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디자인 품과 격』(편석훈 저, 윤디자인그룹, 2020) 내용 일부를 재구성한 글입니다.
더 많은 내용은 책 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광장에 심은 희망한글나무, 시민들과 함께 자라나다
2015년 제7회 희망한글나무는 온라인 공간을 넘어 광장으로까지 진출했다. 본래 온라인 사이트에서만 진행되던 캠페인 플랫폼을 오프라인 환경으로 확장한 셈이다. 이렇게 한 데에는 계기가 있었다. 당시 우연찮은 기회로 한글날 행사에 참여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행사 주최 측 내부 담당자와 KBS PD 출신의 한 기획자로부터 온 제안이었다.
그 행사란 바로,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매년 한글날을 기념하여 열리는 ‘한글문화큰잔치’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희망한글나무 담당 직원들과 함께 부랴부랴 행사장에 선보일 콘텐츠들을 준비하여 참여사 등록을 마쳤고, 그렇게 윤디자인연구소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수많은 대중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시민 한 분 한 분께 희망한글나무와 한글 나눔 문화에 대해 설명하고, 선정 서체였던 ‘오후의햇살체’를 소개했다.
당시 시민 한 분의 반응이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분은 ‘한글을 디자인한다’라는 개념 자체가 너무나 생소하다고 했다. 한글의 자소 및 자모음은 이미 세종대왕 시기에 ‘디자인이 완료된 것’ 아니냐는 말도 덧붙였고. 사실, 곰곰 들어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현장에 나가 있던 직원 한 명이 그분을 위해 특별히(?) 시각 디자인 영역에서 ‘서체’가 갖는 중요성, 서체 디자이너들이 하는 일 등등을 굉장히 상세히 알려드렸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분 반응이, “젓가락 만드는 일 같은 거네요?”라고 하더라는 거다. 이유인즉, 젓가락은 이미 그 원형(작대기 두 개)이 ‘디자인 완료된’ 상태이지만, 무수히 다양한 디자인이 나오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디자인만 바뀌는 게 아니라 식기 도구로서의 기본적인 사용성도 유지되고 있으니, 여러 면에서 한글 서체 디자인과 비슷하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이 얘기를 전해 듣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참으로 절묘하고도 오묘한 비유랄까.(그리고 그분은 희망한글나무에 선뜻 후원을 하셨다고 한다.)
2015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희망한글나무는 2016년과 2017년 내리 3년간 광화문 광장에 세워졌다. 특히 2017년에는 규모를 좀 더 키웠다. 당시 제8회였던 희망한글나무는 동양화 일러스트레이터 우나영 작가와 협업했다. 우나영 작가는 ‘흑요석’이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대중적 창작자다. 희망한글나무 선정 서체인 ‘연꽃’과 더불어, 우 작가의 일러스트레이션 작품들이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시민들과 만났고 예상대로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광화문 광장의 윤디자인그룹 부스에서는 희망한글나무 및 연꽃에 대한 소개뿐 아니라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체험 프로그램까지 진행한 덕에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독도, 소녀, 그리고 봄에게 심은 희망한글나무
희망한글나무는 역사 인식을 제고하는 목적의 한글 서체들도 꾸준히 선보여 왔다. 대표적인 것이 ‘대한민국 독도체’와 ‘사랑해라떼’, 그리고 ‘봄날’이다. 2012년 제4회 희망한글나무는 ‘한글, 독도를 지켜라!’라는 주제 하에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별칭이 ‘566번째 한글날 독도 지키기’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독도체는 이름 그대로, 홀로 우뚝 솟아 있는 독도의 모습을 형상화한 제목용 캘리그래피 서체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국민적 명제를 한글 서체로 강렬하게 시각화한 것이다. 당시 희망한글나무는 캠페인 참여자들과 함께 ‘대한민국 독도체 널리 사용하기 운동’도 벌였고, 서체 수익금은 세종대 독도 종합연구소에 전달되었다.
2016년 제8회 희망한글나무의 주제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로 소녀들에게 사랑을 전하세요’고, 선정 서체가 ‘사랑해라떼체’였다. 이때 ‘소녀’는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우선, 당시 고등학교 재학 중이었던 소녀들을 가리킨다. 이화여자고등학교 역사동아리 ‘주먹도끼’ 소속 학생들인데, 지도 교사인 성환철 선생님과 소녀들은 2014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자 ‘대한민국 고등학생 소녀상’ 건립 운동을 시작했다. ‘소녀’의 또 다른 의미는, 다름 아닌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다. 희망한글나무 수익금 전액은 ‘대한민국 고등학생 소녀상’ 건립 운동 기금으로 후원되었다.
2018년 제10회 희망한글나무의 주제는 ‘비로소 봄’이었다.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들 돕기 위한 프로젝트였고, 캘리그래피 서체 봄날은 그 이름도 형태도 더없이 어울렸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지금도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고령으로 힘겹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 중인 분들도 있다. 재단법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피해자 및 유족에 대한 복지 사업과 유해 발굴·송환 사업을 진행하는 단체다. 제10회 희망한글나무 수익금 전액은 바로 이 단체에 기부되었다.
10년이 넘은 희망한글나무, 앞으로도 계속 자라나고 피어날 터이니 앞으로도 많은 분들이 동참해주면 좋겠다. 한글을 디자인한다는 것, 한글 서체를 만든다는 것. 이 창작의 행위가 일상 속으로, 이웃 속으로, 그리고 역사 속으로 번져나갈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희망한글나무의 존재 이유다.
2009~2020 희망한글나무 후원 내역 2009년 제1회 ‘밝은체’ 하상장애인복지관 공동주최로 11개 맹학교에 312권 점자책 제공 2010년 제2회 ‘법정체’ 세계예술치료협회 후원, 포도원복지센터 후원 2011년 제3회 ‘소설책165페이지’ 세계예술치료협회 후원 2012년 제4회 ‘대한민국 독도체’ 세종대 독도 종합연구소 후원 2013년 제5회 ‘북촌마을’ 하상장애인복지관, 세계예술치료협회 후원 2014년 제6회 ‘희망드림체’ 국제구호개발기구 후원 2015년 제7회 ‘오후의햇살’ 서울대 소아과 병동 후원 2016년 제8회 ‘사랑해라떼체’ 대한민국 고등학생 소녀상 건립 프로젝트 후원 2017년 제9회 ‘연꽃’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나눔의 집 후원 2018년 제10회 ‘봄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후원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