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ulto(디꿀또)는 김엘리아나가 자신의 모토로 쓰는 말이다. 스페인어 diseño(디세뇨, 디자인), culto(꿀또, 문화), oculto(오꿀또, 숨겨짐)의 철자로 만든 조어다. 김엘리아나의 DiCulto는 ‘라틴 아메리카와 한국의 숨겨진 디자인 문화를 밝히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그녀의 표현을 빌면 “디자인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의 과(課)와 업(業)”을 함축한 말이기도 하다. 김엘리아나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디자인을 공부하고 한국에서 박사학위(서울대학교 디자인역사문화전공)를 받았다. 지금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를 무대로 활발히 학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아직은 다소 낯선 ‘라틴 아메리카 디자인’을 국내에 알리고, 한국과 중남미 디자인계의 교류를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타이포그래피 서울』 시리즈 [김엘리아나의 DiCulto]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중남미 디자인계의 문화와 역사, 현지에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와 타이포그래퍼, 디자인 스튜디오를 소개한다. 이 시리즈를 통해 우리 인식 체계 안의 ‘디자인 영토’가 라틴 아메리카 대륙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기를 바란다.
자니나 아라베나(Yanina Arabena)와 기제르모 비사리(Guillermo Vizzari)는 2007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건축도시계획디자인대학(FAU, Facultad de Arquitectura, Disenio y Urbanismo) 타이포그래피 수업 조교로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일심동체로 활발한 타이포그래피 활동을 하며 그중에서도 레터링 작업을 중점적으로 해 왔다.
자니나와 기제르모는 2013년 디자인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자니와 기제(Yani & Guille)’. 한국으로 치면 ‘영희와 철수’처럼 서로의 애칭을 이용해 친근한 분위기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 공간은 타이포그래피 디자인과 레터링, 일러스트레이션과 캘리그래피를 연구하며 가족을 꾸린 그들의 아지트가 되기도 했다.
자니나-기제르모 듀오의 서로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사랑은 그들의 스튜디오를 아르헨티나 타이포그래피 학계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곳으로 성장시켰다. 소박했던 2인 스튜디오는 2021년 그룹과 팀을 구성하여 지금의 ‘자니와 기제(YaniGuille&Co.)’로 재탄생하였다.
자니나는 캘리그래피, 그리고 기제르모는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서로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선이 없는 초록색 종이 노트 위에 활자와 이미지를 채워가며 캘리그래픽 선과 삽화가 함께 춤을 추듯 어울린” 것과 같이, 두 디자이너의 레이아웃에서 형성되는 케미스트리는 환상적이다.
자니나는 캘리그래피에 늘 관심이 많았다. 아름다운 활자를 그리기 위한 학문적 접근이기보다는, 캘리그래피가 가진 “표현을 이용해 새로운 세계관을 전할 수 있는 잠재력”에 더 관심을 보였다. 따라서 “대상의 구성과 크기, 이를 그리는 표면을 바꿔가면서 캘리그래피의 리듬과 가독성(readability)을 실험해” 보기도 했다.
기제르모의 경우,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관심은 활자를 그리는 실습 수업에서 시작되었고 그 결과 레터링까지 다다랐다고 한다. 사실 그가 그림을 매개로 타이포그래피에 접근한 이유는 바로 그의 전공인 일러스트레이션에 있었다. 기제르모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헐링햄 음악미술 아카데미(Conservatorio de Hurlingham)에서 6년간 일러스트레이션과 회화를 전공”하고 그 이후에 타이포그래피를 전공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전공을 이수하며 레터링 분야에 많은 고민과 관심을 쏟았던 기제르모와, 캘리그래피를 거침없이 연구하는 자니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학생들을 교육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그런 노고는 라틴 아메리카 타이포그래피 학계 유명 디자이너들의 인정과, 자니나와 기제르모의 수업을 수강한 제자들이 오래도록 감사를 표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중 몇명을 예로 들자면, 라틴 아메리카 주조소 수드티포스(Sudtipos)의 창립자 알레한드로 파울(Alejandro Paul)과 타이포그래피 그래미를 수상한 라우라 바르스키(Laura Varsky), 아르헨티나 디자인계의 ‘떠오르는 태양’으로 불리는 마르테(Martina Galarza)를 꼽을 수 있다.
