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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민준의 서(書) #3 한글 고전 서체 이야기 ‘판본고체’

    서예가 오민준의 캘리그래피 시론 ― 한글 고전 서체로 꾀하는 다양한 자형의 감성 표현 ① 판본고체


    글. 오민준

    발행일. 2012년 12월 24일

    오민준의 서(書) #3 한글 고전 서체 이야기 ‘판본고체’

    얼마 전 한국 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주관으로 ‘한국 캘리그래피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캘리그래피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자리였으며, 아울러 한국 캘리그래피의 현주소와 전망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더 많은 세미나와 전시회 등 캘리그래피 문화 발전을 위해 협회는 물론 각계각층 관계자들의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하고 싶다. 세미나의 강연자들은 자신이 준비한 자료를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였고, 성심성의껏 열의를 다해 발표했다. 강연자들의 발표 내용 중에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한글의 자형 원리에 대한 부분이었다. 한글 창제 원리, 한글 고전 자료, 한글 발음에서의 표현 방법, 자연 풍경 사진 등 접근하는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강연자 모두 한글 자형 원리와 더불어 감성 표현 방법에 대해 중요하게 인식하고 설명했다.

    캘리그래피의 특징인 감성 표현을 위해서는 한글 창제 원리인 천지인에 대한 이해와 한글 고전 자료의 서체와 서체적 발달 과정에 대한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양한 감성표현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한글 서체에 대한 이해는 다양한 자형 표현과 글꼴의 변화를 만들 수 있으며 이것은 감성 표현으로까지 연결된다. 서체는 그 시대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면서 그것이 기록된 소재나 목적에 따라 다른 형태로 쓰이게 된다. 특히 사회가 급변하고 문화가 발전하면서 시대는 더 빨리 쓸 수 있는 형태의 글씨체를 요구하며 발전되는데 그것은 인류가 문자를 사용해 온 이래 계속된 일이다. 한글 서체 또한 당시 시대적 상황의 필요에 따라 변화, 발전하였으며 크게 판본과 필사본으로 구분되며 판본은 판본고체와 판본필사체, 필사본은 궁체와 민체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한글 창제 당시의 서체는 판본체이다. 판본의 서체는 목판 또는 활자 등의 인쇄 방법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창제 초기의 딱딱하고 정형화된 자형인 판본고체와 점차 필사의 필요와 한글 보급이라는 국책의 영향으로 실용적이고 일반화되면서 점획이 필사형의 유려한 맛을 지니게 되는 판본필사체로 분류할 수 있다. 판본고체는 창제 당시 민중 생활에 그다지 실용화되지 못했으며 주로 간행이나 언해 사업의 실용적인 목적으로 이용됐다. 판본고체는 <훈민정음해례>와 <훈민정음>을 창조하고 반포한 후의 것으로 붓글씨의 필의가 없고, 현대 고딕활자의 모습과 비슷한 자형을 나타내고 있다. 자형이 수평을 유지하고 행간은 물론 글자 간의 간격이 거의 일정하며 비교적 글자의 중심을 맞추려고 한 특징이 있다. 필법은 한문 전서의 필법으로 점획의 굵기가 거의 일정하고, 필획의 가로획과 세로획은 수직과 수평을 이루며 글자모양에 따라 길이가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자형은 방형을 이루어 전체적으로 중후한 느낌이 나타나며 <훈민정음해례본>,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등이 판본고체에 해당한다.

    판본고체의 고전 자료 읽기

    훈민정음해례본

    <훈민정음해례>는 1443년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나온 한글 최초의 문헌으로 본문은 언해로 되어 있으며, 한글 반포 당시의 글씨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가 된다. 국보 70호로 지정된 유일본으로 <월인석보>의 권두에 실려 전하고 있다. 글씨체는 간결하여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 정방형의 틀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아 글자의 넓이가 대체로 일정하고 점획의 굵기 변화 또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점획이 단순하여 표현의 기교가 보이지 않으며 전서의 필법인 원필로 쓰여 있다. 가로획과 세로획의 점을 둥근형의 점으로 찍어 모음을 표현한 특징이 있다.

     [좌] 용비어천가  [우] 동국정운

    <용비어천가>는 목판본으로 한글 가사와 한문 번역 시로 모두 12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음은 <훈민정음해례본>과 같고 모음 아래아(ㆍ)는 둥근 형의 점으로 쓰였으나, 그 외의 모음에서는 점이 획으로 변하였다. <훈민정음해례>에서의 원필이 <용비어천가>는 방필로 변화되었고, 정방형의 일률적인 형태에서 정방형과 장방형의 형태가 다양하게 나타나 글자의 대소관계가 생겨 글씨체가 강건한 형태를 보이게 되었다.

    <동국정운>에서는 한자의 음운을 한글로 표기하였다.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중국 운학의 체계에 맞추어 정리하였다. 서문은 1447년(세종 29년)에 쓰였으며, 실제 간행은 <세종실록>의 기사에 의하여 1448년(세종 3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글의 자형은 훈민정음의 표기 방법과 동일하며 모음의 점획 또한 점으로 표현하였다. 한자의 서체는 <훈민정음해례>와 <용비어천가>가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단정한 해서의 자형에 약간의 행기가 있는 유려한 서체에서 <동국정운>에서는 외형이 정, 직사각형의 자형을 이루고 있고, 행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딱딱하고 답답한 느낌을 주고 있다.

