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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녀복을 입은 아티스트, 코리타 켄트를 찾아서

    AIGA(American Institute of Graphic Arts)에서는 매년 디자인계 공로자들을 선정하여 ‘AIGA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글. TS 편집팀

    발행일. 2016년 05월 04일

    수녀복을 입은 아티스트, 코리타 켄트를 찾아서

    AIGA(American Institute of Graphic Arts)에서는 매년 디자인계 공로자들을 선정하여 ‘AIGA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메달리스트 명단을 살펴보면 눈이 부실 정도. 브루스 로저스(Bruce Rogers, 1925년 메달 수여), 다드 헌터(Dard Hunter, 1931), 스탠리 모리슨(Stanley Morison, 1946), 얀 치홀트(Jan Tschichold, 1954), 폴 랜드(Paul Rand, 1966), 밀튼 글레이저(Milton Glaser, 1972), 허브 루발린(Herb Lubalin, 1980), 솔 바스(Saul Bass, 1981), 마시모 비넬리와 렐라 비넬리 부부(Massimo and Lella Vignelli, 1982), 매튜 카터(Matthew Carter, 1995), 주자나 리코와 루디 반데라스 부부(Zuzana Licko and Rudy VanderLans, 1997), 폴라 셰어(Paula Scher, 2001), 볼프강 바인가르트(Wolfgang Weingart, 2013), 스테판 사그마이스터(Stefan Sagmeister, 2013), 칩 키드(Chip Kidd, 2014), 데이비드 카슨(David Carson, 2014), 카일 쿠퍼(Kyle Cooper, 2014) 등 국내에 잘 알려진 유명인사들도 많다. 각 연도별 메달 수상자들을 헤아리고, 그들의 작품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서양 시각디자인 역사를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기사는 윤디자인그룹 공식 블로그 ‘윤톡톡’에 포스팅한 글입니다.(원문 보기)

    올해 AIGA 메달리스트는 총 다섯 명이다. 루스 안셀(Ruth Ansel), 리차드 그레페(Richard Grefé), 마리아 칼맨(Maira Kalman, 티보 칼맨의 아내), 게레 카바노프(Gere Kavanaugh), 그리고 코리타 켄트(Corita Kent). 이 명사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한 명이 있다. 이번 글에서 소개할 코리타 켄트이다. 다섯 아티스트들 가운데 유일하게 현재 생존해 있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1918년생으로 1986년 예순여덟을 일기로 신의 품에 안겼다. 2014년 11월 20일, 그녀의 탄생 96주기를 기리며 구글은 기념 로고(구글 두들)를 내걸기도 했다. 

    코리타 켄트 탄생 96주기 구글 두들( 출처: Google)

    ‘신의 품에 안겼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코리타 켄트가 수녀였기 때문이다. 수녀복을 입은 아티스트라니, 언뜻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마도 그녀에 대해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차근차근 코리타 켄트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봤다. 다큐멘터리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가 그랬던 것처럼, 최근 재평가되고 있는 한 예술가의 삶을 되짚어보려 한다. 

    가장 병약할 때 이룬 극단의 다작

    1970년대 초, 미국에서 태어나고 나이 들어가고 있던 ‘시스터 메리(Sister Mary)’ 코리타 켄트는 삶의 기로에 서게 된다. 독창적인 실크스크린과 세리그래피(serigraphy) 기법으로 팝아트 분야에 매진해온, 그러나 미술계로부터 이렇다 할 조명은 받아본 적 없는 중년의 그녀에게 암 판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신을 섬기고 타인을 박애한 이 수녀복을 입은 아티스트는 줄곧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작품에 투영해왔었다. 아직 병마와 싸우기엔 이른 나이인 오십대 초반. 그녀의 발암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제 스스로의 몸도 돌보라는 신의 메시지였는지도.

