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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훈의 글자발견 #3 오월의 광주, 두 가지 흔적과 하나의 맥락

    봄날 광주를 채운 글자들 혹은 기억들


    글·사진. 한동훈

    발행일. 2022년 05월 26일

    한동훈의 글자발견 #3 오월의 광주, 두 가지 흔적과 하나의 맥락

    5월의 하늘은 푸르다. 좋은 타이밍에 광주로 향하게 되었다. 기차를 타고 광주 송정역에 내리니 마치 늦봄은 건너뛰고 여름이 한 번에 다가온 것처럼 햇살이 눈부셨다. 역에서 내려 약간 걸으면 1913송정역시장 입구가 나온다. 한낮인데도 시장 안에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곳은 1913년부터 존재한 송정역 앞 매일시장을 리모델링한 시장이다. 동시기 존재했던 많은 재래시장이 현대의 마트와 경쟁이 되지 못해 사라졌지만 이곳은 개보수를 거쳐 다시 태어났다. 50여 곳에 달하는 점포 중 기존 점포가 30여 곳, 비어 있던 17곳엔 청년 상인들이 새로 입주했다고 한다.

    첫 번째 흔적. 1913송정역시장과 금남로 광주천의 예스러운 간판들

    1913송정역시장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나 필자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글자들이었다. [격동굴림], [청류], [배달의민족 도현체] 등 네모틀 복고풍 서체가 양편에 늘어선 가게 간판을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리모델링된 서체가 아닌 원래 서체 흔적이 간간히 보여 흥미로웠다.

    상훈고추상회 간판의 경우 [배달의민족 도현체]를 쓰되 ‘추’자만 레터링으로 표현했다. 줄기를 좌우로 늘어뜨린 갈래지읒이 전형적인 옛날 간판의 시각 문법을 따르고 있다. 옛날 아크릴 간판과 현대 간판이 동시에 달려 있는 지업사(紙業社)도 눈에 띄었다. 연대가 다른 글자들이 뒤섞인 모습이 보기 나쁘지 않은데, 간판에 복고풍 서체를 주로 쓰기보다 원래 있던 글자를 재해석해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윤디자인 2002체(Yoon 2002)]가 아이덴티티의 주를 이룬 광주지하철 1호선을 타고 양동시장에서 내려 금남로 방면으로 산책했다. 광주천을 따라 늘어선 시가지 곳곳에 수집할 만한 글자가 숨어 있다. 대도시지만 한꺼풀만 벗겨 보면 기록할 글자가 많았다. 붓글씨로 된 아파트 문주, 둥근고딕 형식으로 칠한 아파트 외벽 글자와 공업사 간판 등이 그렇다. 대량 철거를 앞둔 누문동 재개발 구역에선 보통의 맨홀에서 보기 힘든 붓글씨로 된 소화전 맨홀을 만날 수 있었다.

    광주지하철 1호선의 안내판 글자들
    광주천 인근 시가지 곳곳의 글자들

    근처 광주공원 앞을 지나다 보면 해치상 밑에 있는 해태제과 로고타입도 눈에 들어온다. 1986년부터 쓰인 모서리를 둥글린 로고타입이 아닌 각진 양식인 것으로 볼 때 그 이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해태제과가 기증한 해치상이 여기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프로야구팀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타이거즈)’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해태제과는 광주와의 연고가 아주 강한 회사는 아니었지만 금호고속 등 다른 기업의 고사 끝에 결국 호남 지역 연고권을 얻어 해태 타이거즈라는 팀명으로 1982년 프로야구 원년부터 참여하게 되었다. 무등야구장을 홈 경기장으로 삼아 1980년대 호남인들의 한을 달래 주었다는 타이거즈. 한국 프로야구 무대에서 존속했던 20시즌 중 9시즌을 우승한 명실상부 20세기 KBO의 최강 팀이었다.

