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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향기, 디자이너 이기준

    시간의 향기, 디자이너 이기준


    발행일. 2014년 01월 03일

    시간의 향기, 디자이너 이기준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벡터 라인이라도 가진 걸까. 그의 작업은 어딘지 자로 그은 듯 반듯하고 꼼꼼하게 느껴졌다. 한 음도 흘리지 않고 정확하게 건반을 터치하는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처럼, 소리로 쌓은 건축물 같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처럼. 그러나 최근 그의 작업은 예전과 다른 변화를 맞은 듯하다. 서촌에 작업실을 꾸려 행복하게 살아가는 디자이너 이기준을 만났다. 글. 인현진
    

    최근 근황은 어떠세요?

    보통 디자이너들이 그렇듯 열심히 일했죠(웃음).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라운드-업>이라는 전시회의 도록과 리플릿 작업을 했어요. 유유출판사의 <1일1구>라는 책이 막 나왔고요. 다음 책 진행하다가 연말이니까 좀 쉬려고요. 지난 석 달 동안은 오전 8시 전에 출근해서 밤 10시~11시에 퇴근할 정도로 바빴어요. 오늘은 인터뷰만 하고 쇼핑하러 가려고요. 가을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거든요. 월동준비 하러 가요(웃음).

    많은 디자이너가 자전거 마니아세요. 무슨 이유라도…(웃음)?

    책상 앞에서 꼼짝 않고 있는 시간이 많잖아요. 손가락이랑 눈동자만 움직이니까(웃음). 몸을 움직이는 쾌감이 있어요. 저는 걷는 걸 좋아해서 평소에도 지하철역 몇 개 정도는 걸어 다니거든요. 헬스클럽도 다녀봤는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러다가 친하게 지내는 사진가가 지리산 종주를 가자고 해서 산을 가게 되었고 또, 가을엔 친구가 자전거 타자고 해서 어? 괜찮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시작했어요. 내 몸에 맞는 속도로 달리면서 기계를 조작하는 맛도 느낄 수 있어 재미있어요.

    작업 성향이 조금 바뀐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요즘 그런 얘기를 주변에서 종종 듣곤 해요. 딱 떨어지는 벡터 라인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더니 요새는 심심할 정도로 뭐가 없다고(웃음). 제가 생각해도 예전에는 거의 빈틈없이 채우긴 했죠. 어쩌면 오랫동안 채우다 보니 스스로 질려서 다르게 해보자, 라고 비우는 쪽으로 간 것 같기도 하고. 전엔 감정 표현도 안 하고, 말도 잘 안 했어요. 로봇이냐, 할 정도로 딱딱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훨씬 느슨해졌어요.

    내면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작품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친 건가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보다 여러 사람에게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감정이 없어 보인다, 하는 말을 자주 듣다 보니 내가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하지만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금방 확 바뀌진 않잖아요. 생각이 쌓여 조금씩 변하는 방향으로 흘렀겠죠. 지금이 좋아요. 로봇 같다는 말은 안 들으니까(웃음). 망가진 모습을 안 보이려고 했는데 지금은 뭐…. 많이 망가진 것 같네요(웃음).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그래픽 작업 중 <라운드-업>과 <비디오 열기> 전
    아르코아카이브 브로슈어
    자음과모음 도서 카탈로그 일문판
    이상의 시 ‘삼차각설계도’를 다룬 개인 작업
    그는 일과 삶 사이의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듯 자신의 온몸으로 생의 감각을 느끼길 바란다.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일찌감치 찾았기 때문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오늘날 필요한 것은 다른 시간, 즉 일의 시간이 아닌 새로운 시간에 향기를 되돌리는 일"이라고 했다. 자신의 시간에 향기를 부여할 줄 아는 특별한 능력이 그에겐 있다. 

    서촌에서의 생활은 어떠세요?

    여기 온 지 2년 정도 됐어요. 동네는 잘 잡은 것 같아요. 마지막 직장을 그만두고 5년 넘게 집에서 혼자 작업했어요. 2년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이상 넘어가니까 외로움이 밀려오더라고요. 밥을 늘 혼자 먹어야 하잖아요. 그렇다고 매일 약속을 잡을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 술이 늘고 텔레비전을 계속 틀어놓고. 어느 날 문득 제 모습을 보니까 이러다 망가지겠다 싶더라고요. 마침 뉴욕에서 일하던 친구가 들어온다고 해서 같이 쓸 공간을 구하게 된 거죠. 오고 나서 작가, 디자이너, 사진가 등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어요. 만나서 밥도 먹고 재미있게 지내고 있어요.

