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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가 보이는 한글 ② 표음적 특성과 뇌 활동의 상관관계

    한글문장은 어절단위로 띄어 쓴다. 예를 들어서 '남교수가 강의를 하였다.'라는 문장에서 '남교수가', '강의를', '하였다'를 어절이라 부른다.


    글. 남기춘(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발행일. 2012년 12월 11일

    소리가 보이는 한글 ② 표음적 특성과 뇌 활동의 상관관계

    한글문장은 어절단위로 띄어 쓴다. 예를 들어서 ‘남교수가 강의를 하였다.’라는 문장에서 ‘남교수가’, ‘강의를’, ‘하였다’를 어절이라 부른다. 각 어절은 ‘남교수가’에서처럼 몇 개의 단어 즉, ‘남교수’와 ‘가’로 구성되거나, 몇 개의 형태소 즉 ‘하였다’에서 ‘하’, ‘였’, ‘다’처럼 몇 개의 형태소로 구성된다. 필자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남교수가’처럼 명사로 구성된 어절은 뇌에 명사 따로 조사 따로 저장되어 있다. 반면에 ‘하였다’같은 동사 어절은 ‘하였’+’다’형태로 뇌 사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였’은 함께 저장되어 있고 ‘다’는 별도로 기억되어 있다. ‘남교수가’가 뇌에 저장된 구조는 일반적인 상식처럼 단어별로 저장되어 있다.

    한글단어가 인식되고 저장되는 뇌의 양상

    그러나 ‘하였다’와 같은 동사 어절의 경우에는 뇌 사전에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을까에 대해 선뜻 상상이 되지 않는다. 국어사전에서는 ‘하다’로 적혀 있지만 ‘하였다’가 ‘하다’에서 출원되었다는 지식이 없으면 국어사전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여러 종류의 인지신경과학적인 실험결과를 토대로 필자가 얻은 결론은 ‘하’와 ‘였’은 함께 묶인 형태로 저장되어 있고, ‘하였다’의 마지막 부분인 ‘다’는 문장의 종류를 나타내는 부분인데, 이 형태소는 따로 분리되어 저장되어 있다. 이런 저장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의 정보처리의 경제성(cognitive economy)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정보처리 시스템은 최상의 효율을 추구할 수 있도록, 기억용량은 최소로 유지하면서도 정보의 변별성을 유지할 수 있는 형태로 진화해왔다. 만일 ‘하’, ‘였’, ‘다’를 별개로 저장하고 있으면 뇌의 기억용량을 최소로 이용하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하’와 같은 형태소가 어떤 뜻으로 저장된 것인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하’가 ‘하다’의 동사어간일 수도 있고, ‘下’, ‘夏’, 등의 다양한 다른 뜻의 형태소일 수도 있다. 반면에 ‘하였다’를 전체로 기억하고 있다면, ‘하다’라는 동사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지만, ‘하였고’, ‘하였지만’, ‘하였을’, ‘하였는데’처럼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고 그 변형 모두를 별개의 항목으로 기억해야 한다. 이런 경우에는 기억해야 할 항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기억저장의 문제를 일으킨다. 가장 이상적인 저장형태는 ‘하’가 가지는 여러 의미 중에 어느 것인지를 금방 알 수 있으면서도 기억에는 큰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하였’은 하나로 저장하고 ‘다’는 따로 저장하는 경우에 인간정보처리의 경제성을 이룰 수 있다. ‘하였’으로 저장되어 있으면, ‘하’는 ‘동사’ 의미로만 사용할 수 있고 다른 의미로는 불가능하다. 또한 국어학적으로 볼 때 ‘였’처럼 가운데에 올 수 있는 형태소는 10여 개 정도로 그렇게 많지 않아서 ‘하’다음에 붙어서 변형을 만들 수 있는 가지 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 따라서 의미도 분명하게 할 수 있으며, 기억도 많이 필요하지 않은 이상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하였다’에서 ‘다’처럼 끝 부분에 올 수 있는 형태소는 50가지 이상이기 때문에 앞부분에 붙여서 기억하면 수많은 종류의 변형이 가능하고 이들 모두를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큰 부담을 준다. 따라서 기억의 용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붙여서 기억하는 것보다는 분리해서 별도로 저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위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한글문장은 어절단위로 띄어 쓰며, 명사와 조사로 이루어진 어절은 명사 따로 조사 따로 뇌에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하였다’와 ‘아름다워’ 같은 동사와 형용사 어절은 뜻을 나타내는 앞부분의 형태소와 가운데에서 시제 등을 알려주는 형태소는 하나로 저장되어 있고, 평서문인지 의문문인지 등을 알려주거나 다음 어절과의 연결성을 알려주는 어절의 마지막 부분은 독립적으로 따로 뇌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국어가 교착어이고 형태론이 잘 발달한 언어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한글 문자가 표음적이면서 음절단위로 사용되는 특성과 위에 설명된 내용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필자의 실험실에서는 한글 어절이 뇌에 저장된 부호를 결정하기 위한 실험을 5년 동안 지속해왔다. 첫 번째 연구주제는 위에서 말한 ‘하였’과 같은 어절 일부분이 ‘하’와 ‘였’과 같은 음절단위로 저장되어 있는지, 아니면 ‘ㅎ’, ‘ㅏ’, ‘ㅇ’, ‘ㅕ’, ‘ㅆ’처럼 자소 혹은 음소단위로 저장되어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과는 국어 어절이 음소, 자소, 혹은 형태소 등의 단위로 저장되어 있기보다는 음절단위로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남교수는’과 ‘하였다’ 같은 어절은 ‘남’, ‘교’, 혹은 ‘다’와 같은 음절의 연쇄로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음절의 연쇄로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결정적인 실험은 실어증환자(뇌출혈이나 뇌졸중으로 뇌에 손상을 입어서 언어 사용에 장애가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환자에게 사자 그림을 보여 준 후에 그림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게 하는 과제를 요구하였는데, 흔히 명칭성 실어증으로 분류된 환자는 그림의 이름을 잘 말하지 못하고 본인이 말하고 싶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말을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한다. 마치 우리가 초등학교 때의 짝 이름을 떠올리려고 할 때 얼굴이나 모습은 눈에 선한데 이름이 혀끝에 맴돌아서 잘 말하지 못하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명칭성 실어증 환자에게 약 100여 개의 유치원생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쉬운 그림을 보여준 후에 그림의 이름을 말하게 하면, 이 환자들은 50%도 넘게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환자들은 ‘그곳이’, ‘그것이’ 등의 지시어를 많이 사용하여 문장을 발화한다.

