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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수호의 문화와 저작권 #1 문학 작품, 노랫말, 그리고 동일성유지권

    동일성유지권 바로 알기 ― 언론학 박사 손수호의 ‘크리에이터를 위한 저작권 상식’ 강의


    글. 손수호

    발행일. 2020년 07월 10일

    손수호의 문화와 저작권 #1 문학 작품, 노랫말, 그리고 동일성유지권

    「저작권 문화』 2020년 5월호에 실린 필자 손수호의 기고문
    「임영웅의 ‘보랏빛 엽서’가 절창이긴 한데」를 수정·보완한 글입니다.

    나태주는 누구인가. 요즘 TV를 즐기는 사람은 ‘태권도 트롯 가수’로 알지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원로 시인을 떠올린다. 한국시인협회장을 맡고 있는 「풀꽃」의 시인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세히 보아야 / 예쁘다 //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를 좋아하는데, 사실 그의 「풀꽃」은 다수다. 이 유명한 구절의 시 제목도 사실은 「풀꽃」이 아니라 「풀꽃1」이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 아, 이것은 비밀”(「풀꽃2」, 시집 『멀리서 빈다』). “기죽지 말고 살아봐 / 꽃피워봐 / 참 좋아”(「풀꽃3」, 시집 『풀꽃 향기 한 줌』). 짧은 문장으로 시를 완성하는 시력(詩歷)의 원숙함이 놀랍다.

    몇 해 전 나태주 시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1945년생이니 70대 중반의 노인인데도 강연 내내 허리가 꼿꼿했다. PPT나 메모 없이도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가 편하게 전해졌다. 시인은 웃기고 울리면서 90분을 알차게 채웠다. 질의응답 시간에 내가 한 번 여쭤봤다. 「풀꽃」이 수많은 곳에서 인용되고 있는데 느낌이 어떠시냐고.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답하셨다. “제발 오탈자라도 없으면 좋겠다.” 창작자들은 저작재산권 못지않게 저작인격권을 소중하게 여긴다. 인용하더라도 동일성은 제대로 유지해달라는 주문이다.

    ‘에’ vs. ‘을’

    원작을 훼손하는 경우는 문학 작품을 가사로 쓰는 대중음악계에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유주용·양희은·박일남 등이 불러서 널리 알려진 ‘부모’(서영은 작곡)다. 어릴 적에 형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다가 성인이 되어 김소월 작시라는 사실을 알고 많이 놀랐다. ‘산유화’ ‘못잊어’ ‘개여울’처럼 수많은 노래에서 소월의 시를 읽었으면서도 이 노래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은 것이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을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

    가사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데, 문장 흐름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출생의 연유를 궁금해 하다가 갑자기 내일을 묻지 말라는 게 말이 되는가. 아니나 다를까. 자료를 찾아보니 원시(原詩)의 마지막 두 행은 본래 이러했다.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중대한 잘못이다. 혹자는 가사의 운율을 맞추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뜻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을”과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가 어떻게 비슷하다는 건가? 노랫말은 ‘내일’을 묻지 말라 하고, 시구는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나는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굳이 물을 필요 없음을 표현한 것이다.

    즉, 노랫말의 ‘내일’은 단어 그대로 내일(tomorrow)이고, 시구의 ‘내일’은 미래(future)를 가리키는 시어다. 나를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의 마음은, 나 스스로 부모가 된 뒤에야 진정으로 알 수 있으리라는 의미다. 소월의 시를 바탕으로 작사된 ‘부모’의 노랫말은, 말하자면 번안도 윤문도 아닌 왜곡이자 비문非文이다.

    또 다른 문제는 ‘보랴(볼까)?’와 ‘보리라’의 차이다. 원작이 과거·현재·미래를 하나의 다발로 묶으면서 아련한 여운을 남기는 데 비해(내가 부모의 입장이 된다면 지금 내 부모님의 마음을 알 수 있으려나?), 노랫말은 자신의 다짐(내가 부모가 되어서 지금 내 부모님의 마음을 알아보리라!)이 강조되는 모습이다. 감흥을 의지로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게다가 소월이 누구인가. 한국현대문학사 100년을 통틀어 최고의 시인들 중 한 명이다. 우리 시대 최고 높이에 도달한 시인의 글을 임의로 고쳐서는 안될 일이다.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라는 부분은 원작과 같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는 변형됐다.
    김소월은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라고 썼다.
    출처: JTBC 〈너의 노래는〉 2회(2019. 1. 31. 방송) 화면 캡처

    ‘부모’ 가사에 나타난 잘못을 저작권의 법리로 따지면, 동일성유지권 침해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소월이 작고한 해는 1934년이다. 저작재산권 보호 기간(저작자 사후 70년까지)이 만료된 상황이니 속절없다 하겠다. 더구나 그의 아들이 북한에서 내려와 아웃사이더로 살았고, 한국 저작권법의 보호망에서도 비껴 있다 별세했다고 하니 더욱 안타깝다.

    ‘에’ vs. ‘의’

    열풍을 몰고 온 노래 경연 프로그램 〈미스터 트롯〉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이 프로는 최후의 승자인 임영웅뿐 아니라, 김호중·나태주·류지광 등 준결승 진출자 13인까지 골고루 스타로 만든 히트 상품이다. 코로나19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에 방영됐었고, 나 또한 오랜 시간 경연을 즐기면서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노래가 생겼다.