    작업 방식은 어떤 편이세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되찾는다는 내용의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이라는 책이 있어요. 거기 나오는 피아노 선생님이 한 얘기였던 걸로 기억해요. “연주에서 중요한 건 연주자의 자아를 투명하게 보태는 것이다.” 그 대목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나는 그 작가처럼 한 문장으로 표현할 줄은 몰랐지만, 작업할 때 중요하게 여긴 것이 바로 그 지점이었거든요. 디자이너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표현해야 하지만 자기 흔적이 없으면 매력이 없잖아요. 원안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개성을 어떻게 담을까 고민하던 차에 그 글을 읽고 아! 이거다! 싶었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요. 작업을 통해 전해지는 게 분명히 있는 것 같고요.

    투명하게 얹어진 그 투명함을 알아보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참 감동적이네요.

    신기하죠. 그게 특히 잘 드러나는 분야가 음악인 것 같아요. 슬프다, 라는 말 한마디 없는데도 슬픈 음악을 들으면 슬프잖아요. 10대 때는 헤비메탈을 좋아했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서 4년을 살았어요. 텔레비전을 보는데 가죽옷을 입은 남자들이 긴 머리를 흔들면서 기타를 치는 신세계가 펼쳐지는 거예요(웃음). 음반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가상의 밴드를 만들어 로고 만들면서 놀았어요. 기타도 디자인하고. 그러다 재즈, 클래식으로 넘어갔죠. 글렌 굴드를 처음 듣고 우와! 이게 뭐냐! 놀랐죠. 또박또박 한 음 한 음 누르는 방식이 정말 좋았어요. 제가 딱 떨어지는 작업을 추구할 때라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최고의 음반으로 글렌 굴드가 1981년에 녹음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꼽아요.

    악착같이 작업에만 매달리는 이미지는 아니신 것 같아요.

    디자이너는 직업일 뿐이에요. 인간 이기준의 여러 가지 역할 중 하나. 아들, 삼촌, 애인, 친구, 선배, 후배, 전부 나지 다른 사람이 아니잖아요. 일에만 치중하기보다 인생의 다른 부분을 아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에 대해 경계심이 있어요. 게다가 한 가지만 파기에는 재미있는 게 너무 많은 세상이죠. 새 책이 궁금해서 읽던 책을 다 못 읽어요. 이제 좀 추슬러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디스 이즈 아프리카>, 난다 
    <어쨌든, 잇태리>, 난다 
    <여행, 혹은 여행처럼>, 난다 
    <내 작은 회사 시작하기>, 디자인하우스
    가운데로만 가는 게 균형은 아니다.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깊이 들어갔다 나오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 오히려 균형을 잡는 것에 가까우리.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맛을 음미하면서도 담백함을 유지하는 그의 매력은 과시하거나 척하는 것이 없는 태도에서 온다. 그는 가속화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속도로 페달을 밟으며 온몸으로 열어가는 시간을 살아간다. 

    디자이너로서의 욕구도 분명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아예 없지는 않죠. 기왕 하는 거 잘한다, 소리 들으면 좋죠. 하지만 자신을 괴롭히면서 작업하지는 않아요. 멋있는 작업을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겠다는 야망이 없죠. 작업을 편하게 하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편한 것 같아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투명하게 자아를 포개기.

    일에 욕심을 많이 내던 시기도 있으셨나요?

    학교 졸업하고 한창 배우면서 일할 때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인정받고 싶어서 계속 밤새고. 많은 일을 모두 잘하려고 하니까 이삼일씩 집에 못 갔죠. 그 시기를 지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떨친들 온종일 일만 해야 한다면? 뭐가 더 중요한가? 유명해지지 않아도 좋으니 하루 중 몇 시간은 책도 읽고 친구도 만나면서 살고 싶더라고요. 그때 이후 지금의 성향이 자리를 잡은 것 같아요.

    작업할 때 지키는 것이 있다면요?

    꼭 제 고집을 관철하려고 하지는 않아요. 지금은 내 생각이 옳은 것 같아도 아닐 수도 있는 거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기분 좋게 진행하는 게 편하고 제 성격에도 잘 맞는 것 같아요. 자기 고집을 끝까지 지켜서 좋은 결과물이 나오면 그것도 의미가 있죠. 그런 일은 그런 재능이 있는 사람들한테 맡기고 저는 제 방식대로 가려고요(웃음).

    젊은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한마디를 해주세요.

    트렌드라는 게 있잖아요. 젊을수록 미디어의 영향을 받기 쉽지만 지나치게 휘둘리지 않고, 지금 당장 현실적이지 않더라도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지속시켜나가는 습관을 들이면 좋겠어요. 그래야 쌓이는 게 생기고 필요한 시점에 그걸로 할 수 있는 게 많아져요. 몇 년 안에 인생이 결정되지는 않으므로 조바심내지 말고 조금은 느긋하게 계속 달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조선의 궁궐과 종묘>, 눌와
    <아름다운 절, 부석사>, 눌와
    사이언스북스의 책들. <지식인>, <수학의 확실성>
    계원조형예술대학의 학교 소개서 겸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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