    광주공원 해치상의 해태제과 로고타입

    점점 풀리고 있는 코로나19 관련 거리 두기 조치를 증명이라도 하듯 동명동 카페 거리는 주말 휴식을 즐기러 나온 연인들과 친구들의 행렬로 붐볐다. 많은 로컬 카페들이 글자를 주요 소재로 한 독창적인 아이덴티티를 확립한 모습이 인상 깊었다. 소재가 로만 알파벳 위주의 일부 문자에 편중되어 있는 점은 아쉽지만 서체 디자이너들이 큰 역할을 맡아 차근차근 만들어 나가면 될 일이다. 필자는 한글을 주로 활용할 수 밖에 없는 디자이너지만 무조건 한글 전용보다는 여러 문자가 공존하는 다채로운 거리 풍경을 꿈꾼다.

    선선한 바람과 함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쪽으로 걸어 내려와 옛 전남도청 분수대 앞에서 첫날 산책을 마무리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위쪽에 조성된 잔디밭은 물이 없는 것을 빼면 마치 한강시민공원 같은 훈훈한 분위기다. 나중에 일행과 다시 와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두 번째 흔적. 옛 전라남도청과 전일빌딩245의 탄흔

    전날과 마찬가지로 햇살이 따가울 정도로 밝았다. 옛 전라남도청 앞에 다시 내려 건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단정한 대칭을 이루는 정면으로 관공서에 요구되는 디자인을 무난하게 충족시키고 있다. 새하얗게 빛나는 흰 외벽이 밤에 볼 때와는 또 다른 인상을 준다.

    옛 전남도청 본관과 그 옆 별관 회의실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반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조선인 김순하(金舜河, 1901~1966) 선생이 설계했다고 한다. 옛 도청을 둘러싼 일련의 건물군은 지금은 근처 많은 건물이 갖는 에너지에 밀려 소박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일대는 1980년 5·18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입에 맞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시민군 최후의 격전지로 그 중요성이 크다. 정문에 붙어 있는 ‘전라남도청’ 글자도 관공서 앞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붓글씨 기반 양식이지만 건물에 덧씌워진 역사적인 층위를 인식하니 왠지 더욱 비장하게 보인다.

    옛 전남도청 정문 현판
    해당 현판은 복원물이다. 1980년 5월의 탄흔과 함몰이 고스란히 복원되어 있다.
    본래 현판은 공공기록물(행정박물)로서 전라남도 기록관에 보관되어 있다.

    5·18민주광장 시계탑을 거쳐 바로 앞에 있는 전일빌딩245로 발걸음을 옮겼다. 1960년대 후반 처음 준공되어 여러 차례 증축을 통해 지상 10층의 현재 모습이 된 옛 도청 앞 전일빌딩은 지금도 존재감이 크지만 1980년 5·18 광주항쟁 당시엔 그 위치와 높이, 연면적에서 다른 건물이 따라갈 수 없는 광주시내의 대표 빌딩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면서 노후화로 철거 논란도 있었지만 리모델링을 거쳐 2020년 전일빌딩245라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245’는 건물 도로명 주소(금남로길 245)와 함께 1980년 5월 시민을 노린 계엄군의 헬기 사격으로 건물에 남은 245개의 탄흔을 상징한다.(이후 탄흔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전일빌딩245는 5·18 민주화운동 사적지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5·18민주광장 시계탑과 전일빌딩245

    1층 한쪽 벽면에는 축소한 건물 모형과 옛 사진을 보여주는 전일아카이브라는 코너가 있다. 광주일보의 전신 전남일보를 이끌었던 고(故) 김남중 회장이 친필로 쓴 머릿돌과 함께 전남일보·광주일보 시절 쓰던 자모와 그 자모를 바탕으로 만든 각종 크기의 한글, 한자 금속 활자가 전시되어 있다.

    전일빌딩의 ‘전일(全日)’이라는 명칭부터가 ‘전남일보’의 약칭이다. 글자뿐 아니라 코너 제목 등의 작은 그래픽을 위해 만든 활자, 날씨나 스포츠 경기 스코어를 기록하기 위해 만든 특수 활자도 같이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필자의 직업과 깊숙이 관련된 실물 활자를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마주하니 마치 타지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난 듯 반가운 마음이 든다.

