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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항식의 Designology #5 파스투로를 생각하며, ‘줄무늬’로 보는 상징의 역사

    기호학자 신항식의 디자인-학(design-ology) 강의 ― ‘개념을 가진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글. 신항식

    발행일. 2013년 07월 10일

    신항식의 Designology #5 파스투로를 생각하며, ‘줄무늬’로 보는 상징의 역사

    미셸 파스투로(Michel Pastoureau, 색채상징 학자)는 필자의 스승이었다. 세상의 시각 이미지는 상징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미지를 연구하는 사람은 시각이나 이미지 일반에 앞서서 상징의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미지도 아니고 시각도 아니라면, 이 상징이 과연 무엇일까?

    ‘줄무늬’의 역사적 정당성

    기업같이 특정목적을 가진 조직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시각이미지를 사용할 때 보통 다음과 같은 제작의 변을 첨부한다. “우리 기업은 첨단을 지향하며, 소비자의 만족을 생각합니다. 로고의 삼각형은 안정을 상징하며, 파란색은 소비자의 마음을 상징하며….” 파스트로에게 이런 것은 상징이 아니다. 상징은 역사적 개념과 의미가 배어 있는 상태의 시각 이미지를 말한다. 삼각형에는 안정의 기본 감각은 있을지 몰라도 안정의 역사적 개념이나 의미로까지 확대되지 않는다. 파란색은 역사적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표현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저런 로고는 역사적 정당성이 없는 것이 된다. 어떡하면 시각 이미지에 역사적 정당성을 줄 수 있을까? 파스트로는 줄무늬를 통하여 이를 설명한다.

    ‘위험한 말’로 상징됐던 얼룩말 (출처: 플리커 Reto Fetz CC BY-NC-SA)

    줄무늬(Stripe)는 형상과 배경을 구분하기 불가능한 문양이다.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서 끝날지도 모른다. 어디를 먼저 보아야 할지 길을 잃게 한다. 줄무늬의 이런 기본 감각은 거기에 역사적 의미를 투여하게 만들었다. 줄무늬에 대한 중세인의 감수성은 비정상, 무질서, 이단이었다. 그래서 창부, 광대, 문둥이, 사기꾼, 떠돌이, 난쟁이, 이단자 등의 시각 표현에 들어맞는다고 믿었다. 이런 이유로 호랑이는 줄무늬가 없는 사자에 비해 나쁜 동물로 표현되었다. 단색의 개와는 달리, 고양이는 악마 옆에서 논의되었다. 백마가 선한 말이라면 흑마는 악한 말이지만 얼룩말은 위험한 말로 표현되었다. 하인, 농노, 주방인부, 푸줏간 인부, 사냥 보조 하인, 일반 군인 같은 천한 계층에게 줄무늬 의복이 입혀졌다. 이런 비정상의 줄무늬는 오늘날 바람둥이와 어린이 이미지에 그 흔적을 남긴다. 영화에서 나타나는 줄무늬 바지를 입은 개구쟁이, 시가(cigar)를 피워 물며 허풍을 떠는 줄무늬의 바람둥이, 과장된 몸짓의 오벨릭스, 코주부 마술사, 광대 등이 그들이다.

     ‘저항의 상징’ 미국의 성조기 (출처: 플리커 Sam Howzit CC BY)

    이랬던 상징의 의미가 서서히 변화해서 양태를 바꾸는 게 르네상스 시절이었다. 언제 누가 죽을지 몰랐던 페스트가 지나간 후, 14세기 이탈리아 귀족들은 줄무늬를 통해 삶의 즐거움을 상징하기 시작했다. 엄숙한 교회에 이단적으로 반항하는 것이었다. 줄무늬는 로미오와 줄리엣 시대의 이탈리아, 16세기 프랑스, 헨리 8세의 영국, 독일 공국의 각종 초상화에서 다량으로 발견된다. 줄무늬의 저항성, 생명성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의미는 형태와 문맥만 바꾸어 가며 21세기에 들어서까지 지속되고 있다. 미국은 줄무늬를 저항의 상징으로 이용했다. 성조기뿐만 아니라 혁명군대의 산실 웨스트포인트의 정장도 그래서 탄생한다. 군대와 저항의 이미지는 운동의 상징을 이끌어 내어 운동선수복의 줄무늬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현대 줄무늬의 두 가지 대립 개념

