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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환의 Design in Cinema #3 〈유브 갓 메일〉에서 엿보는 출판 시장

    북 디자이너는 오래된 책을 탐닉한다


    글. 장성환

    발행일. 2012년 02월 07일

    장성환의 Design in Cinema #3 〈유브 갓 메일〉에서 엿보는 출판 시장

    뉴욕 맨해튼 어퍼웨스트의 이른 아침. 캐슬린 캘리(맥 라이언 분)의 애플 파워북 모니터에 초창기 AoL(American onLine)의 화면이 떠오르고, 추억도 아련한 모뎀의 접속 효과음이 흐른다. ‘또도도도또또··· 츠···으······ 치이···’. 접속 아이디는 ‘Shopgirl(숍걸)’. 메일 상자를 클릭하자 ‘유브 갓 메일(You’ve got mail)’ 알림음이 메일 도착을 알려준다.

    메일을 보낸 이는 아이디 ‘NY152’를 사용하는 조 폭스(톰 행크스 분). 그는 어퍼웨스트의 또 다른 곳에서 IBM 싱크패드로 접속하고 있다. 서로의 컴퓨터와 아이디만큼이나 전혀 다른 두 사람. 영화 〈유브 갓 메일〉(1998)은 이렇게 낯선 남녀가 온라인상에서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메일을 주고받으며 시작된다. 1997년에 시작된 AOL 서비스는 이듬해 이 영화가 개봉하면서 엄청난 홍보 효과와 더불어 급성장을 이루었다고 한다.

    매킨토시를 쓰는 ‘Shopgirl’과는 대조적으로 IBM 싱크패드를 쓰는 ‘NY152’

    부모가 지어준 이름과 달리 온라인 공간에서의 아이디는 본인 스스로가 선택하고 만드는 것이다. 그만큼 사용자의 정체성과 욕구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영화 속 두 아이디 또한 주인공들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Shopgirl’ 캐슬린은 ‘숍 어라운드 코너(The Shop Around The Corner)’라는 조그만 아동 전문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Around The Corner’라는 이름처럼 서점은 길모퉁이에 위치해 있다. 숍 어라운드 코너 서점은 캐슬린이 어머니 세실리아로부터 이어받아 42년째 운영해온 동네 토박이 서점. ‘Shopgirl’이라는 아이디에는 서점에서 일하는 미혼 여성 캐슬린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또한 ‘bookshop’이 아니라 그냥 ‘shop’이라고 명시한 데에서 그녀가 너무 노골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조 폭스의 아이디 ‘NY152’는 자신이 살고 있는 주소다. 아이디치고는 무미건조하다. 거대 북 스토어 체인을 경영하며 비즈니스를 앞세우는 인물다운 아이디다.

    숍 어라운드 코너는 동네와 어울리는 아주 정겨운 서점이다
    영화 속 폭스 문고(Fox Books)는 현실 속 반스 앤 노블(Barnes & Noble)을 연상시키는 대형 서점 체인이다

    두 사람의 공통분모는 낯선 상대와 이메일을 주고받는다는 점, 그리고 규모는 다르지만 각자 서점을 운영한다는 것뿐이다. 그렇다 해도 책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는 무척 다르다. 캐슬린은 자기 서점에 보관된 모든 책들을 훤히 꿰뚫고 있지만, 조는 서점을 철저하게 비즈니스로 대하며 체인점 확장에만 신경을 쓴다. 캐슬린은 메일을 통해서도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오만과 편견』을 이백 번 정도 읽었다며 조에게도 마음에 들 터이니 읽어보라고 추천까지 해준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조에겐 따분하기만 하다.

    영국 BBC에서 방영한 TV 시리즈의 등장인물들을 표지 이미지로 활용한 『오만과 편견』

    이 장면에 등장하는 책 『오만과 편견』은 1995년 그 유명한 랜덤하우스(Random House) 출판사의 자회사인 모던 라이브러리(Modern Library)에서 펴낸 것이다. 1813년 최초로 출간된 이후 영국의 위대한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오만과 편견』은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표지로 출간되었다.

    캐슬린이 들고 있는 책의 표지는 영국 BBC가 제작하고 콜린 퍼스와 제니퍼 엘이 주연을 맡았던 동명의 TV 시리즈 등장인물 사진을 활용했다. 왜 미국 출판사가 출간한 책에 미국이 아닌 영국 드라마 사진을 활용했을까? 1995년 영국에서 방영되기 시작한 이 드라마는 역대 BBC 클래식 드라마 중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고, 미국에서도 평균 저녁 시청률의 두 배를 넘겼던 히트작. 이런 인기를 업고 가기 위해 고전 소설의 표지에 현대의 드라마 이미지를 입혔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런 사례는 북 디자인계에 종종 있으나, 정작 북 디자이너에게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물론 고전 소설의 표지 디자인은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오만과 편견』의 경우도 세계 각국에서 다른 표지로 출판되었음에도, 대부분 여성을 모델로 한 고전 회화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오만과 편견』은 영화 속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이메일로만 서로의 소식을 건네던 두 사람은 결국 직접 만나기로 한다. 이때 캐슬린은 『오만과 편견』 책 한 권과 장미 한 송이를 가지고 약속 장소인 카페 랄로(Cafe Lalo)에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때 캐슬린이 들고 나간 책이 앞선 장면에 나왔던 콜린 퍼스가 등장하는 표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만과 편견』을 이백 번도 넘게 읽었다는 캐슬린은 아마도 마니아답게 다양한 버전의 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캐슬린이 조와의 약속 장소에 들고 나온 『오만과 편견』. 앞선 장면의 책과 표지가 다르다.