    전일빌딩245 전일아카이브
    광주일보가 기탁한 활자판

    8층으로 올라가면 넓고 쾌적한 카페245가 있고 9층에는 5·18 광주항쟁과 관련 있는 인물을 전남도청 분수대, 금남로, 옛 국군통합병원 등을 배경으로 찍은 〈오월 어머니, 그 트라우마 – 김은주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9층과 10층의 나머지 공간은 광주항쟁을 기록하고 이를 둘러싼 뜬소문과 거짓을 상세하게 설명한 설치물이 있으며 옥상에는 ‘전일마루’라는 정원을 따로 조성해 도청 근처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한 가지 맥락. ‘가벼운 서체’로 1980년 5월을 이야기하다

    전일빌딩이 단순 업무용 빌딩이 아니라 ‘전일빌딩245’라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태어나려면 일종의 브랜딩이 필요했다. 여기에 주로 쓰인 것이 [배달의민족 한나체]다. 로고타입과 9층, 10층의 내부 사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로고타입은 중성과 종성을 연결하는 식으로 변형하여 7080 느낌을 더 강조했다.)

    처음에는 유머러스한 맥락에 주로 쓰이는 [배달의민족 한나체]가 이런 엄중한 공간에 있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5·18 관련 도슨트 행렬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옛 이야기를 품은 건물인 만큼 적절한 복고 느낌을 주면서도, 너무 심각하고 적나라한 서체를 써서 학생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으려면 이 정도의 가벼움은 필요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1980년 5월을 ‘가벼운 서체’로 이야기하는 맥락:
    “너무 심각하고 적나라한 서체를 써서 학생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으려면
    이 정도의 가벼움은 필요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가까운 곳에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있다. 옛 광주카톨릭센터 건물에 조성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는 광주항쟁을 둘러싼, 다양한 계층에서 쓰이던 글자들이 망라되어 있다. 계엄군이 광주에서 저지른 참상을 목격한 기자들의 떨리는 수첩 속 손글씨, 사직서의 손글씨, 결의문 속 단정한 손글씨, 시민들의 참여를 호소하거나 의사들이 검안서를 작성할 때 쓰인 타자기 서체,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보도한 신문의 헤드라인 고딕 서체와 본문 명조 서체, 수습을 위해 어깨에 둘렀던 띠의 스텐실 글자, 5·18을 다룬 연극 포스터 속 투박한 글자, 광주에서의 일을 다룬 중요한 기록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소설가 황석영 기록) 표지 속 고딕이 그것들이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이곳에 보관된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들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의외의 발견. 지산유원치 근처의 희귀 글자들

    기록관을 나와 궁동에서 버스를 타고 지산유원지로 올라갔다. 하지만 시설 점검 중이라는 안내를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사실 리프트를 꼭 타고 싶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안전장치가 거의 없지만 사람들은 태연한 표정으로 탑승해 있어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1980년대 리프트 사진이 바로 이곳을 찍은 것이라는 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리프트를 못 탄 것은 아쉬웠지만 유원지에서 동명동 쪽으로 걸어 내려오다가 의외의 간판들을 발견한 것으로 약간의 보상을 받았다. 예를 들면 견고딕을 연상시키는 단단한 글자틀에 아랫부분이 열린 미음[ㅁ], 피읖[ㅍ], 그리고 아랫부분에 곡선이 들어간 티읕[ㅌ]이 한데 섞여 색다른 인상을 주는 세탁소 간판이 그렇다.

    지산유원지를 내려오며 발견한 어느 세탁소의 간판

    두 그루 나무 사이에 있는 ‘지연의상실’ 간판은 두 가지 면에서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일단 파스텔톤 색상이 눈에 확 들어온다. 그리고 1990년대 초중반에 유행한 조합형 탈네모틀 서체로 돌출 사인을 만든 점도 독특하다. [휴먼굵은팸체]로 추정되는데 확실하진 않다.