    그렇다면 옛 이단, 하급의 상징은 어디로 갔는가? 영국 빅토리아 시대 줄무늬 조끼가 호텔 남자 종업원에게 입혀졌다. 당시 종업원은 흑인이었으며 호랑이(Tigers)라고 불렸다. 오늘날 앰배서더, 노보텔의 종업원도 그렇게 입는다. 재즈의 이단적 리듬은 연주자에게 줄무늬를 입히게 한다. 이는 하급성의 대중적인 의미를 탄생시키면서 유럽과 미국 사회의 식당가를 주름 잡는다. 베니건스와 T.G.I Friday’s 같은 대중식당의 줄무늬가 보여주듯, 줄무늬는 손님을 왕처럼 서비스하는 하인 이미지를 발생시킨다. 이 또한 중세적 상징이 현대에 이어지는 모습이다. 상징의 역사적 개념과 의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세기 미국의 메릴랜드와 펜실베이니아의 죄수복,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줄무늬는 이단, 저항, 하급의 상징이다.

    [좌] 주방 인부의 유니폼 (출처: 플리커 Daniel C Bentley CC BY-NC)  [우] ‘손님을 왕처럼’ T.G.I Friday’s 직원 유니폼 (출처: 플리커 Marco Cabazal CC BY)

    산업시대에 들어, 줄무늬가 지녔던 이단, 하급, 저항의 상징은 ‘나오지 못하게 묶어둔다.’는 보호감찰의 의미를 발생시킨다. 산업시대는 관리와 안전의 시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줄무늬는 두 가지 대립 개념을 한몸에 지닌다. 남을 배제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거나 남에게 금지를 명하면서 자신을 안전케 한다. 줄무늬 바코드, 티켓, 축구심판복은 통제를 상징한다. 줄무늬 창문과 커튼, 수영복과 아동복은 보호를 상징한다. 커튼과 창문은 집과 집 외부를 경계 짓는다. 육체와 육체의 외부를 경계 지을 때와 같다. 신체의 연장으로서 옷과 침대보, 커튼, 창문으로 이어지는 줄무늬의 상징은 보호의 감수성을 유지한다.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는 길 혹은 줄(Strasse)로 만들어진 도시(bourg=city)를 뜻한다. 가옥의 줄무늬를 통해 도시를 보호한다. 이발소 표시도 환자복도, 침대보도, 치약의 줄무늬도, 인도 표시도, 경찰 보호선도 모두 보호를 상징한다. 우리 시대 대표적인 줄무늬의 상징 의미이다.

    전통과 역사 담긴 시각 이미지는 어디로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런 시각 이미지의 상징성을 많이 훼손했다. 아무런 시각 이미지에 아무런 개념이나 의미를 투여했다. 마치 도(道)였던 태권도, 유도가 경쟁 스포츠로 변하면서 동시에, 도의 표현인 백색 유니폼과 띠의 규율을 잃어버린 이치와 같다. 형상과 배경을 융합하는 줄무늬의 기본 감각만 떼어 와서 여기저기 착시 이미지 정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상징 이미지의 기초 감각에만 근거해 버리면 줄무늬뿐만 아니라 색채와 도안, 시각이 가져왔던 역사적이고 의미론적 근거가 무시된다. 이를테면, 키를 커 보이게 하고 싶어 줄무늬를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는 거기서 역사적인 저항성, 보호성의 개념을 더 이상 찾지 못한다. 비아그라의 파란색은 성 기능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시각 이미지임에도 단지 파란색이 유행이었기 때문에 선택된다. 이렇게 전통과 역사를 담은 시각 이미지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의 원칙은 개념의 시각적 전달이다. 그러나 개념 자체의 전통과 역사가 혼란스럽고 갈지자를 걸으니 시각 이미지도 그렇게 무질서하게 변하는 것 아닌가. 단절된 역사는 단절된 상징을 만들고, 연이어 시각 이미지의 단절을 초래하며, 당연히 디자인의 무질서를 유발한다. 파스트로가 걱정했던 것은 디자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단절된 역사가 만들어가는 시각 문화의 혼란상이었다. 개념을 가진 디자인으로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신항식
    현재 한양대학교 초빙교수 겸 SSBC 연구소장.
    저서로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시각영상 기호학>,
    <디자인 이해의 기초이론> 등이 있고, <재현의 논리와 미학의 재구성>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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