    코리타 켄트는 자기 안의 암을 절망이 아닌 희망으로 품기로 했던 것 같다. 아티스트로서 그녀의 커리어는 암 판정 이후 오히려 더욱 빼곡해진다. 그야말로 극단적인 다작의 시기(an extremely prolific period)로 돌입했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코리타 켄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레인보우 스워시’(Rainbow Swash, 보스턴의 LNG 저장 탱크에 그려진 아트워크), 미국 우정 공사(United States Postal Service)의 1985년판 ‘LOVE 스탬프’ 등이 모두 이 무렵에 발표되었다. 

    ‘레인보우 스워시’ (출처: Getty Images)

    그녀는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냈던 운동가였다. 1960년부터 시작된 베트남 전쟁은 십 년이 넘도록 종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에 갈급했던 군중은 거리에서, 혹은 집회 현장에서 반전 구호를 외쳤다. 대통령 리처드 닉슨에 대한 비난은 날로 거세져갔다. 또한, 당시는 흑인 인권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해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혼돈 속에서 코리타 켄트는 프로테스트에 동참하는 대신, 자신만의 방식으로 군중과 함께했다. “Make Love Not War”, “Stop the Bombing”, “Why Not Give a Damn About Your Fellow Man” 등과 같은 강렬한 캐치프레이즈를 스크린 프린트로 제작해 발표하며 한 명의 피스키퍼(peacekeeper)로서 행동했던 것이다.

    ‘Make Love Not War’ (출처: Oakland Museum of CA)
    [좌] ‘Stop the Bombing’ (출처: KCET.org), [우] 흑인 인권 문제를 주요하게 다룬 1968년 3월 8일자 『라이프』지 커버. 코리타 켄트의 작업으로, 눈물 흘리는 흑인 아동의 사진 하단에 ‘Why Not Give a Damn About Your Fellow Man’이라는 메시지가 배치되어 있다. (출처: Harvard Art Museums)

    작품은 있되 이름이 없다

    앞서 언급했던 그녀의 대표작 ‘레인보우 스워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스 탱크로도 알려져 있다. 정작 이 140피트(약 43미터)짜리 아트워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그녀의 거주지였던 보스톤을 제외하면) 그리 널리 소개되지 않았었다. 1971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베트남 전쟁을 의식한 그녀가 평화와 반전의 메시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남색, 보라색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무지개 패턴은 각기 다른 피부색과 민족성을 지닌 인류의 화합과 상생을 상징한다. 이 같은 시각 표현은 그녀의 또 다른 대표작 ‘LOVE 스탬프’에도 등장한다. 

    코리타 켄트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건 요 몇 년 사이의 일이다. 미술계와 더불어 여러 언론 매체에서 그녀의 삶과 작품 세계에 속속 주목하고 있다. 『뉴욕 타임즈 매거진(The New York Times Magazine)』은 코리타 켄트를 “수도원에 있었던, 앤디 워홀과 동류의 영혼(Warhol’s Kindred Spirit in the Convent)”이라 일컬었고(2015년 4월 10일자 기사), 『CBS 뉴스』는 “그늘에 가려졌던 팝아트 아이콘(An overshadowed pop art icon)”이라는 수식어를 선사했다(2016년 4월 3일자 기사).  

    코리타 켄트와 그녀의 ‘LOVE 스탬프’(출처: Design Idiom)

    지금 미국의 샌 안토니오 예술 박물관(San Antonio Museum of Art)에서는 코리타 켄트의 작업과 생애를 갈무리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Corita Kent and the Language of Pop’(2.13~5.8)이라는 제목의 특별전이다. 박물관장인 케이티 러버(Katie Luber)는 코리타 켄트가 널리 소개되지 않은 데 대해 팝아트계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비평적 수용의 측면에서 볼 때, 남성 중심적인 성향이 정말로 강해 보였다(in terms of criticism and reception, really been seen as a male-dominated art form)”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이 전시는 지난해 하버드 예술 박물관(Harvard Art Museums)에서 먼저 선을 보인 바 있다. 전시를 기획한 수잔 데커맨(Susan Dackerman) 역시 케이티 러버 관장과 동일한 이야기를 했었다. “수녀라는 이유로, 코리타 켄트는 별종이거나 변칙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Because she was a nun, she was considered an eccentric, an anomaly)”며 “팝아트계는 여성에게 결코 호의적이었던 적이 없다(Pop Art was never kind to women)”고 꼬집기도 했다. 