    일반적으로 이런 양식의 돌출 사인은 손으로 그렸거나 잘라 만든 원시적인 서체가 많다. 그러니까 구현된 수단(아날로그)과 그 위에 올라간 서체(디지털)의 연대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희귀한 간판이다. 아마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더라면 두고두고 떠올랐을 것이다.

    지연의상실 간판

    여담으로 유원지에 가기 위해 궁동에서 버스를 탔는데, 정류장 바로 앞에 있는 모 학원 건물이 광주항쟁 당시 전소된 광주MBC 건물이라 한다.(현재 광주MBC 건물은 남구 월산동에 있다.) 아니 바로 저 앞에서 유원지 가는 버스를 탔는데! 해골물을 모르고 마신 원효대사의 심정이 되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건물 주변을 한 번이라도 더 돌아볼 것을···. 인터넷 로드뷰로 다시 보니 방송국 시절 쓰였을 송출 안테나가 건물 옥상에 그대로 있다. 물론 용도가 전혀 바뀌어 안에 들어가 본다거나 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의 미련은 남는다.

    ‘전라남도청’ 글자 해석과 파생

    옛 전남도청 정문 앞에 붙은 현판 글자는 과거 공기관·기업 등에서 유행했던 붓으로 쓴 세로 현판 글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낯설지 않은 동시에 이 글자만이 갖고 있는 특징도 분명 존재한다. 그 DNA를 한번 짚어보자.

    ▷ 세로쓰기로 되어 있으며 획의 시작과 끝이 뭉툭한, 두꺼운 붓으로 써내려간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종이에 쓴 것이 아니라 금속판에 구현됐고 세월이 많이 지났다는 특성상 자세히 보면 군데군데 잘리거나 마모된 모서리가 눈에 띈다.

    ▷ [전]의 초성 지읒[ㅈ], [라]의 중성 [ㅏ] 곁줄기, [청]의 초성 치읓[ㅊ] 등 전체적으로 무게중심이 아래쪽으로 내려온 모습이다. 중성 세로기둥은 이에 대비되어 더욱 높아 보인다. 이는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흐름을 중시하는 많은 세로쓰기 서체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기울기이기도 하다.

    ▷ [전]의 초성 [ㅈ], [청]의 초성 [ㅊ] 등 지읒 꼴이 꺾임지읒으로 되어 있다. 두꺼운 획이 예각을 이루며 급격하게 꺾이다 보니 획이 뭉쳐 안쪽이 두꺼워진 모습이다.

    ▷ [라]의 초성 리을[ㄹ], [남]의 초성 니은[ㄴ]에서 보이듯 획이 밑으로 뻗다가 오른쪽으로 치고 올라갈 때 큰 돌출부가 생긴다. 이는 부드럽게 회전하지 않고 힘을 주어 확 꺾었음을 암시하며, 원본 서체를 쓴 인물의 평소 쓰기 습관을 짐작하게 한다.

    ▷ [전]과 [청]의 중성 [ㅓ] 세로 곁줄기가 얇게 시작해서 점점 넓어지며 세로 기둥과 연결되고 있다. 보통 명조 폰트에선 넓었다가 좁아지면서 연결되지만 여기서는 거꾸로다.

    ▷ 초성이 중성과 연결될 때 획의 강약 변화 없이 바로 이어지는 경우[라]와 강약 변화를 갖고 연결되는 경우[남]가 섞여 있다.

    ▷ 전체적으로 왼쪽이 낮고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올라가는 기울기를 갖고 있는데, 유일하게 중성 세로 기둥이 없는 [도] 역시 이런 습관을 따라 초성 디귿이 기울어져 있다.

    ▷ [전]의 초성 [ㅈ]과 [청]의 초성 [ㅊ]에서 보이듯 왼쪽으로 뻗는 빗침이 왼쪽으로 거의 45도에 가까운 각을 이루며 돌출되어 있다.

    ▷ 중성 세로 기둥이 상당히 길어, 종성이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전]의 [ㄴ]과도 거의 닿을 듯하며 [남], [청] 등 보통 높이의 종성과는 예외 없이 연결되고 있다.

