 머리에는 음식 레시피나 요리에 대한 방식이 몇 가지 뉴런으로만 듬성듬성 연결되어 있는지 모른다.
정보를 다양하고 촘촘하게 만드는 것이 학습과 경험의 몫이라면 그것을 잘 분류해서 꺼내기 쉽게 만드는 것은 습관의 몫이 아닐까 한다. 어떤 습관으로 정보를 분류하고 나누어서 내가 원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까? 이런 질문을 디자이너에게 해본다면, 모든 디자이너에게는 자기만의 시각화 레시피(visual recipes)가 있다. 원래 시각화 레시피는 요리 과정을 그림으로 알기 쉽게 보여주는 것이지만 디자이너에게 적용되면 이미지를 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거나 글자를 활용하여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즉 자신만의 방법으로 조합하고 해체하여 새로운 형태를 콘셉트에 맞게 한다. 이때 필요한 습관이 정리이다. 어떻게 이미지를 조합하고 형태를 만드느냐는 어떻게 분류해서 어떤 시점과 기준으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정리는 매우 유용한 습관이다. 정리하는 습관을 단지 물리적으로 책상 청소나 서랍 정리로 보지 말고, 정보를 분류하고 나누어보는 ‘정보 정리’와 생각이나 관점을 바꾸어 보는 ‘사고 정리’로 발전시켜보면 정리는 책상 앞만 치우는 정도로 단순한 일이 아니다. 목적과 콘셉트에 맞게 정보와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다.
유니클로의 브랜드를 전담하고 디자인해 유명해진 일본의 디자이너, 사토 카시와가 쓴 『이 사람은 왜 정리에 강한가>라는 책은 이처럼 정리라는 자신의 습관을 공간 정리, 정보 정리, 사고 정리라는 3가지 측면에서 분류하여 실제 디자인 사례를 들어 설명한 책이다. 책의 제목만 보면 일반 처세술이나 자기계발서와 다르지 않지만, 디자이너가 자신의 습관을 체계화하여 나누어 실제 디자인 프로젝트별로 비교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디자이너는 물론 비전공자도 쉽게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현업에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가 책을 쓰는 사례가 많지 않은 디자인계에서 사토 카시와의 글은 디자인 결과물에 숨겨진 이야기와 사무실 운영,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 등 부차적인 정보까지 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정보를 정리하는 예로 보여준 도쿄 국립신미술관의 아이덴티티 작업은 정리에 있어 시점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보통 우리가 정리를 할 때 비슷한 형태나 기능으로 나누어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라면 연필과 지우개를 나누듯 손쉽게 분류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왜 그렇게 나누어야 하는지 기준을 발견하기 힘들다. 이러한 정보의 정리에서 중요한 것이 시점을 발견하는 일이다. 국립신미술관의 문제는 소장품이 없는 일본 최대의 규모, 물결치는 파사드의 건축물 등의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정보의 나열이었다. 책에서 사토 카시와는 관계없는 것을 정리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이질적인 관계에서 기존 미술관에 없는 ‘새로움’이라는 키워드를 만들었고 새로움이라는 시점에서 정리해나간다. 복잡할수록 눈에 보이는 사실이나 내용으로만 관계를 맺기보다 반대의 경우나 예를 통해 숨겨진 문제를 떠올릴 때 오히려 정리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시점을 언급한 대목 중 “시점을 발견하기 위한 힌트나 테크닉을 적절하게 구사하기 위해 항상 마음에 새겨 놓아야 할 게 있다. 그렇다. ‘무엇을 위해 정리를 하는가’하는 목적의식이다. 정리를 위한 정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략) 정보와 사고를 정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비전’을 찾는 일이다. ‘비전’을 ‘이상적인 작업 환경’으로 바꾸면 ‘공간’의 정리도 목표는 같다. 이상적인 시점을 발견했다면 그것으로 ‘비전’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나 다름없다.”는 인상적이다. 무작정 디자이너가 쓰는 콘셉트나 비전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왜 그런 말이 쓰이는지 오히려 책상 정리에서 출발하여 정보나, 사고의 정리로 이어지며 시점과 비전이 실제 생활과 디자인 작업으로 관계를 맺는다. 디자인하는 것은 정보를 새롭게 재배치하고 정리하여 새로운 시점인 콘셉트를 도출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정리란 디자이너가 최종적인 콘셉트를 찾아가기 위한 훌륭한 도구이자 과정 일부분이다. 또한, 정리의 출발은 항상 이미 있는 내 주변에서부터 시작한다.
냉장고에 문을 열고 무엇을 먹어야 할지 몰라서 좌절한 경험처럼 무엇을 표현하고 어떤 콘셉트를 만들어낼지 불안한 적이 있다면, 새롭게 무엇을 가져오기보다는 이미 있는 재료를 다시 정리해본다면 어떨까. 그것이 책상 앞이 되었든, 자기 생각이 되었든 디자이너가 자신만의 레시피로 문제를 시각화하고 해결하는 사람이라면 놓여있는 문제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새롭게 생각을 정리하자. 새롭다는 것은 어쩌면 이미 있는 것을 정리하는 것인지 모른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물론 괄호 안의 말은 필자가 덧붙인 말이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정리)하라.”
책 정보
이 사람은 왜 정리에 강한가
저자: 사토 가시와
역자: 정은지
출판사: 바다출판사
출간일: 2008.08.29.
가격: 11,000원
강구룡 그래픽 디자이너, 디자인 저술가, 공저로 『위트 그리고 디자인』, 『디자인 확성기』가 있으며 버라이어티 디자인 토크쇼 〈더티&강쇼〉를 진행하며 디자인과 사회, 문화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