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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뜻밖에도 뉴미디어가 장소성을 되살리다

    정보기술의 사용법을 새로 디자인함으로써 '장소'를 부활시킬 수 있다. 장소란 처음부터 장소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 이원곤(단국대 서양화과 교수)

    발행일. 2013년 01월 07일

    뜻밖에도 뉴미디어가 장소성을 되살리다

    가상과 현실이 교차하고 간섭하는 현상이 내게는 중대한 관심거리였다. 이러한 두 개의 공간이 만나는 접점을 인터스페이스 또는 인터리얼리티라고 하는데, 미디어 기술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공간으로서의 ‘장소’에 대한 연구도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 일단 여기서는 ‘장소’란 공간이라는 말보다 다소 좁은 의미인 반면 좀 더 구체적인 공간을 뜻한다는 정도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가상공간이 진화해 온 다섯 단계

    흔히 말하는 가상공간, 즉 사이버스페이스, 버추얼리얼리티 등으로 불리는 실재하지 않는 공간은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 첫 번째인 ‘프레임 너머의 피안’은 원근법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공간이다. 여기서는 프레임을 경계로 가상과 현실이 마주 보고 있는 관계에 있다. 우리는 현실에 발을 딛고 서서 ‘세상을 향하여 열린 창문’이라고 불렸던 프레임 너머의 가상공간을 관조한다. 가령 액자 속 사진이나, 영화관의 스크린, 모니터 속 영상 등을 보면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의 사이에는 넘나들 수 없는 경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가까이서 보고 있지만 그것은 피안의 세계처럼 멀리 있는, 현실의 세계가 아닌 공간이다.

    두 번째는 ‘3D’, 즉 입체영상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바 있는 경계를 넘어선 가상공간으로, 1838년 C. 휘트스톤(Charles Wheatstone)이 양안시차에 의한 입체시(stereoscopic vision)의 메커니즘을 발표한 이래 다양한 미디어에서 실현되었다. 즉, 두 눈에 다른 정보가 들어가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이론으로, 화면 저편의 사건이 입체적으로 돌출하듯 관객 쪽으로 돌진해온다. 이로써 프레임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던 현실과 피안의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입체사진이나 입체영화, 홀로그래피 등 가상공간의 이미지에 리얼리티가 확장됨으로써 가상공간이 현실과의 경계를 넘어 다가온다.

    세 번째는 ‘전방위와 몰입’이다. 18세기에 유행했던 파노라마(Panorama), 디오라마(Diorama)를 거쳐, 시네오라마(Cineorama) 등 이른바 360도 전방위 영상으로 관객의 시야를 커버하는 영상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프레임이 시야에서 없어지는 것은 물론, 관객은 자신이 서 있는 장소를 망각하고 가상의 정보공간 속으로 몰입하게 된다. 사실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서 있는 장소를 잊게 하는 것이 목적인 셈으로, 파노라마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유럽과 미 대륙을 중심으로 대중흥행물로 유행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싸이클로라마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흥행물을 보면 남북전쟁 당시의 모습을 마치 영화장면을 보는 것처럼 느끼도록 했다. 1900년 파리박람회에서 마레오라마라는 이름으로 출품된 작품은 2,500피트짜리 두루마리 그림 두 개를 펼쳐나가면서 관객들이 마치 배를 타고 항해를 즐기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또한, 같은 박람회에 소개되었던 사례 중에는 10대의 영사기로 360도 영상을 쏘는 방법으로 기구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 바르셀로나까지 가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는 시네오라마라 불리는 시뮬레이션 장치가 있기도 했다.

    다음은 위의 몰입형 가상공간에 상호작용이 더해져서 그것이 현실로 지각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단계다. 시카고 대학 데이비드 젤처 교수는 가장 완성된 형태의 가상현실이 되기 위한 모델로서 ‘VR in AIP cube'(1994)라는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가상현실의 제작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그런 형태의 장치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비용문제도 있고 만들어야 할 필요성도 못 느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복합현실’ 또는 ‘증강현실’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사용자의 의식이 현실과 가상세계에 동시에 접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일정한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현실공간과 대치했던 가상공간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현실공간과 조우하고 있지만, 오늘날과 같이 가상과 현실이라는 이질적인 두 세계가 동등한 무게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초유의 상황이다. 예술이나 철학, 종교적 상상력의 무대였던 가상공간은 생활 속에 널리 확장됨으로써 인간 활동의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무대가 되어 왔다. 그리고 현대의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의해 보다 다양한 양상으로 실현됨으로써 이를 무대로 한 창작활동에서 공간에 대한 해석이나 표현이 한층 더 풍부해진 것이 사실이다.

    ‘장소의 기억’의 소생과 예술활동

    하나의 통일된 유비쿼터스 정보환경=기술권(technosphere)에 둘러싸인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기억의 저장고가 되며, 인간은 이동하면서 그것과 만나고, 연결되고, 몰입하며 상호작용하게 된다. 이에 따라 산업사회에서 점점 몰개성화되어가던 ‘장소’들이 갑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가상의 세계는 이 현실세계와 함께 존재하며 융합하게 된다.

