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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 디자이너 겸 캘리그래퍼 안병국

    디지털 전문가의 아날로그적 지론 “사용되지 않은 아날로그 소스는 새로운 크리에이티브를 만든다.”


    인터뷰. 임재훈

    발행일. 2012년 04월 30일

    웹 디자이너 겸 캘리그래퍼 안병국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조화를 강조하는 인문학적 담론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는 두 용어를 섞은 ‘디지로그’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이처럼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날로그는 화두 같은 것이다. 디지털을 창조한 인간은, 모순적이게도 결코 디지털화될 수 없는 탓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기계적인 디지털과 인간적인 아날로그의 융합을 연구 중이고, 그 과정에서 디지로그(Digilog)라는 말이 등장했다.
    
    10년 넘게 웹 디자이너로 살아온 안병국 역시 디지로그를 추구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가 지향하는 것은 이른바 “손때 묻은 디지털”이다. ‘손때’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런 풀이가 나온다. ‘오랫동안 쓰고 매만져서 길이 든 흔적. 손을 대어 건드리거나 만져서 생긴 때.’ 그러니 안병국의 디지털에는 손이 빠질 수 없다. 하물며 손글씨인 캘리그래피를 하고, 손으로 빚는 도예까지 배우는 그이다. 과연 안병국은 어떤 손때를 묻히며 웹 디자인을 주조하고 있는 걸까.
    ▲ 2011년 6월 <사랑, 손글씨로 나누다> 전시 출품작
    [왼쪽부터] <얼굴>, <도쿄>
    ▲ 전통 소재 이미지 포스터 <Image of Korea>
    [왼쪽부터] <꽃담>, <단청>, <아름다운 한글>

    “글자는 정보에 불과하지만, 서체는 목소리이다.”

    안병국, 『폰트클럽』 주최 〈2011 타이포 세미나〉 강연 중

    웹 디자인 영역에서 그 ‘목소리’는 어떻게 나오나?

    디지털 세계에선 텍스트가 주된 의사소통 도구이다. 기계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이게 디지털의 단점인데,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감정을 실어 메시지를 보내도, 수신자 입장에선 그저 무미건조한 텍스트만을 읽게 되는 거다. 하지만 사용자가 자기감정에 맞는 서체를 선택할 수 있다면 단순한 텍스트에도 목소리가 실리게 된다. 이렇게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타이포의 힘이 아닐까. 이 힘은 디지털 시대의 단점을 보완해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웹 디자인 역시 단지 정보 전달의 차원이 아니라, 고객들에게 감성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거는 방향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요즘 캘리그래피가 범용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감성 마케팅이란 것이 등장한 이후로 많은 클라이언트들이 캘리그래피를 원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캘리그래피가 자주 사용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아직까지는 한글 타입이 충분히 개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장난스럽게 쓸 수 있는 가벼운 타입들은 많다. 하지만 정작 웹 디자인에 사용할 만한 무게 있고 진지한 한글 타입들은 찾기 어렵다. 적절하게 선택할 수 있는 타입의 개수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캘리그래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국내 사이트들에 영문 타이포그래피가 많이 쓰이는 이유도 한글 타입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아무래도 (한글 타입에 대한) 선택의 폭이 좁다 보니까 그런 경향이 나타나는 것 같다. 한글 텍스트를 다양하고 세련미 있게 표현해줄 한글 타입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거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더욱 캘리그래피가 범용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현장에서 상용화될 수 있는 좋은 한글 타입들이 많이 개발되어야 한다.

    일각에선 캘리그래피가 남용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캘리그래피는 원래 서예가들을 주축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점차 트렌드가 되면서, 너도 나도 쫓아가게 된 것이다. 이런 탓에 요즘의 캘리그래피는 글자가 가져야 하는 심미성 같은 부분들이 무시되기도 한다. 어느 정도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부정적으로만 볼 수도 없을 것 같다. 캘리그래피 남용에 대한 문제 인식이 오히려 디자이너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로 하여금 한글 타입 개발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해주지 않을까. 일례로 캘리그래피가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웹 디자이너들은 타입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 없이 그저 마케팅과 연관된 적절한 타입만을 골라 사용했다. “타입은 나와 별개”라고 얘기하던 웹 디자이너들도 있었다. 그랬던 이들이 이제는 캘리그래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타입도 연구하게 되었다. 실제로 최근에 타이포그래피 세미나를 진행해보면 웹 디자이너들의 참석률이 높다.