     [좌] 석보상절  [우]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은 세조가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석가의 일대기이다. 다른 언해와 달리 한문의 원문이 없고 국한문으로 된 국어의 산문으로 간행연대는 1447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체는 <용비어천가>와 비슷하며 본문의 한글은 큰 글자로 썼고, 한자 아래에 한자의 절반 크기로 작게 한자음을 한글로 썼다. 큰 글자는 정방형으로 획이 굵고 비율이 일정한 자형을 취하고 있으며, 작은 글자는 장방형으로 획이 가늘다.

    <월인천강지곡>은 활자본으로 수양대군이 지은 <석보상절>을 보고 석가의 공덕을 칭송하여 세종이 지은 가사이다. <월인석보>에 편입되어 간행되었는데, 간행연대는 <석보상절>과 같은 1447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한글 표기 위주로 한자를 협주한 것으로 한글 전용이 행해진 최초의 문헌으로 일컬어진다. 전체적인 자형은 정사각형으로 획의 굵기가 일정하고 자음은 <훈민정음>과 비슷하며 모음은 점이 획으로 변하고 글씨의 대소가 나타나고 있다.

     판본고체 자형비교 [왼쪽부터] 훈민정음해례,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판본고체는 모두 <훈민정음해례>와 유사한 자형으로 정방, 장방형의 사각의 틀 안에서의 변형으로 간결하고, 획의 굵기가 일정한 수직ㆍ수평의 직선 위주의 획의 형태여서 단순한 느낌을 주지만 전체적으로 강건하고 중후한 느낌을 준다. <훈민정음해례>는 원필로 모음에서 아래아(ㆍ) 뿐만 아니라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의 상하의 점획을 모두 둥근 점으로 표현하여 점부분이 강조되어 두드러져 보인다. <동국정운>도 모음의 점획을 점으로 표현하였지만 강조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등에서도 아래아는 점으로 표현되고 있다. <훈민정음해례> 이후의 글씨들은 원필에서 방필로 변하고 점이 획으로 변하였다. 이것은 판각에 대한 편리, 다시 말해 글씨를 새기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함일 것이다. 한자의 서체 변화에서도 나타나는데 원필의 전서가 방필의 예서로 변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미 한문서체가 정립된지 800~900년이 지난 후에 만들어진 한글이기에 서체변화가 바로 나타났다고 보인다.

    최초의 한글 서체인 판본고체가 만들어진 배경은 무엇일까?

    (1) 세종실록에는 한글 서체에 전서의 필법을 사용했다는 내용이 있다. 세종실록 권102, 권103, 세종 25년, 26년에 ‘其字倣古篆’, ‘字形雖倣之篆文’ 등에서 전서의 필법을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전서의 서체가 거의 쓰이지 않았던 시대이다. 하지만 전서가 갖는 장식적인 구성과 엄격한 결구, 그리고 뛰어난 조형미감은 왕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기에 알맞은 서체이기 때문에 전서의 자형과 필의가 쓰이게 된 것이다.

    (2) 진시황제가 전국을 통일하고 가장 먼저 문자 통일을 하게 되는데, 그 글씨의 서체가 정형화된 소전의 전서였다. 이러한 사항들을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한글창제의 서체를 최초의 문자 통일의 글씨인 간결한 소전의 전서체와 같이하여 중국과의 대등함과 조선의 권위와 위엄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3) 많은 왕들이 북진정책을 했으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때의 광활한 우리의 영토회복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는 비석의 크기만으로도 고구려의 위엄과 기상을 느낄 수 있고, 역사적, 서예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를 취했을 가능성이 크다. 세종실록에 ‘其字倣古篆’에서 ‘古篆’은 단순히 옛 전서만을 의미할까? <광개토대왕비>는 전서와 예서의 과도기적 서체로써 ‘고예’라고 일컬어지는데, 대부분의 형태가 정방형을 취하면서도 자유스런 자형과 강건한 필의를 느낄 수 있다.

    창제 문자로서의 숭엄미, 존엄미 그리고 왕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기에 가장 알맞은 서체를 찾기에 많은 고심을 했을 것이다. 전서체는 엄격한 결구에서 느껴지는 조형미가 뛰어나기 때문에 창제문자의 서체로써 선택된 것이며, 조선의 위엄과 기상을 <광개토대왕비>의 서체와 필의를 통해 보여주려 했을 것이고, 중국 전국을 통일하고 문자 통일을 한 진시황제와 대등한 존재감을 나타내고자 했을 것이다.

     중국 진시황제의 문자통일 서체인 전서(소전)  [좌] 태산각석(219년)  [우] 역산각석(219년)

    진시황제가 중국 천하를 통일하고 가장 먼저 문자를 통일하게 된다. 전서는 ‘대전’과 ‘소전’으로 구분하는데 ‘대전’이라함은 상형문자에 가까운 서체를 말하며 글씨체와 자형이 자유롭다. 소전은 위의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형태는 장방형으로 선의 굵기가 일정하고 글씨의 간격과 공간이 일정하여 정형화된 서체이다.

    판본고체와 광개토대왕비의 자형비교  [좌] 판본고체 자형비교  [우] 광개토대왕비(414년)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 3년(414년)에 세워진 비로 각 면의 넓이는 1.3~2m 사이이며 높이는 6.34m이고 무게는 약 37톤에 달한다. 이와 유사한 크기의 비는 아직 알려진 예가 없으며, 고구려의 국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자형은 정방형 또는 장방형의 형태로 고구려만의 독창적인 조형미를 느낄 수 있으며, 일부를 의도적으로 강조한 자형 등 장중함과 위엄을 느낄 수 있다. 서체는 전서에서 예서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형태로 원필 전서의 필의가 보인다. 판본고체의 서체와 필법을 비교해 보면 상당 부분 비슷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오민준
    현재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에서 대학정통서예를 공부한 후 신고전주의 캘리그라피/서예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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