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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민준의 서(書) #10 글씨의 표정을 좌우하는 여백(공간)

    서예가 오민준의 캘리그래피 시론 ― 여백은 그저 텅 빈 공간이어서는 안 된다


    글. 오민준

    발행일. 2013년 12월 11일

    오민준의 서(書) #10 글씨의 표정을 좌우하는 여백(공간)

    문자의 구성은 점과 선으로 이루어졌으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글 또한 천지인(ㆍ, ㅡ, ㅣ)으로 상형화 되었다. 선에 대한 비중은 글씨 표현의 전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다. 선의 표현에서 느껴지는 글씨는 여러 표정을 지니게 된다. 캘리그래피의 주 도구인 모필(毛筆)은 탄력이 좋아 필력(筆力)으로 여러 선의 표현이 가능하며 여기에 여백이 더해지면 더욱 다양한 표정을 갖게 된다.

    하얀 종이에 점이나 획을 긋는 순간, 흑과 백으로 나뉘면서 새로운 공간이 탄생한다. 거기에 점과 획이 더해지면서 글씨나 그림이 만들어지며 새로운 구성과 구도가 형성된다. 일반적으로 여백이라 함은 그림이나 글씨가 없는 비어 있는 공간을 말한다. 서예와 문인화, 동양화에서 여백은 비어 있는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여백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글씨가 쓰인 공간을 보완하고, 기(氣)가 충만한 공간이며 감상자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글씨에 있어 선에 대한 비중이 크지만 글씨의 다양한 표정을 연출하는 것은 여백(공간)이다. 어떻게 공간을 연출하느냐에 따라 같은 선의 글자에서도 전혀 다른 표정을 갖게 된다.

    같은 선질(線質)에서 ‘들’자의 공간 변화

    예를 들어 A의 ‘들’ 자가 기본형이라 한다면 B, C, D의 ‘들’ 자는 각각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B, C의 ‘들’ 자는 ‘ㄷ’의 공간을 줄이면서 가로획의 위치 변화를 주었고, D의 ‘들’ 자는 ‘ㄹ’의 ‘ㄱ’ 공간을 크게 하고 전체적으로는 비슷한 공간을 주어 A의 ‘들’ 자와 비슷한 자형을 만들었지만 다른 느낌이다. 글자 안의 공간을 각각 다르게 주는 것만으로도 다른 표정이 생기는 것을 알 수 있으며, E의 ‘들’ 자와 같이 크기와 기울기, 선의 굵기를 다르게 하면 전혀 다른 글자의 표정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조마조마’의 비교

    A와 B의 글씨를 보면 어느 것이 ‘조마조마’라는 느낌이 더 좋을까? A는 글자와 글자 사이의 공간을 적당하게 표현하였고, B는 글자와 글자 사이의 공간을 크고 작게 하여 전체적인 공간 구성을 짜임새 있게 하였다. 보는 사람에 따라 A가 될 수도 있고 B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글씨 안에서도 공간구성을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글씨의 표정이 바뀌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좌]여태명 작품 [중]이상현 작품 [우]이완 작품

    캘리그라피 작품에서의 여백(공간)을 보면, 먼저 여태명 작가의 작품은 ‘삶’이라는 글자를 크게 쓰고 그에 대한 내용을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써서 상대적으로 왼쪽 공간을 크게 만들었다. 메인(Main)이 되는 ‘삶’ 자는 ‘ㄹ’의 아랫부분의 공간을 매우 좁게 하고, ‘ㅁ’은 굵기 변화를 주어 삶에 대한 표현을 극대화했다. 전형적인 여백의 미를 강조한 작품이다.

    이상현 작가의 작품은 전체적인 여백을 주지 않고 먹의 농담으로 글자 안에서 공간의 흐름을 표현하였다. 이 작품의 공간적 특징은 오른쪽 아랫부분의 ‘다나가’에서 보이는데, 자음의 크기 변화에서 생기는 공간연출로 ‘ㅏ’가 3번이나 겹치는 부분을 절묘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완 작가의 작품은 글자와 글자 사이의 공간도 거의 없이 전체공간을 다 메웠지만, 먹의 농담 변화와 선의 굵기 변화로 작품 안에서 공간의 흐름이 만들어져 답답함을 전혀 느낄 수 없으며 오히려 먹색의 흐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세 작가의 작품은 각각 다른 공간을 연출했다. 시원한 공간을 만들기도 하고 작품 안의 공간을 전혀 만들지도 않았지만, 작품 안에서 글씨에 대한 매력을 충분히 발산하였고 여백(공간)에 대한 이해와 표현력이 풍부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으로 간략하게 여백(공간)에 대해 언급했다. 우리나라에서의 캘리그래피는 디자인에 쓰이는 문자디자인이 주를 이룬다. 가독성이 중시되고, 글씨에서 그 뜻과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하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감성표현도 베여 있어야 한다. 여러 요소를 만족하게 해야 하는 캘리그래피는 알면 알수록,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것을 누구나 공감하고 있으며 나만의 작업이 아니라 클라이언트(Client)의 눈 또한 만족하게 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어떻게 하면 글씨의 다양한 표현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의 고민일 것이다.

    공간 연출이 글씨의 다양한 표정을 만든다. 여백이라 함은 글씨 밖의 공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글씨 안에서의 공간도 있다. 글씨 전체를 구성하면서 생기는 공간과 글씨 안 공간의 조화가 중요하다. 글씨 안의 공간의 흐름이 글씨 밖의 전체 공간으로 이어졌을 때 글씨의 표정이 극에 다다르게 된다. 지금까지 쉽게 간과(看過)했던 글자 내에서의 공간적 연출을 이제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민준

    현재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에서 대학정통서예를 공부한 후

    신고전주의 캘리그라피/서예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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