    지난 2000년 복합현실형 엔터테인먼트 콘테스트의 대상작이 이를 보여주는 한 예가 될 것이다. 네 명의 플레이어가 투시형 HMD를 쓰고 데이터 글러브를 끼고 모여 있는데, 글러브를 끼고 있는 손을 펴보면 손바닥 안에 물속에서 살고 있는 돌고래가 있다. 손을 움직이면 수면에 파도를 일으켜 돌고래와 놀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돌고래를 훈련시켜 다른 사람 손바닥 안으로 뛰어들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까지의 몰입형 가상공간이 아닌 이중적 리얼리티가 있는 장소를 보여주고 있다. 네 명의 친구들은 현실공간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동시에 가상공간에 접속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언젠가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 동상이 있었던 기록이 숨겨져 있다면, 그리고 그런 데이터 장치를 가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게 된다면 그 기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매우 다양한 방식의 장치로 실현되고 있다. 가령 2006년에 올리버 그립이라는 작가가 지휘하는 팀이 제안했던 것으로, 360도 파노라마로 청계천 복원 사업 전후를 동영상 촬영해 그 데이터를 담은 뷰어를 현장에 설치함으로써 복원 이후에도 이전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자는 제안과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나는 그 아이디어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건설될 광주 전남도청 주변에 적용할 것을 추천하기에 이르렀다. 뷰어를 지금부터 설치하면 전당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도 지켜볼 수 있고,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2012년 이후에도 이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그 반대로 80년대 있었던 사건이나 조선 시대의 모습 등 그 장소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기억을 되돌려 볼 수 있지 않을까? 뷰어도 현재와 같은 기계적인 방식으로 위치 정합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GPS를 이용한 위치정합방식으로 대치한다면, 관람객이 자신의 위치를 GPS로 읽어 그 장소에 기록되어 있는 가상의 데이터를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 나의 제안이었다.

    몇 년 전 완성된 ‘ROME REBORN’ 프로젝트에도 같은 방법을 적용해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대제 시절 로마의 거리와 건축물 등의 모든 좌표를 현재 로마시의 GPS 데이터와 일치시켜 저장해둔다면 사람들은 현재의 길과 건물, 사람들의 모습을 과거의 길과 건물들과 오버랩시키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것은 ‘Rome Reborn 1.0’이지만, 3.0 버전 정도라면 아마도 이런 방식으로 구현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구글 지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로마에 간다 하더라도 자기가 가져간 프로그램에 따라 각기 다른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공간 안에서도 얼마든지 여러 가지 소프트웨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06년부터 독일에서 추진되었던 모바일랩 프로젝트(Mobile lab project)는 장소의 개념을 기반으로 한 예술활동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Location based game, arts, service’ 개발을 위한 연구실로, 버스 안에 각종 정보통신 장비와 예술가들을 싣고 전국 각지의 미술관이나 문화센터를 돌아다니면서 문화적 이벤트를 실행하는 개념의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 중 한 사람이 방문하는 도시마다 하이쿠를 지어 나무 위나 화분 뒤, 혹은 건물 등에 붙이는 방법으로 장소에 대한 기억을 남겼다. 만약 그 시들이 종이 위에 쓰인 채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심어둔 데이터로 남아 있다면 GPS를 이용해서 그 장소에 접근하는 사람은 그 시를 읽을 수가 있을 것이다.

    비슷한 아이디어로, 영국의 어느 소도시에서 만든 사운드 매핑 프로젝트인 ‘Surface Patterns’는, 서로 다른 10개의 장소에 번호를 정해놓은 뒤 원하는 장소의 번호를 누르면 그곳의 지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고 자신의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일 수도 있다.

    몰장소성(Placelessness)과 장소성의 부활

    에드워드 랄프라는 캐나다의 지리학자에 의하면,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생겨난 철도나 자동차와 같은 교통수단, 전화나 인터넷 같은 통신수단 등은 이전 시대의 사람들에겐 중대한 속박이었던 장소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왔다. 이들이 자유와 안락함과 안전에 대한 욕망을 채워주는 기술인 것은 분명하지만, 세계화·지구화가 진행되면서 모든 장소는 그 개성을 잃어버리고 겉모습뿐 아니라 그 분위기마저 동일화되어버린 나머지 어떤 장소든 그 아이덴티티가 대동소이해져 버린다고도 했다.

    사실 철도와 전화의 개발에 따라 제일 먼저 하게 된 작업이 시간과 공간의 통일이었다. 철도나 전화가 나오면서 전 세계적으로 공간과 시간의 표준화가 추진되었고, 시간을 통일하고 좌표를 통일하는 작업이 요구되었다. 예를 들어 건축이나 도시 만들기의 목적 중 하나는 시간과 공간과 관심을 공유하는 동상동몽(同床同夢)의 상태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휴대폰이 보급됨에 따라 다른 공간에 있는 누군가와 계속해서 연결되고 접속과 글쓰기가 끊이지 않는 블로그나 게시판 등의 형태로 관심을 공유하는 이상동몽(異床同夢)이 실현되면서, 그 반대로는 한 장소에 모여있으면서도 모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의 현상이 빚어지곤 한다. 이 같은 현상들은 소통을 너무 많이 하는, 즉 연결의 과잉 때문에 빚어지는데, 결과적으로는 서로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이상이몽(異床異夢)의 세계로 나간다는 데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장소성을 몰락시키는 주범은 정보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면 이를 역이용해서 장소에의 관여를 회복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즉, 정보기술의 사용법을 새로 디자인함으로써 ‘장소’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장소란 처음부터 장소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장소와의 관계와 참여의 반복과 축적을 통해 장소에 대한 감각, 즉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적절한 감각을 가질 때 비로소 장소성을 획득하게 되며, 나아가 이는 행동을 해석하고 구속하는 문맥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장소성의 부활이 전제될 때 정보기술과 미디어를 통한 미적 경험의 확대도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 이 글은 2009년 2월 웹진 『온한글』에 게재된 기사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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