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문의





    검색

    닫기
    t mode
    s mode
    지금 읽고 계신 글

    [시리즈 다시보기] 신항식의 Designology #2 우리의 보자기, 우리의 디자인

    우리의 ‘보자기 철학’으로 돌아가자 ― 기호학자 신항식의 디자인-학(design-ology) 강의


    글. 신항식

    발행일. 2023년 10월 12일

    [시리즈 다시보기] 신항식의 Designology #2 우리의 보자기, 우리의 디자인

    요즘 사람들이 알까 모르겠다. 1980년대 후반까지 <맥가이버>라는 TV 프로그램이 인기였다. 주인공 맥가이버는 주변의 물건을 최대한 이용해서 어려움을 벗어나고 악당을 물리친다. 악당이 지하실 창고에 그를 가두면 못 쓰는 페인트통과 고무호스, 성냥을 이용해 벽을 폭파시켜 도망친다. 물속에 빠지면 입고 있던 점퍼를 위아래로 묶어 공기를 유입, 유유히 적진을 벗어난다. 산사태로 눈 속에 갇혀도 가진 볼펜으로 눈구멍을 뚫고 살아난다. 맥가이버는 탄복할만한 해결사였다.

    탄복할만한 삶의 해결사

    멋진 해결사의 모습은 디자인의 역사에도 있다. 손으로 두들겨 밀가루 판을 만들기가 힘드니 홍두깨 두 개를 겹쳐 그 사이에 밀가루 반죽을 넣어 돌리게 했다. 유리병이 원통이면 잘 깨지니까 S자형으로 만들어 충격을 분산시킨다든가, 모서리에 부딪히지 않게 하려 책상 모서리를 둥글게 한다든가, 요트 속에 쓰레기통을 따로 두지 않고 바닷물과 닿는 부분에 미닫이 서랍을 만들어 생선 쓰레기를 바다로 흘려보냈던 디자인들 말이다. 글로 쓰인 벽보가 주목을 끌지 못하니, 일러스트레이션을 넣어 포스터를 만든다든가, 사고자 하는 물품이 보이지 않을까 봐 제품 중앙 부분을 비닐로 처리하여 내용을 보여 준다든가, 길을 편하게 찾을 수 있도록 화살표와 글씨, 도안을 통해 사람을 인도하는 정보 디자인도 그렇다. 디자이너 스스로는 잘 모르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그는 삶의 탄복할만한 해결사다.

    디자이너는 삶을 두 가지로 해결해 왔다.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삶으로서 목숨(Live), 인간의 성취감을 해결하는 삶으로 인생(Life)이 그것이다. 한 몸에 두 개의 삶이 혼재하는 인간이기에 디자인도 두 개의 삶에 맞추어 흘러왔던 것이다. 유니버설 디자인, 게슈탈트적 디자인, 인지공학 등은 디자인을 목숨으로서 파악한다. 인간의 기본적인 감각과 조건, 자극과 반응을 고려하여 디자인을 구상한다. 이는 산업디자인의 기본 개념이었다. 산업은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분야이며 여기에 인간적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즉, 목숨형 산업 디자인은 따라서 세계 인류에게 동시에 적용 가능한 스탠다드 디자인을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저 먹고, 입고, 자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목숨만 부지하는 각박한 삶과 디자인이 아니라, 삶의 성취에 의한, 성취를 위한, 성취의 디자인이 있다. 인생형 디자인이라 할까. 이것이 바로 문화를 고려한 디자인이다.