    ▲ 한글의 ‘천지인(天地人)’ 정신을 형상화한 포스터 
    [왼쪽부터] <천>, <지>, <인>
    ▲ 점차 사라지고 흐려지는 것들을 형상화한 포스터 <나눔과 기억>

    “모두가 잠든 새벽에 나는 여전히 집 앞 쓰레기 분리수거함을 서성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버려진 잡지들을 줍기 위해서이다.”

    안병국의 저서 『대한민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남기』(2008) 중

    스튜디오 안에 주워온 물건들이 많더라. 원래 줍는 걸 좋아하나?(웃음)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학생 시절엔 좋은 디자인을 하고 싶은 열망이 컸다. 남이 버린 거라도 더 많이 보고 배우려는 욕심이 있었다. 버려진 것들이 나한테 디자인적으로 큰 재산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길거리가 나에겐 보물창고였던 셈이다. 그래서 잡지를 줍기 시작했다. 책 살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웃음). 새벽에 아파트 부근을 돌면서 괜찮은 잡지들을 줍고, 집에 돌아와서는 스크랩을 했다. 그게 나에겐 일종의 놀이였다. 별로 창피한 줄도 몰랐고. 아, 낮에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에게 이상한 녀석으로 오해받은 적이 있긴 했다(웃음).

    지금도 디자인을 ‘놀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클럽 같은 곳에서 춤추는 것을 매우 힘들어한다. 육체노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춤추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그것이 재미난 ‘놀이’ 아닌가. 내게 그 놀이는 디자인이다. 게다가 이 놀이를 하면 돈을 벌 수도 있다.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나에겐 가장 큰 가치이다.

    웹 디자인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군대에서 만난 어떤 선임과의 인연 덕이다. 전역 후에 그 선임을 만났는데 내게 홈페이지를 만들어본 적 있냐고 물었다. 대학교 수업 시간에 한 번 만들어봤다고 답했더니, 곧장 자기와 함께 일하자고 제안하더라. 그렇게 해서 웹 디자인란 걸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실전에 투입되니까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들어갈 디자인을 전부 연필로 그린 다음 이미지 편집 툴 전문가한테 그대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선임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 오기가 생겨서 나 혼자 웹 디자인을 공부했고, 지금의 웹 디자이너가 된 거다. 그 선임과는 이제 연락하지 않는다(웃음).

    ▲ 미디어 아트 작업
    ▲ 분해된 시침을 모티프로 시간과 사람에 대한 기억을 형상화한 포스터 <시간과 기억들(Time and Memories)>

    “디자이너는 좁은 길로 가는 것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안병국, 2099년 ‘MIZ 평생교육원’ 인터뷰 중

    디자이너에게 좁은 길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좁은 길이다. 험난한 길(웃음). 세상에는 두 종류의 디자이너가 있다. 벤치마킹 사이트에 올라온 포트폴리오를 따라하는 디자이너와 따라하지 않는 디자이너. 전자 쪽은 넓은 길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가 먼저 작업해 놓은 것,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트렌드를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하면 되겠군’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좁은 길인 후자 쪽 디자이너들은 남이 해놓은 것들을 기필코 피해간다. 자기만의 것을 만들고 싶어서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디자이너다. 일본에선 디자이너라는 직책을 쉽게 부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인턴 생활 같은 수련 기간을 다년간 거친 사람만을 디자이너로 인정한다는 거다. 그만큼 디자이너에 대한 가치 역시 높이 평가된다. 이미지 편집 툴만 잘 다루면 쉽게 디자이너 명함을 내주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안병국은 어떤 좁은 길을 지나왔는지?