    다음으로, 그들이 이름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그림들을 골라낸 후에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만일에 단어가 머릿속에 음소 단위로 저장되어 있다면, ‘/ㅅ/’로 시작하고 ‘/아/’로 끝나는 단어라고 단서를 주는 경우에 이름을 떠올리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음소를 단서로 제공하는 경우에는 별 효용이 없었다. 그러나 “‘/사/’로 시작하는 단어입니다.”라고 음절단서를 제공하면 즉시 ‘사자’라고 말한다. 신기한 사실은 “‘자’로 끝나는 단어입니다.”라고 할 때에는 ‘사자’라고 말하지 못하다가 “‘사’로 시작하는 것입니다.”하는 경우에는 ‘사자’를 잘 말한다는 것이다. 즉 단어를 뇌에서 찾을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방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에 단어를 왼쪽과 오른쪽 모두에서 동등하게 찾아 들어가는 것이라면, 어떤 종류의 음절을 주든 관계없이 모두 그림 이름을 잘 떠올려야 한다. 그러나 환자는 왼쪽의 시작하는 음절을 제시해준 경우에 더 잘 말한다. 이런 결과는 ‘남교수’ 혹은 ‘하였’과 같은 단어 혹은 어절 일부분이 음절단위로 저장되어 있고, 음절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속 실험에서는 ‘하였다’의 ‘하’ 음절이 철자음절인지 아니면 음운음절인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반란’이라는 단어는 철자음절로는 ‘반’으로 시작하지만, 음운음절로는 ‘/발/’로 시작한다. 언어심리학의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인간에게 ‘학교’라는 단어를 제시하면, 한 번에 바로 ‘학교’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의 첫음절 부분에 의해 단어의 후보들이 뇌의 사전에서 활성화되고, 활성화된 후보 중에 실제 제시된 단어와 같은 것을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단어가 인식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뇌 사전에 국어단어나 어절 일부가 철자음절 단위로 기억되어 있다면, 동일한 철자음절을 공유하는 단어 후보들 간에 경쟁이 있을 것이고, 음운음절 단위로 저장되어 있다면 음운음절을 공유하는 단어 후보들 간의 경쟁이 이루어질 것이다. 실험결과는 ‘반란’의 철자음절인 ‘반’을 공유하는 단어들끼리 경쟁이 일어나지 않고, 음운음절인 ‘/발/’을 공유하는 단어들끼리 어휘경쟁이 일어났다. 즉 국어의 단어나 어절은 쓰인 모습대로의 철자음절로 저장되어 있지 않고 말소리로 읽을 때 생성되는, 또는 들을 때 사용하는 음운음절로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에 대한 설명도 위에서 적용하였던 인간정보처리의 경제성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들을 때나 읽을 때나 동일한 뇌 사전을 쓰는 한국인