    [좌] ‘E Eye Love’, [우] ‘Give a damn’(출처: Galerie Allen, 아래 출처 동일)
    [좌] ‘Moonflowers’, [우] ‘Manflowers’

    앤디 워홀에 비견되는 팝아트 작가

    “코리타 켄트는 휴머니스트였다. 앤디 워홀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Corita was a humanist. Warhol, not so much.)

    “앤디 워홀에겐 ‘팩토리’(워홀의 스튜디오 이름)가 있었고, 코리타 켄트에겐 교실이 있었다.”
    (Warhol had a “factory.” Corita had a classroom.)

    『로스엔젤레스 타임즈(Los Angeles Times)』 소속 예술 비평가 크리스토퍼 나이트의 평이다. 지난해 미국 곳곳에서 열린 코리타 켄트 순회전 ‘Someday is Now: The Art of Corita Kent’ 리뷰(2015년 6월 24일자)를 통해 밝힌 내용이다. 특히 이 전시는 앤디 워홀 재단(Andy Warhol Foundation)의 후원으로 성사되어 더욱 주목을 받았었다고 한다. 

    코리타 켄트와 앤디 워홀에겐 공통점이 있다. 두 아티스트 모두 실크스크린 기법을 활용한 팝아트 작품을 선보였다는 것. 그래서일까, 둘은 최근 들어―코리타 켄트가 재조명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주 비교되곤 한다. 실제로 그녀에 대한 해외 전문가들의 작품론을 살펴보면, 앤디 워홀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의견들이 일관되게 등장한다. 하지만, 코리타 켄트의 모든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코리타 아트 센터(Corita Art Center)의 총책임자 알렉산드라 카레라(Alexandra Carrera)는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앤디 워홀의 작품 경향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코리타 켄트는 교육자였어요. 그리고, 그저 한 발 물러선 자세로 ‘이건 썩 괜찮아 보이지 않는걸? 난 저렇게 하지 않을 거야. 내가 얼마나 근사한지 당신들에게 보여주겠어.’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았지요. 그녀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참여’할 것을 권했어요.”
    (She was directing people. And rather than just standing back and being like, ‘This is what’s going wrong, and I’m just showing you guys because I’m so cool and I’m not going to be part of it,’ she was really asking people to engage.)
    _미국 라디오 채널 npr, 2015년 1월 8일 방송 중

    마치 이 말에 동의하듯, 비평가 크리스토퍼 나이트는 자신의 칼럼을 통해 코리타 켄트와 앤디 워홀을 나란히 견주었다. 워홀이 예술성과 상업성 양쪽을 모두 의식하여 실크스크린을 활용한 반면, 켄트는 오직 창작과 메시지 전달의 도구로서 실크스크린을 대했다는 분석이다. 이에 대한 부연으로, 두 사람의 작업 공간을 비교한 대목도 흥미롭다. 알다시피 워홀의 ‘팩토리’는 당대의 숱한 유명인사들과 아티스트들의 아지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앤디 워홀의 뮤즈로도 유명한 파티걸 에디 세즈윅(Edie Sedgwick), 전설적인 뮤지션 밥 딜런(Bob Dylan),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이기도 한 작가 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 시인 앨런 긴즈버그(Allen Gisberg) 등이 팩토리를 방문했었다. 

    영화 〈첼시 걸(Chelsea Girls)〉 촬영 중 동료 아티스트들과 함께 팩토리에서 포즈를 취한 앤디 워홀(1966년) (출처: Vulture)

    당연하겠지만, 성직자인 코리타 켄트의 작업실이 앤디 워홀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1938년부터 1968년까지, 30년간 가톨릭 학교인 이매큘러트 하트 칼리지(Immaculate Heart College)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이 학교의 예술학부를 총괄하고 있었다. 평생을 신의 성역에서, 그리고 교육 현장에서 보낸 코리타 켄트의 작품 활동이 상업성과 결부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분석에 근거하여, 크리스토퍼 나이트는 코리타 켄트를 ‘팝아트 작가’로 보기란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덧붙인다. 