    사실 지금도 힘들다(웃음). 비쥬얼스토리를 설립하기 전에 조그만 벤처기업의 디자이너로 일한 적이 있다. 그곳에 입사할 당시, 큰 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냥 작은 회사를 택했다. 왠지 큰 기업에서는 재미없는 디자인을 하게 될 것 같았다. 나는 무엇보다도 디자인을 통해 보람을 찾고 싶었다. 설령 돈을 조금 받더라도 말이다.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는데(웃음). 벤처기업에서 일할 때 5개월 월급이 밀렸다. 결국 한 달치 월급을 받기는 했지만, 그 돈을 다시 회사에 돌려주고는 퇴사했다. 힘든 시기였음에도 후회는 없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 나중에는 디자인 소재가 되더라. 나는 디자이너가 근본적으로 메신저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이야기를 전하고, 감동을 주는 일이 곧 디자인이다. 좁고 험한 길을 가다 보면 숱한 경험들을 겪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이야기’들이 축적된다. 할 이야기가 많은 디자이너는 그만큼 기발한 디자인 소스를 많이 갖고 있다. 힘든 경험은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게 아니다. 소중하다는 뜻이다. 장인들 손에 굳은살이 생기듯 디자이너들도 마음의 굳은살이 필요하다. 비싼 런닝화를 신은 사람이 꼭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건 아니다. 헌 신발을 신은 사람도 1등할 수 있다. 열악한 조건을 스스로 잘 헤쳐 나가야 한다.

    ▲ <아름다운 한글>
    ▲ [왼쪽부터] <외면(Turn One’s Back)>, <면회(See)>

    “요즘 친구들은 컴퓨터에 의존하는 편이다. 컴퓨터를 뛰어넘는 생각이 필요한데 잘 하지 못한다.”

    안병국, 2011년 『폰트클럽』 인터뷰 중

    컴퓨터를 뛰어넘는다는 건, 아날로그를 지향한다는 뜻인가?

    내가 크리에이티브 강의를 할 때마다 말하는 내용이 있다. ‘사용되지 않은 아날로그 소스는 새로운 크리에이티브를 만든다’라는 것이다. 디자인 소스를 컴퓨터에서 얻는 건, 누군가가 이미 해놓은 걸 ‘검색’하는 거다. 그런 식으로 작업하는 디자이너는 결국 편집자 역할에 머물고 만다. 크리에이터라고 할 수 없다. 컴퓨터를 끄고 주변을 들여다봐라. 모든 것이 디자인 소스이다. 일상에 시선을 돌리는 순간, 디자인이 훨씬 재미있어질 것이다.

    캘리그래피와 도예를 배우는 이유도 아날로그로부터의 크리에이티브 채집을 위해서인가?

    나는 아무래도 웹 디자이너이다 보니 디지털을 잘 안다. 이런 내가 옛 전통기법들을 배워 디지털과 조합한다면, 전혀 새로운 형태의 웹사이트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손때가 묻어나오는 디지털이랄까. 그래서 캘리그래피와 도예에 관심이 많다. 또 다른 이유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클라이언트의 요구대로만 흘러가다 보면 디자이너로서 지치는 순간이 온다. 이럴 때 젊은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이 정말 내 길인가?’ 하는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는 클라이언트잡에서 충족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캘리그래피와 도예 등을 통해 채운다.

    2009년에 첫 번째 캘리그래피 개인전을 열었다. 두 번째 개인전은 언제쯤?

    올해 말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직 주제는 정하지 않았다. 첫 개인전의 주제이자 제목이 ‘관계’였다. 두 번째 개인전도 내 주변과 관계된 것들, 멀리 있는 게 아닌 가까운 것들, 내가 속해 있는 것들에 대한 전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무료 디자인 특강을 진행해왔다. 그 역시 ‘관계’와 관련이 있는 건가?

    나부터가 디자인을 어렵게 공부한 경험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소년소녀가장들에게 마음이 가더라. 그 아이들 중에는 정말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 꿈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디자인계 발전을 생각해본다면 큰 손실이다. 그래서 내 지인들과 함께 꾸준히 그 아이들에게 디자인을 가르쳐주고 있다. 나는 이걸 ‘봉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본업인 디자인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디자인이란, 디자이너 혼자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하는 거다. 디자인은 곧 타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다. 또 디자인이란, 컴퓨터로만 작업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삶을 디자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 <자연이 타이포그래퍼이다(Soil Typography)>
    ▲ 아프리카 아시아 난민 교육후원회(ADRF) 주최로 경기도 의왕시에서 열린 어린이날 행사를 위한 재능기부 캘리그래피
    ▲ <생각도안 두 번째 이야기, 토종> 전시 포스터(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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