    이어지는 실험에서는 이런 음운음절로 단어나 어절을 저장하고 있는 뇌 사전의 경우, 청각을 이용해 단어를 인지할 때 사용하는 것과 눈으로 보고 이해할 때 사용하는 사전이 각각 다른 것인지 아니면 같은 것인지를 조사하였다.

    이 연구의 결과가 아마도 왜 한국인은 국어단어를 음운음절로 저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일부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청각으로 문장을 들을 때나 시각으로 동일한 문장을 읽을 때나 우리는 동일한 의미로 이해한다. 이런 이유는 우리 뇌의 어느 부분에선가 청각으로 언어를 받아들이든 시각으로 수용하든 동일한 곳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문장을 처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필자의 실험에서는 청각과 시각 문장처리 중 어느 단계에서 두 감각 간에 서로 교통이 있는 것인지를 조사해본 결과, 단어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이미 청각과 시각이 만난다는 것이었다. 즉 문장을 청각으로 들을 때에도 단어나 어절을 이해하기 위해 단어를 음운음절로 분절하고 그 분절된 음운음절로 구성된 단어를 뇌에서 찾고, 시각으로 문장을 읽을 때에도 시각단어를 철자음절로 분절한 후에 분절된 철자음절을 음운음절로 전환하여, 뇌 속에서 그 음운음절로 구성된 단어를 찾는다. 즉 시청각 자극을 받아들인 후에 청각이나 시각 모두는 자극을 음운음절로 전환하여 뇌 속의 단어를 찾는다. 그러니까 한국인의 뇌에 존재하는 사전은 들을 때나 읽을 때나 동일한 것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전은 말소리 정보에 기초하여 단어를 저장하고 있는 사전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언어를 처음 배우는 것은 말소리를 통해서이다. 때라서 읽기를 배우기 전에도 어린아이는 이미 말소리로 된 사전을 뇌 속에 지니고 있다. 읽기를 시작하면 우리나라의 아동은 말소리가 투명하게 표현된 한글문자를 본인이 이미 알고 있는 말소리로 전환하는 과정을 학습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이다. 아동은 문자로 표현된 단어를 만나게 되면 먼저 철자음절로 분절하는 방법을 배우고, 그 후에는 철자음절과 음운음절간의 관련성을 배우고, 그리고 철자음절과 음운음절과의 연관성을 적용하여 글 읽기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한국의 아동은 읽기에 사용될 사전을 별도로 뇌 속에 새롭게 구성하는 것보다는 이전에 말소리로 이미 만들어 놓은 사전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읽기를 배우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시각적으로 제시된 단어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영어처럼 철자가 음소를 투명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들을 때 사용하는 심성어휘집과 글을 읽을 때 사용하는 심성어휘집이 별도로 존재한다. 한글을 창제하신 분들은 문자의 제자법이 이렇게까지 단어를 인지하고 저장하는 방법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후세들이 한글문자의 표음적 특성과 뇌 활동의 상관관계를 밝혀낸 것이다.

    이제까지 한글의 언어학적 특성과 글 읽기, 단어인식에 대한 과정을 논의하면서 한글이야말로 매우 과학적으로 말소리를 직접 담아낸 가장 진보한 문자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읽기학습과정과 배운 단어를 인식하는 과정을 살펴본 결과, 한글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여러 종류의 독특하고 효율적인 정보처리가 일어난다는 근거들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유산인 한글을 더욱 갈고 닦으며, 인식과 생성의 원리를 찾는 연구를 계속해 자랑스러운 우리 문자로 발전시켜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2009년 1월 웹진 『온한글』에 게재된 기사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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