    보자기 예찬

    한국 폴리텍 학장 권일현 교수는 그의 박사논문에서 서구식 가방의 근대철학과 보자기가 가진 한국의 철학을 서로 비교하고 있다. 가방은 규격화되어 있는 반면 보자기는 개방적이다. 가방은 근대 건축적 구조인 반면, 보자기는 근대를 극복하는 미래의 융합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올바른 지적이다. 가방의 경우, 형태와 내부 공간이 미리 정해져 있어서 그 조건에 맞추어 물건을 집어넣게 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큰 물건은 허락하지 않아 완력을 쓰게 하기도 한다. 서구의 가방 디자인은 삶을 이기적으로 해결한다. 반면 한국의 보자기는 형태도 내부 공간도 정해져 있지 않다. 자기를 중심으로 물건을 선택하지 않고 물건을 중심으로 자기를 변형시킨다. 책을 싸면 네모가 되고, 떡을 싸면 동그라미가 되며, 아기를 들쳐 업으면 아기 궁둥이와 허리 모양이 된다. 물건이 크든 작든 웬만한 것에 자신을 허락한다. 물건 전체를 쌀 필요도 없다. 말린 명태가 보자기 바깥으로 삐죽 튀어나와도 된다. 그것이 또 멋이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자리도 차지하지 않는다. 척척 접어서 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다. 필요할 때만 공간을 허용한다. 가방이 찢어지면 그 부분을 고치거나 버리지만, 보자기가 찢어지면 그 또한 크기가 조금 작은 보자기(조각보)가 될 뿐이다. 한국의 보자기는 이처럼 삶을 이타적으로 해결한다.

    이런 디자인은 자기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고 민족의 문화를 미래로 투여하는 혁신이라 할 것이다. 잘 헝클어지지 않는 한국인의 머리칼에 맞춘 밴드형 모자, 신발 벗고 뒹굴 대고 몸을 기대는 방(房)문화에 익숙한 한국의 공간 문화를 가진 침대형 자동차, 열차, 비행기 실내 디자인, 도로 상황에 따라 타고 접을 수 있는 자전거, 음식을 ‘먹는다’기 보다 ‘나눈다’고 생각하는 음식 문화에 맞춘 유선형 식탁과 나눔형 푸드 스타일링, 산새와 지형을 고려한 건축 디자인, 공간의 용도를 언제라도 바꾸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접이형 방문과 창문, 제품의 모습이 드러나는 포장디자인, 선택, 복사, 저장, 송신, 불러오기의 유기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인터페이스 메타포 등. 사물의 성질, 형태, 컬러, 구성을 제멋대로 선택하고 잣대를 들이대는 서구 근대의 디자인이 아니라, 사물을 그 자체로 존중하면서 이를 감싸 안는 이타적인 디자인 말이다.

    다시 보자기 철학으로

    1961년 산업, 제품 중심의 일본 도안법을 채택했던 한국은 50년 만에 디자인법과 정책의 진로를 바꾸어 버렸다. 2012년 한국은 미국과 유럽 FTA에 맞추어 디자인법을 현대식으로 바꾸고 산업과 제품이 아닌 브랜드와 콘셉트 중심 체제로 들어섰다. 타 디자인을 벤치마킹, 모방하거나 표현을 중심으로 시안을 남발하는 디자인 시대가 막을 내리고 콘셉트, 브랜드 중심의 디자인 시대가 막 시작된 것이다. 디자인의 콘셉트가 뚜렷하지 않거나 타 브랜드의 표현과 모티브가 발견되면 언제라도 표절로 고소를 당할 수 있다. 남의 문화에 숟가락을 얹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 한국 디자인은 어찌해야 할까? 이에 대한 응답은 자명하다. 남의 인생, 문화를 모방하려 하지 말고 우리의 보자기 철학으로 돌아가면 된다. 자기 인생, 자기 민족 문화를 타고 들어가 콘셉트를 먼저 구상하고 표현하면 되는 것이다. 문화 디자인은 민족의 역사와 함께하며 민족이 가진 디자인의 철학(콘셉트)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세계화 시대의 디자인 트랜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끌 동력도 거기에 있다.

    신항식
    현재 한양대학교 초빙교수 겸 SSBC 연구소장.
    저서로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시각영상 기호학>, <디자인 이해의 기초이론> 등이 있고,
    <재현의 논리와 미학의 재구성>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Popular Series

    인기 시리즈

    New Series

    최신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