    ▷ [청] 종성을 보면 원래 서체에는 이응의 상투에 해당하는 윗부분이 좀더 또렷했겠지만, 동판으로 구현되는 과정에서 상당히 마모되어 거의 작은 턱처럼 미미한 요소로 변했다.

    DNA를 분석했다면 한글 파생 원리에 의해 다른 낱자도 만들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전라남도 광주의 글자발견 오월의 빛이 이 땅에 내릴 때까지’라는 견본 문자열을 파생해 보았다. ‘오월의 빛이 이 땅에 내릴 때까지’라는 문구는, 전일빌딩245에서 진행 중인 〈오월 어머니, 그 트라우마 – 김은주 사진전〉 방명록에서 본 문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고른 것이다. 더 다듬을 수 있는 요소도 있었지만, 투박하거나 거슬리는 면이 있더라도 조형적으로 치명적인 오류가 아니라면 원본 느낌을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그쳤다.

    세로쓰기로 된 오리지널 전남도청 현판 글자는 가로쓰기로 그대로 옮기면 좌우 글자폭이 800유닛(Unit) 이하로 상당히 좁아진다. 안 될 것은 없지만, 현재 대부분의 한글 폰트가 최소 900유닛 이상의 글자폭을 지닌 것과 비교할 때(일부 손글씨·캘리그래피 폰트 제외) 텍스트가 길어지면 숨이 찰 수도 있다.

    따라서 적당히 균일하게 보이도록 880유닛으로 넓혀서 조정했다. 처음부터 여러 모임꼴이 뒤섞인 문자열을 만들어야 할 때는 가까운 모임꼴이나 관련 자소가 있는 낱자부터 풀어 나가는 편이 쉽다. 이번에는 오-지-자-이-의-주-견-에-내-때-까-땅-발-글-릴-월-광 순서로 작업했다.

    일단 받침이 없는 글자를 주로 파생하면서 초성 상하좌우 위치와 세로 기둥 위치를 비슷한 꼴끼리 맞춘 다음(오, 지, 자, 주, 이, 의), 쌍자음과 이중모음을 가진 복잡한 글자의 초·중성 위치를 정했으며(에, 내, 때, 까), 받침이 있는 글자를 작업했다(땅, 발, 글, 릴).

    이를 바탕으로 가장 복잡한 섞임모임꼴 받침글자를 만들었다(월, 광). 주요 글자의 파생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견본에 없는 글자라도, 아래 설명을 보면서 이유를 추측해 보거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석·응용한다면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옛 전남도청 현판 글자를 바탕으로 파생한 견본 문자열
    〈오월 어머니, 그 트라우마 – 김은주 사진전〉에서 본 문구를 옮긴 것이다.

    ▷ [오]

    [청]의 이응[ㅇ]에서 초성을 가져왔다. 초성과 중성이 종성을 강하게 누르고 있는 [청]과 달리 [오]에서는 [ㅇ]이 주인공이다. 세로모임꼴 초성은 시각적 중앙에 놓여야 하므로 이응을 중앙에 놓고 크기를 키워 준다. 중성 [ㅗ]는 [도]에서 가져왔다.

    ▷ [지], [자]

    [ㅈ]의 디자인은 [전]에서 가져오되, 아래로 내리면서 좌우로 크기를 키웠다. 종성 자리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세로 기둥 대비 [ㅈ]의 높이는 [라]를 기준으로 정렬되도록 했다. [자]의 [ㅏ] 곁줄기 모양은 [라]의 [ㅏ]에서 가져왔다.

    ▷ [이], [의]

    [이]의 초성 [ㅇ]은 [오]에서 가져오되 좌우 폭을 줄였다. 거칠 것이 없었던 [오]와 달리 [이]에서는 오른쪽의 세로 기둥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좌우 폭만 줄이면 위아래로 길쭉하게 변해 고유 아이덴티티가 훼손될 수 있다. 이에 맞춰 위아래 길이도 줄여줌으로써 정원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했다. 크기가 줄었는데 두께가 그대로면 획이 뭉쳐 보인다.