레터링과 캘리그래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자니나는 “이 둘의 결과를 보고 사람들은 혼동할 수 있지만” 여러 차이점 중에서도 캘리그래피와 레터링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 둘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다고 설명했다. “캘리그래피는 단 한번의 손길로 표현되는 획으로 이루어지고 레터링은 글자 그림”이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기제르모는 “캘리그래피의 심미성은 캘리그래퍼의 손맛”과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한 자발성에 있다면, 레터링의 미덕은 이를 한번 그린 이후 소통하고자 하는 메세지에 따라 고치고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물론, 자니나가 언급했듯 이 두 기법의 차이점은 다양하다. 그러나 자니와 기제는 이 둘의 괴리를 마다하고 일러스트레이션, 벡터, 사진과 함께 결합되어 다채롭고 생기 넘치는 타이포그래피 작품으로 레터링과 캘리그래피를 재탄생시킨다.
자니와 기제는 “레터링과 캘리그래피 작품부터 로고 리디자인, 커스텀 타입(custom type) 제작, 편집 디자인(editorial design), 광고 캠페인, CI”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 중에서도 애플(Apple),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디즈니(Disney), 넷플릭스(Netlix), 아르코르(Arcor), 라 라시온(La Nación) 신문사 등 아르헨티나 안팎의 다양한 기업들과 계약을 맺기도 하고, 여러 디자인 공모전에서 수상하며 인지도를 높이기도 했다.
일러스트레이터 에우헤니아 멜로(Eugenia Mello)와 협업.
에우헤니아 멜로와 협업.
〈기묘한 이야기〉 속 괴수 데모고르곤(Demogorgon)과 멕시코의 전설적인 프로 레슬러 엘 산토(El Santo)를 대결 구도로 연출했다.
(넷플릭스 멕시코의 의뢰로 작업)
다종다양한 작업들 중 과연 자니나와 기제르모의 인생작은 무엇일까. 두 사람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미식(gastronomic) 페어 〈마스티카르(Masticar)〉의 CI 디자인을 꼽는다. 동사 ‘씹다’를 의미하는 〈마스티카르〉는 2012년에서 2020년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매년 개최된 페어였다. 페어의 인기와 규모가 커짐에 따라 2014년 “페어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던 세바스티안 가긴(Sebatián Gagin)과 마리나 플라(Marina Pla)는 레터링과 일러스트레이션을 활용한 특색 있는 CI 매뉴얼 제작을 원했고, 이를 위해 스튜디오 자니와 기제에게 프로젝트 참여를 요청”했다. 그렇게 자니나와 기제르모는 “결국, 프로젝트의 리디자인 전체를 전담하고 말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마스티카르〉 프로젝트 기간을 정말 많은 고민과 도전, 그리고 여러 번 위기를 극복해야 했던 시기였다고 묘사한다. “매 순간 도전적인 프로젝트였다. 수작업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프로젝트라서 연필로 레터링과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고 그림을 동반하는 문장들도 기필했고, 마지막에는 〈마스티카르〉와 적합한 타이포그래피를 디자인해서 페어 시각 홍보물에 적용시켜야 했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고 자니는 회상한다.
하지만 이런 열정과 정성은 시간이 지나 커다란 열매를 거뒀다. 수작업 홍보물은 국제적으로 〈마스티카르〉 페어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켰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스티카르〉의 이미지는 대중의 눈에 각인될 만큼 “매년 색상, 레터링, 일러스트레이션은 변했지만 그 타이포그래피는 유지되었고, 이 덕분에 강력한 아이덴티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자니와 기제가 디자인한 이미지다. 자니나와 기제르모는 이 이미지에 대해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
“모두의 인내와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저 멀리 희망의 지평선을 향하여 깃발을 휘날리며.
(honoring the perseverance and effort, as a fluttering flag that points to the horizon.)”
“페어의 마지막 몇 회는 로고 없이 자니와 기제의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문구를 보여주기만 해도” 사람들은 〈마스티카르〉를 알아봤다고 기제르모는 덧붙인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통해 스튜디오 자니와 기제는 점점 커져갔고 새로운 도전과 탐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자니와 기제는 창창한 미래를 앞두고 있다. 올해 스튜디오를 확장했고, 연내 출시할 새로운 폰트 두 개를 개발 중이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매우 중요한 그래픽 캠페인도 앞두고 있다. 2007년부터 무려 16년이 지난 오늘까지 자니나와 기제르모의 열정과 시너지는 여전하다. 앞으로 아르헨티나의 레터링과 캘리그래피가 『타이포그래피 서울』을 통해 보다 널리 알려지길 기대하며 글을 맺는다.
스튜디오 ‘자니와 기제’
사이트 ➲ yaniguille.com / 인스타그램 ➲ @yaniguille
디자인 연구자, 교육자.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디자인을 공부하고 한국에서 석박사 학위(서울대학교 디자인역사문화전공)를 받았다. 중남미 국가들과 한국을 오가며 학술 행사에 참여하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아르헨티나, 칠레 등 라틴 아메리카의 디자인 잡지들과 국내의 월간 『디자인』 및 『디자인 프레스』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했다. @DiCul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