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디자인 품과 격』(편석훈 저, 윤디자인그룹, 2020) 내용 일부를 재구성한 글입니다.
더 많은 내용은 책 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중반 전각 작품은 한글 글꼴의 다양성 측면에서 새로운 상품화의 소재로 부각되고 있었다. 특히, 고암(古岩) 정병례 선생(이하 고암 선생)의 전각 작품은 ‘새김아트’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전각의 모던한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돌이나 나무 등의 재료 위에 쓰고 새겨 찍어내는 전각은, 다루는 재료의 물성과 칼맛이 느껴져 질감 있는 서체로 만들 수 있기에, 확실히 손글씨와는 차별화를 이룰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2007년 드디어 고암 선생을 찾아갔다.
고암 선생은 “전각이란 글씨와 그림, 조각이 합일되어 금은동목석, 심지어 흙까지 모든 재료에 칼로 새키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전각은 독자적 예술”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그는 “전각 공부는 처음에 지름이 3cm밖에 안 되는 방촌(方寸)으로 시작하기 마련인데, 그 작은 공간 안에 점과 선과 면이 직곡(直曲)의 합일로 어우러지도록 하는 작업은 ‘우주를 끌어들이는 작업’이라고 할 정도로 리듬감과 테크닉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라며 전각의 매력을 피력했다.
이미 고암 선생은 전각을 타이포그래피 디자인과 판화 등 여러 평면적인 예술 분야와 조각, 설치 등 입체적인 작품 세계로 표현해내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퍼포먼스와 애니메이션 영역까지 접근하는 등 전각의 세계를 확대해나가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각 작품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걸어온 고암 선생은 여전히 ‘멀티 아티스트’의 길을 걷고 있었고, 이런 이유로 전각을 글꼴 상품으로 발전시키자는 우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결코 순탄치 않았던 디지털화 작업
개성이 뚜렷한 디자이너 네 명을 한 팀으로 결성해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서울 인사동 전각연구원에서 고암 선생을 만나고 온 디자이너들은 “수많은 전각 작품들의 현대적인 색감과 기하학적인 문양에 홀렸으며, 크고 작은 돌 안에 수직, 수평, 원, 모, 각 등이 모여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아낸다는 사실에 매료되었다”고 했다.
가장 먼저 고암 선생의 작품들 속에서 이미지 데이터를 추출해내고 기존 유사 서체 분석을 통해 고암 선생 글꼴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기존 전각 서체 대부분은 일관된 이미지를 추구하고 전통을 강조해서 점잖지만 딱딱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들과 비교할 때, 고암 선생의 글꼴은 전통미의 멋스러움과 현대적인 세련미가 조화로워서, 보다 감각적이고 차별화된 디자인을 요구하는 사용자들에게 전각의 맛과 멋을 다양하게 선보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것은 기존의 형식과 틀에 안주하지 않고 독창적인 기법과 표현 양식으로 전각의 현대성과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애써온 고암 선생의 노력의 결과였고, 덕분에 폰트 상품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폰트 콘셉트도 보다 명확하게 잡을 수 있었다.
고암 선생의 글꼴은 크게 Modern(Simple), Soft(Feeling), Hard(Reasonable), Classic(Complex) 등 네 가지로 분류되었다. 글꼴들의 이미지 포지셔닝을 하면서 이미지 맵을 작성하여 네 가지 안으로 스타일을 정했다. 스타일이 정해진 글꼴들은 폰트 작업을 진행할 디자이너 네 명의 특성과 성향에 따라 네 가지 콘셉트(해, 나무, 물, 땅)로 나누어 시안 작업을 시작하게 했다. 이러한 준비 과정에만 한 달여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네 가지 스타일별로 200자 가량의 낱자 원도를 고암 선생께 요청한 후 스캔을 받아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결코 순탄한 작업은 아니었다.
가로세로 10x20cm의 네모난 돌판 안에 빈틈없이 새겨진 글자들은 너무나 치밀했다. 그리고 원도를 디지털화한다는 것은 컴퓨터 자판이 칼을 대신하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작품 속에 담긴 몇 개의 글자와는 달리 모든 낱말과 문장들을 만들어야 하기에 가독성뿐만 아니라 글자의 균형과 비례를 무시할 수 없었다. 원도의 형태 묘사는 물론이고 작품이 주는 느낌과 작가의 철학까지도 녹여내는 역할이 요구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디지털화 작업이기 때문이다.
디지털화 작업 중 가장 어려웠던 점은, 서체의 질감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질감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데이터 용량이 필요했고, ‘손맛과 돌맛, 칼맛’의 삼박자가 맞아야 전각 본연의 느낌이 폰트에 제대로 표현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을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아, 1차 시안 작업 때는 고암 선생으로부터 전각 본연의 힘이 빠졌다는 평을 듣고 말았다. 이후 적절한 점의 위치, 선의 모양 등을 정하고 하나의 원도에서도 힘의 강도에 따른 다양한 질감을 표현해보며 많은 시도를 한 결과, 전각 특유의 느낌을 살린 질감을 줄 수 있었다.
전통 전각의 모던하고 세련된 재해석
‘고암새김-해’는 해가 지고 떠오르듯 넘실대는 유연한 모듈을 살린 Medium과 Light, 음각으로 표현된 Black으로 구성했다. 중성 ‘ㅔ, ㅖ, ㅣ, ㅓ’ 세로획의 방향감이 전각 특유의 텍스처와 어우러져 역동적이면서도, 글자의 폭과 높이에 율동감을 주어 조판에서의 리듬감을 충분히 살릴 수 있도록 제작했다.
‘고암새김-나무’는 자소에 장식적 요소를 가미해 스타일을 강조했다. Medium의 경우 ㅁ, ㅇ, ㅎ 등 획의 처음과 끝이 닫힌 몇몇 자음들의 내부를 채워 선이 아닌 면으로 그 모양을 나타내는 팬시적인 요소를 가미시키고 획의 마무리를 소용돌이처럼 꼬이듯이 한 것이 특징이다. 대소의 차이가 큰 글꼴들을 윗줄 맞춤으로 정렬하여 가독성과 운율감도 고려했다. 이는 고암 선생 초기 작업들의 스타일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고암새김-땅’은 전각 특유의 질감을 최대한 살리는 작업이었다. 중성의 세로 굵기 안에도 칼의 힘을 받아 홈이 생긴 부분까지 묘사하여 풍부한 질감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살리면서도 친근하고 부드러운 맛을 낸 Medium, Light를 기본으로 작업했다. 그리고 큰 사이즈로 사용하였을 경우 중성의 홈과 자소의 텍스처 넓이가 커진다는 것을 감안해 부담스럽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 Simple 폰트를 추가해 활용도를 높였다. 여기에 가로 세로 굵기의 비율 등이 보다 안정감을 주고 자소가 직선으로 정리되어 정갈한 맛을 지닌 White 폰트를 추가해 총 4종으로 작업했다.
‘고암새김-물’의 경우는 고암 선생의 대표적인 서체를 모티브로 했다. Original 폰트는 말 그대로 고암 선생의 전각 원도에 충실하게 작업한 것으로, 특히 ‘ㄲ, ㅅ, ㅊ’ 등의 꼴에서 고암 선생 특유의 개성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독특한 글꼴에서 오는 호불호가 강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문장이 길어졌을 때의 가독성 등을 고려하여 Medium과 Bold도 제작했다.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