    [ㅇ]의 네 방향 획 두께를 평균 10유닛 가량 줄였다. [의]는 밑에 획이 하나 더 생기는 만큼 [이]보다도 [ㅇ]이 줄어들었다. 이음보는 [남]의 [ㄴ]을 바탕으로 앞부분에 평균적인 붓글씨 획 느낌을 더해서 만들었다.

    ▷ [에], [내]

    [에]의 초성 [ㅇ]은 [이]에서 가져왔다. [이]의 [ㅇ]보다 왼쪽으로 약 10유닛 더 나가면서 상하좌우 크기와 두께를 줄였다. 중성 [ㅔ]는 [ㅣ]보다 더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한다. [ㅔ]의 맨 오른쪽 기둥이 [ㅣ]보다 오른쪽으로 더 나가도록 위치를 잡아 준다. 여기서는 30유닛 정도 더 나간다. 너무 많이 나가선 안 된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글자폭이 들쭉날쭉하면 나중에 서체를 완성했을 때 자간이 불규칙해지기 때문이다.

    [내]의 초성 [ㄴ]은 [남]에서 가져오되, 종성이 없으므로 아래로 내리고 위아래 높이를 늘려 준다. 초성 정렬 위치는 [에]를 기준으로 한다. [내]의 세로기둥 두 개 중 오른쪽 기둥은 [에]의 오른쪽 기둥과 마찬가지 위치로 고정시키고, 왼쪽 기둥은 왼쪽으로 당겨 준다. 곁줄기가 오른쪽으로 누르고 있는 [ㅔ]와 달리 [ㅐ]는 기둥 사이의 곁줄기가 기둥을 밀어 내려는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 [때], [까]

    [때]의 초성 쌍디귿[ㄸ]은 [남]의 [ㄴ]을 바탕으로 위쪽에 가로획을 더해 제작한다. 다만 원본 [도]의 디귿[ㄷ]을 참조해 너무 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획이 밀집되므로 세로획의 두께를 얇게 보정해주고, 중성 [ㅐ]와 맞닿는 부분은 [남]에서 [ㄴ]과 [ㅏ]가 맞닿는 부분을 참조하면 된다.

    두 디귿이 합쳐지는 부분에서, 획이 꺾이는 부분의 돌출부를 둘 다 강조하면 획이 뭉치므로, 왼쪽 [ㄷ]만 돌출부를 과장해 표현하고 오른쪽 [ㄷ]은 돌출부를 없애 깔끔하게 결합시켰다. 중성 [ㅐ]는 [내]의 [ㅐ]를 기본으로 하되 [ㄸ]과 비슷한 수준으로 기둥 두께를 줄이고, 공간 확보를 위해 오른쪽으로 약간 더 밀어낸다. 여기서는 5유닛 더 밀어냈다.

    [까]의 초성 쌍기역[ㄲ]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초성 [ㅈ]에서 내리점을 제거하여 디자인한다. 왼쪽 기역[ㄱ]을 작게, 오른쪽 [ㄱ]을 크게 만듦으로써 원근감을 주는 것이 포인트다. 세로기둥은 [자]를 기본으로 하되 더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하기에 오른쪽으로 약간 밀어야 한다. 여기서는 20유닛을 밀어냈다. 이것은 견본 수치일 뿐 구체적 수치는 디자이너의 감각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 [발]

    [발]의 비읍[ㅂ]은 없는 자소라 새로 제작해야 한다. [남]에서 비슷한 미음[ㅁ]을 가져와 위쪽을 터서 다듬는다. [ㅁ]과 [ㅂ]은 비슷하지만 획의 전개가 다르다. [ㅂ]은 [ㅁ]과 달리 독립적으로 선 두 개의 기둥을 갖는다. 획의 시작 부분은 세로기둥을 참고하되 조금 더 작게 만들어야 한다.