    그중에서 임영웅의 ‘보랏빛 엽서’를 발견한 즐거움이 크다. 레전드 미션 때 작곡자 겸 가창자인 설운도 앞에서 불러 갈채를 받은 노래다. 멜로디가 서정적이고 곡의 높낮이가 크지 않았기에 ‘보랏빛 엽서’를 내 애창곡으로 삼았다. 그러고는 가사 외우기에 들어갔다.

    〈미스터 트롯〉 준결승 레전드 미션 중 ‘보랏빛 엽서’를 부르는 임영웅
    출처: TV조선 〈미스터 트롯〉 9회(2020. 2. 27. 방송) 화면 캡처

    보랏빛 엽서에 실려온 향기는
    당신의 눈물인가 이별의 마음인가
    한숨 속에 묻힌 사연 지워보려 해도
    떠나버린 당신 마음 붙잡을 수 없네
    오늘도 가버린 당신의 생각엔
    눈물로 써 내려간 얼룩진 일기장엔
    다시 못 올 그대 모습 기다리는 사연

    단순한 문장에 가시처럼 걸리는 게 있었다. 오늘도 가버린 당신의 생각엔, 눈물로 써 내려간 얼룩진 일기장엔···? 가사에서 두 번 연속 ‘엔(에는)’을 사용했다면 서로 대등한 구문이 이어져야 하는데, 내용으로 미뤄 그렇게 전개될 부분이 아니었다.

    이후 여러 자료를 접하면서 더 큰 혼란을 느꼈다. ‘당신의 생각엔’이라는 가사가 알쏭달쏭했던 것이다. 어디에는 당신‘의’, 또 어디에는 당신‘에’로 표기돼 있었다. 설운도 본인마저 ‘당신의 생각엔’ ‘당신에 생각엔’ ‘당신 생각에’ 등 여러 버전으로 부르고 있었다.

    같은 방송이지만 2017년 10월 15일 〈열린음악회〉와 2016년 10월17일 〈열린음악회〉의 자막과 가창이 달랐다. 노래방의 가사집, 연주용으로 떠도는 악보 또한 해당 노랫말이 제가끔이었다.

    ‘보랏빛 엽서’의 원 가창자 설운도 역시 ‘당신의 생각엔’이라고 부르고 있다.
    출처: 여수MBC 〈가요베스트〉 547회(2017. 8. 27. 방송) 화면 캡처
    ‘당신에 생각에’로 표기된 악보. 제목 또한 ‘보랏빛’이 아니라 ‘보라빛’으로 적혀 있다.

    답답한 마음에 작사자를 찾아봤다. 의외로 유명한 분이었다. 순천향병원장을 지낸 정형외과 전문의이자 작가로도 활동하는 김연일 선생이다. 다시 기자가 된 양 취재를 위해 전화를 넣었다. 선생은 ‘당신의 생각에’가 적힌 원문을 보여주면서 저간의 사정을 흔쾌히 설명하셨다. ‘당신의’가 ‘당신에’로 된 데에는 경상도식 발음이 영향을 준 것으로 이해하고 계셨다.

    “1997년 발표 당시에는 별 반응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지방의 노래교실을 시작으로 서서히 알려지는 바람에 오류를 바로잡을 기회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보랏빛 엽서’ 작사가 김연일 선생의 가사 원문. ‘당신의 생각에’로 돼 있다.

    가요는 창작가가 만들고 대중이 누린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변화를 겪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문장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부르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작은 낱말 차이가 큰 의미 변화를 가져온다. ‘당신의 생각엔’의 경우 도무지 ‘엔’이 들어갈 이유가 없다. 당연히 ‘에’가 돼야 한다. ‘당신의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당신을 생각하는 것’이 핵심이니 ‘의’도 빠지는 게 낫다.

    노랫말의 의미와 정서를 숙고하며 불러본다면, 아마도 이런 호흡이 맞지 않을까 싶다. ‘오늘도, 가버린 당신 생각에 눈물로 써 내려간, 얼룩진 일기장엔, 다시 못 올 그대 모습 기다리는 사연’. 또 한마디 덧붙여보자면, 많은 곳에서 ‘보라빛 엽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이것도 원작에 맞춰 ‘보랏빛 엽서’로 고쳤으면 좋겠다.

    선인들의 훌륭한 자산을 후대가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시를 노래에 담는 것도 좋다. 다만 원작의 본질을 해치는 일은 지양해야 하겠다. 특히 시는 문학에서도 가장 압축되고 정제된 언어를 구사한다. 원작에 임의로 손을 댄다는 것은 작품에서 전율을 느끼는 독자들의 가슴을 베는 일이나 다름없다. 오리지널리티를 존중하는 것이 저작권을 존중하는 첫걸음이다.

    언론학 박사. 울산 출생. 경희대학교 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경향신문 기자, 국민일보 문화부장 및 논설위원, 미국 미주리대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을 지냈다. 저서로 『책을 만나러 가는 길』, 『문화의 풍경』, 『도시의 표정』(이상 열화당) 등이 있다. 건국대, 경희대, 동아방송예술대, 숙명여대, 중앙대에서 강의했다. 현재 인덕대학교 교수,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 국민일보 객원논설위원, 『복지저널』 편집위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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