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코엑스 대서양관에서 열린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 설치 작가로 초대받았을 때의 일이다. ‘살롱 드 리빙 아트(Salong de Living Art)’라는 주제 아래 ‘새로운 하이-엔드 리빙 문화(High-end Living Culture)’를 제안하는 특별기획관 안에 ‘7 Rooms’라는 전시 코너가 있었다. 주최사인 디자인하우스에서 발행하는 7개의 매체와 7인의 디자이너를 매칭하여 각 매체의 특성을 표현하는 공간을 제안하는 일이었는데, 그때 나에게 요청된 매체는 <월간 디자인>이었다.
나야 공간 전문 디자이너가 아니니 애당초 알지 못하는 영역을 흉내 내느라 애쓸 필요는 없었다. 그저 <월간 디자인>이라는 매체의 역할과 특성을 대변할 수 있는 공간적 체험을 창의적으로 만들어 내면 그뿐이었다.
전시 후 폐기할 설치물의 운명을 바꾸다
<월간 디자인>이란 디자이너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로써 창의적 영감을 얻게 하기 위한 역할을 하는 잡지인 만큼 다양한 정보와 영감들의 ‘레이어(Layer)’라는 잡지적 특성에 착안하게 되었다. 즉, 공간을 다양한 생각의 레이어로 채워보겠다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이 레이어들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유연하고 투명한 것이어야 했다. 독자의 관심과 관점에 따라 부분적이거나 통합적으로 필요한 부분들이 취해지며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 바로 이와 같은 무수한 영감의 흐름을 시각화하여 눈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다양한 생각들이 만나 저마다의 이야기를 나누는 무수한 3차원 공간들이 존재하는 그런 방을 만들고 싶었다.
전시란 주어진 빈 공간에 작가의 생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니 어떤 방식으로든 공간을 채우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전시가 끝나고 난 다음에는? 단 5일에 불과한 전시가 끝나고 난 다음 공간을 채웠던 것들은 다 어디로 가나? 제아무리 멋지고 환상적인 전시도 약속된 기간이 끝나면 모두 철수를 하게 되어있고 그것들을 손상 없이 옮겨다 놓을 방법과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한 모두 폐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 전시 설치물의 운명이다. 그런 사실을 깨달으며 나는 이 비극적 운명을 극복할 방법이 없을까를 골똘히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폐기물 제로의 전시 설치물을 디자인하겠다는 도전 정신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영감으로 가득 찬 빈 방, 그 흥미로운 체험
다중 레이어의 입체적인 프로젝션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스크린이다. 반투명 재질이라도 상이 명확하게 맺히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상이 맺혀도 투과하지 않으면 평면적 프로젝션이 되어버리므로 소용이 없어진다. 여러 재질들을 실험해 본 결과 내가 원하는 상태에 가장 근접한 재질은 작은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망사’였다. 천으로 채워져 있는 부분에는 상이 맺히고 구멍이 뚫려 있는 부분은 투과하여 일정 간격을 둔 여러 레이어의 스크린 위에 매우 입체적인 방법으로 영상을 프로젝트할 수 있게 된다. 이 재질은 매우 유연하여 두루마리처럼 둘둘 말거나 설핏하게 접어 상자에 넣으면 무게나 부피가 그리 나가지 않아 운반과 보관이 용이하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설치를 위해서도 별 재료나 장비가 필요치 않다. 마주 보는 두 벽에 원하는 간격에 맞추어 못을 박고, 공간을 가로질러 철삿줄을 매고 망사를 그 줄 위에 걸쳐 스테이플러로 고정하면 설치는 끝이 난다. 약 8m x 11m 크기의 공간이 일정 간격을 두고 늘어뜨린 망사의 레이어로 가득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다음 두 대의 프로젝터를 이용하여 입체적이며 매력적으로 상이 맺도록 하기 위한 위치와 각도를 정하면 하드웨어적인 설치는 모두 끝이 난다.
어떤 내용의 영상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는 따로 고민할 필요가 없을 만큼 무궁무진했다. 디자이너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 그것이 디자이너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느라 발생되는 상상의 가짓수와 그 상상이 잡지의 다양한 내용과 만나 펼쳐내는 영감의 가짓수를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전시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신기한 듯 영상이 상영되고 있는 공간으로 들어와 손을 허우적거리며 공간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즐거운 탐험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흐느적거리는 망사 천들 이외에는 아무 것도 손에 만져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 ‘가득 찼지만, 텅 빈’ 방에 대한 흥미로운 체험을 놀라워했다.
<월간 디자인>의 방 전시 설치를 위해 우리가 전시장에 들고 간 것은 단출한 종이 상자 2개가 전부였다. 5일간의 전시를 마치고 철수를 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돌아온 것도 상자 2개였다. 더해진 것도 덜해진 것도 없이 같은 내용과 분량의 재료들이 잠시 장소를 달리하여 놓였던 것뿐 아무것도 버려져야 할 것은 없었다. 의도하였던 폐기물 제로의 설치물 디자인에 대한 나의 실험은 성공하였고 그 소감은 매우 통쾌하였다.
이나미
현재 스튜디오 바프(studio BAF) 대표,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9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2010년 대한민국공공디자인엑스포 총괄 기획,
2012년부터 서울 시민청 마스터플랜 총괄 기획과 시민청결혼식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