    “팝아트 작가들은 상업적 미디어의 이미지(commercial media imagery)를 활용하여 현대미술계의 고루함을 타파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코리타 켄트가 주력했던 바가 아니다. 그녀는 상업적 미디어의 이미지로 자유 인본주의를 계몽했는데, 이는 본인의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Pop artists used commercial media imagery to dismantle deeply entrenched shibboleths of Modern art culture. But that’s not what Corita was up to. Instead, she used commercial media imagery to advertise an enlightened liberal humanism, which grew from her religious faith.)

    [위] ‘FISH’, [우] ‘come alive!’(출처: Galerie Allen, 이하 출처 동일)
    [좌] ‘SOLW’, [우] ‘A Passion for the Possible’

    다시, 예술가를 찾아서

    메시지의 전달이라는 기능과 더불어 오랫동안 타이포그래피의 목적으로 꼽혀온 것은 지속성(durability)이다. 지속성이란 변화에 둔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유행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최상의 타이포그래피는 시대를 넘어서며 동시에 그 시대를 반영하는 언어의 시각적 형태가 된다.
    _로버트 브링허스트(Robert Bringhurst) 저, 〈타이포그래피의 원리〉 중

    코리타 켄트가 남긴 방대한 스크린 프린트 작업물의 주된 특징은 각양각색으로 주조된 레터링이라 할 수 있다. 캐나다의 시인이자 저명한 타이포그래퍼 로버트 브링허스트의 이 말을 참고해본다면, 코리타 켄트의 작품들은 타이포그래피적 지속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그녀는 1976년의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단어적 의미와는 별개로, 글자의 형태 자체로 어떤 특정한 주제를 갖게 되는 글자들을 사랑한다.‘apples’나 ‘oranges’ 같은 단어들이 마치 아티스트들을 위한 것처럼.”
    (I really love the look of letters—the letters themselves become a kind of subject matter even apart from their meaning—like apples or oranges are for artists.)
    _AIGA 2016 메달리스트 선정 글에서 재인용

    AIGA가 올해 메달리스트로 코리타 켄트를 선정한 이유 또한, 시각 언어로서의 타이포그래피적 맥락을 위시하고 있다. “프로테스트와 사회 변화를 향한 메시지 전달에서의 그래픽 타입 및 역동적인 컬러 활용(inventive use of graphic type and vibrant color in communicating messages of protest and social change.)”을 높이 평가한다는 내용이다. 

    ‘APPLES ARE BASIC’

    그러나 수녀복을 입은 아티스트의 업적이 이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에 대한 작품론이 (사후 약 30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하나둘씩 등장하고는 있지만, 전문적인 연구가 진행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이다. 그녀에게 예술을 배웠던 수많은 학생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할 테고. 이 글의 서두에 언급했던 다큐멘터리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가 줄곧 떠오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단 한 번의 발표회도 없이,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날마다 사진을 찍었다는 비비안 마이어(Vivian Maier). 그녀가 사진계에 알려진 시점 역시 코리타 켄트와 마찬가지로 최근이다. 골동품 경매장에 나온 그녀의 필름통들을 한 남성이 헐값에 구입하면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화는 그녀가 촬영한 사진들, 그녀를 알았던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예술가의 초상화를 천천히 그려갔고, 퍽 근사하게 완성해냈다.

    지도에 없는 미지의 신대륙이 발견됐다는 소식처럼, 잊혀 있던 아티스트의 부상은 언제나 우리를 두근거리게 만든다. 이런 영화 같은 이야기가 여전히 전개되고 있음에 안도한다. 전형적으로, 선형적으로만 흘러가는 건조한 ‘리얼리즘’ 같은 현실에도, 아직까지는 ‘포스트’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 듯해서 말이다. 

    ※ 참고 출처 
    ∙ AIGA
    ∙ Corita Art Center
    ∙ The Andy Warhol Museum
    ∙ 『Boston Globe』
    ∙ 『CBS NEWS』
    ∙ 『Los Angeles Times』
    ∙ npr
    ∙ 『The New York Times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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