    영화에는 『오만과 편견』 외에도 재미있는 책이 한 권 더 나온다. 조가 친척 아이들과 함께 방문한 캐슬린의 서점에서 살펴보던 책이 바로 그것이다. 제목은 『스위스 패밀리 로빈슨』. 여섯 식구가 섬에서 겪는 모험 이야기인데, 우리가 익히 아는 대니얼 디포(Daniel Defoe)의 『로빈슨 크루소』(1719)와는 다른 책이다.

    『스위스 패밀리 로빈슨』은 요한 데이비드 위스(Johann David Wyss)가 쓴 것으로 1920년 출판되었다. 서점 아르바이트생은 이 책에 실린 삽화가 손으로 그린 것이며, 비싼 값만큼 가치가 있다고 조에게 설명해준다. 하지만 영화 속에 나온 책은 아마존닷컴에서 5달러에 살 수 있는 값싼 것이다. 어떻게 된 걸까?

    실제로 이 책의 초판본은 90달러 정도에 거래된다. 즉, 영화 속의 대화는 초판본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활판 인쇄로 제작된 초판본 내지에는 토마스 히스 로빈슨(Thomas Heath Robinson)이라는 유명 작가가 작업한 컬러 일러스트레이션 20장이 별도로 인쇄되어 삽입되었다. 활판 인쇄를 통한 요철이 느껴지는 본문 용지, 그리고 특별히 선택한 회색 종이에 수작업으로 붙인 멋들어진 일러스트레이션이라니···. 듣기만 해도 황홀하다.

    『스위스 패밀리 로빈슨』에 대해 헌책이지만 가치가 있다고 설명해주는 아르바이트생
    영화에 등장한 『스위스 패밀리 로빈슨』 초판본. 유명 작가가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이 돋보인다.

    1904년 옵셋 인쇄 기술이 발명된 지 15년 후인 1920년의 출판 시장을 미뤄 짐작하면, 『스위스 패밀리 로빈슨』 초판본은 초호화판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431쪽 분량에 컬러 일러스트레이션 20장을 포함시켰다는 것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이뿐 아니라 국내 출판 시장의 경우 1970년대 후반까지도 올컬러 출판물이 드물었다는 것을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유브 갓 메일〉은 두 남녀의 아름다운 로맨스를 앞세우고 있지만, 실상 오늘날 출판 업계가 겪고 있는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동네 서점은 사라져 가고 그 자리를 대형 서점과 온라인 서점 들이 대신해 가고 있다. 심지어 온라인 서점 아마존 때문에 미국에서는 그 유명한 서점 체인 보더스(Borders)가 파산하기도 했다.

    동네 서점의 장점은 무엇인가? 오가다 편하게 들를 수 있는 사랑방이자, 단골 손님의 독서 취향을 파악한 주인의 배려 깊은 추천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캐슬린은 자신의 작은 서점이 폐업 직전까지 몰린 상황에서 조 폭스의 대형 서점을 찾아간다. 그녀는 그곳의 아동물 코너를 부러운 듯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다. 그때 어린 딸의 부탁으로 책을 사러 온 엄마와 서점 직원의 대화가 들린다. “신발 나오는 책 있어요?”, “저자가 누구죠?”, “몰라요. 우리 딸이 꼭 사 달래서···.” 난감해 하는 점원에게 캐슬린은 아이 엄마가 찾는 책의 저자와 시리즈까지 알려준다.

    이런 손님의 요구도 들어주는 서점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북 디자인을 하는 입장에서는 캐슬린 같은 주인의 서점에 놓일 책을 디자인하고 싶다. 마치 할인마트의 공산품처럼 가격 할인율과 권수만 평가하는 서점이 아니라, 책을 쓴 저자와 디자인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서점은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걸까?

    역설적이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전자책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이 시점에 오히려 희망적이다. 디지털화되어 가는 콘텐츠의 거대한 흐름에 위압감을 느끼는 대중은, 오히려 아날로그적인 위로를 원하게 되는 것 같다. 동네 구석에서 사멸되어 가던 헌책방들이 절판된 고서적과 온라인 판매를 결합해 차츰 활로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 그 실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도쿄 간다의 헌책방 거리 진보초(神保町)와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서울 신촌의 헌책방 거리도 점차 활기를 되찾고 있다. 갓 나온 새책도 물론 좋지만 헌책에는 오롯한 고유의 가치가 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활판 인쇄로 찍힌 그리운 옛 책들. 세월의 때가 묻은 바래고 나달거리는 책장이지만, 나보다 먼저 이 책을 읽었던 이들의 느낌과 감상을 함께할 수 있는 헌책을 새롭게 바라봐야 할 시점이다.

    장성환

    디자인 스튜디오 203 대표.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 타이포분과 이사, 디자인단체 총연합회 실행위원을 역임했다. 홍익대학교 재학 시절 홍대신문 문화부장을 맡으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졸업 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입사해 잡지를 만들며 서체 디자인 작업을 했고, 이후 『주간동아』 및 『과학동아』 아트 디렉터로 활동했다. 『시사저널』, 『까사리빙』, 『빅이슈 코리아』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서울대학교·서울여자대학교·호서대학교 등에서 편집 디자인 강의를 해왔다. ‘홍대앞’(서교동·망원동·연남동·합정동 등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일대를 일컫는 고유 명칭)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2009년 홍대앞 동네 잡지 『스트리트 H』를 창간하여 홍대앞이라는 역동적 장소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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