    가운데 가로획은 터서 디자인했는데,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지만 획의 뭉침을 방지하려는 선택이다. 세로기둥 위치는 [남]의 [ㅏ]를 기본으로 하되 [ㄴ]보다 [ㅂ]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므로 오른쪽으로 약간 밀어 준다. 여기서는 12유닛 더 밀어냈다.

    종성 [ㄹ]은 [ㄴ]을 바탕으로 제작하되, [ㄴ]에서 볼 수 있었던 사선 획은 삭제하고 아랫부분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ㄴ]과 완전히 통일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아무래도 낱자 전체의 안정성이 떨어져서 [ㄴ]에서만 사선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규칙으로 정했다. 이는 디자이너에 따라 다르게 만들 수 있다.

    ▷ [월], [광]

    [월]의 초성 [ㅇ]은 [의]에서 가져오되, 상하좌우 크기와 두께를 더욱 축소시킨다. 주의할 점은 [ㅇ]의 위치가 세로기둥 높이보다 높아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서체는 전반적으로 초성이 낮고 중성이 높아, 오른쪽으로 치솟은 기울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데 그것을 깨게 된다. 최대한 넘어가지 않는 쪽으로 해야 한다.

    중성 [ㅝ]는 획을 왼쪽으로 뻗어서 붓글씨 특유의 시원한 맛을 살림과 동시에 [ㄱ], [ㅈ]의 모티프와 연결시켜 아이덴티티를 강화했다. 종성 [ㄹ]은 [발]을 기본으로 하되 높이를 낮추고 가로획 두께 역시 줄였다. 더 복잡한 자소들을 받치는 만큼 좌우 너비도 넓어져야 하는데 여기서는 20유닛 넓혔다. 그 이상의 과한 보정은 낱자 전체의 일관성을 해칠 수 있기에 권장하지 않는다.

    [광]의 전체적인 틀은 [남]을 기본으로 했다. [청]에서 종성 [ㅇ]을 가져와 위쪽으로 키웠고, [의]에서 이음보를 가져왔다. 다만 두께는 [의]보다 복잡한 만큼 줄여 주었다. 종성을 제외한 위쪽 [과]에선 세로획 세 개가 맞물리며 교차하는데, 각자 자기 주장이 강하면 뭉쳐버리므로 각각의 두께를 줄여주어야 한다.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얘기를 한 번 더 하며 이번 여행을 마무리해보려 한다. 기록관 1, 2, 3, 6층에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고, 특히 6층에는 윤공희 ‘빅토리노(Victorinus)’ 대주교의 광주카톨릭센터 집무실이 복원되어 있다. 1980년 당시 천주교 광주대교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는 광주항쟁의 피해자와 그 가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다. 필자는 나름 현대사에 관심이 많다고 자부하는데도 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집무실에 놓인 원고지와 안경, 만년필을 바라보며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속에서, 그리고 그 자신의 안위까지 장담할 수 없는 역사의 무거운 소용돌이 속에서 종교인으로써 어떤 심정을 지녔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6층 ‘윤공희 대주교 집무실’에 전시된
    윤공희 대주교의 육필 원고와 필기구

    윤공희 대주교는 2022년 5월 무등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유대인이 강도 만나 길에 쓰러져 있는데 사제마저도 못 본 체 지나간 것을 원수지간인 사마리아인이 구했다는 내용의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 모습이 꼭 그 이야기 속 사제 같았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삶과 죽음의 문제가 눈 앞에 닥치면 누구나 살아야겠다 생각하지 죽는 쪽으로 가려는 사람이 있을까?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화무십일홍에 불과한 잠깐의 권력을 위해 정당한 절차를 무시하고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했던 신군부와 수하들이지 그 자신이 아니라는 말을 외람되지만 꼭 전하고 싶다.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산돌을 거쳐 ㈜티랩에서 근무했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 등에 글을 기고했으며 서울시립청소년미디어센터, 온라인 플랫폼 클래스101, 이도타입에서 서체 디자인을 가르쳤다.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donghoonha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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