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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환의 Design in Cinema #10 〈맨 인 블랙〉 속 모던 디자인

    디자이너, 미래를 실현하다


    글. 장성환

    발행일. 2012년 06월 28일

    장성환의 Design in Cinema #10 〈맨 인 블랙〉 속 모던 디자인

    멕시코와의 국경 지대.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던 멕시칸 일행이 검문에 걸린다. 이때 검은색 정장을 입은 두 사내가 나타나 국경 수비대를 제치고 밀입국 시도자 중 유독 한 명만을 숲속으로 데려가 심문한다. 심문을 받던 자는 알고 보니 외계인. 목격자들인 국경 수비대들에게 기억을 지우는 플래시를 사용하고 자리를 뜨는 사내들의 정체는 MIB의 비밀 요원. 영화 〈맨 인 블랙〉(1997)의 도입부다.

    장면이 바뀌고 뉴욕의 중앙역인 그랜드 센트럴 역 앞. 제임스 에드워드(윌 스미스 분) 형사가 범인을 추격 중이다. 범인은 인간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도 월등한 점프력과 체력을 가졌다. 결국 달아난 곳은 하얀색 달팽이를 닮은 건물의 옥상이다. 바로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이다. 이 건물은 미국의 가장 위대한 건축가로 칭송받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말년에 설계한 작품이다.

    [위] 달팽이 또는 화장실 좌변기로 불리며 조롱 받았던 구겐하임 미술관
     [아래 좌] 나선형 내부는 꼭대기 층부터 경사로를 내려오며 작품을 감상하도록 하는 구조
    [아래 우] 구겐하임 미술관의 모형을 검토하는 생전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1867년생인 프랭크는 68세이던 1935년에 자연 속 폭포와 어우러지는 주택인 ‘낙수장(Falling water)’이라는 작품으로 건축 경력의 정점을 찍었다. 그로부터 10여년 뒤인 1943년, 갑부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솔로몬 R. 구겐하임으로부터 자신의 미술품을 전시할 미술관 설계를 의뢰 받는다.

    프랭크는 자신이 평생을 통해 추구해왔던 유기적 건축에 걸맞은 나선형 설계를 내놓았다. 기존의 미술관들이 수평으로 이동하며 작품을 감상하고 방과 방으로 연결되는 구조였다면, 구겐하임 미술관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꼭대기 층에서부터 둥근 나선형 경사로를 천천히 걸어 내려오며 감상하는 획기적인 구조였다.

    이 설계안이 공개되자 예술가와 평론가 들의 많은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게다가 제2차 세계 대전까지 겹쳐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고, 그사이 의뢰인이 사망하는 등 악재 끝에 수차례에 걸친 설계 변경을 거치며 완공까지 16년이나 걸리게 된다. 결국 프랭크는 완공 몇 개월 전인 1959년 92세를 일기로 미술관 개관을 보지 못한 채 안타깝게 세상을 뜨고 만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자. 용의자가 구겐하임 미술관 옥상에서 투신자살하자, 그를 쫓던 제임스는 과잉 추격 혐의로 궁지에 몰리고 만다. 이때 MIB 요원 K(토미 리 존스 분)가 나타나 제임스를 구해준다. K는 제임스에게 MIB라는 조직에 대해 알려주며 요원으로 지원할 것을 권한다.

    MIB는 외계인 대응 기구로서 정부의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는 독자적인 비밀 기구다. MIB에 시험을 보러 온 지원자들은 뉴욕시의 평범한 형사인 제임스를 제외하곤 대부분 군 관련 엘리트 출신들이다. 그들이 필기 시험을 볼 때 앉았던 의자가 평범하지 않다.

    이 의자는 〈맨 인 블랙 2〉(2002) 포스터에도 등장한다. 달걀을 반으로 갈라 만든 듯한 모양의 이 의자는 볼 체어(Ball Chair)로 유명한 핀란드의 디자이너 에로 아르니오(Eero Aarnio)가 1956년 디자인한 작품으로 ‘아이볼 체어(Eyeball Chair)’라 불린다. 그가 1963년 디자인한 또 다른 볼체어는 팀 버튼 감독의 영화 〈화성 침공〉(1996)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SF 영화의 단골 의자인 셈이다.

    1932년생인 아르니오는 나이가 들수록 훨씬 더 실험적인 디자인을 시도했다.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강아지 모양의 ‘퍼피 체어(Puppy Chair)’, 망아지 모양의 ‘포니 체어(Pony Chair)’, 새 모양의 ‘티피 체어(Tipi Chair)’에 이르기까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발랄하다.

    [위] [우] MIB에 지원하기 위해 모인 군 관련 엘리트들과 주인공이 앉은 의자가 바로
    [아래] ‘아이볼 체어’를 디자인한 에로 아르니오
     발랄하기 짝이 없는 아르니오의 의자들 / 왼쪽부터 포니 체어, 퍼피 체어, 티피 체어

    엉뚱한 발상의 좌충우돌 형사인 제임스는 K의 보증으로 정식 요원 J로 거듭나게 된다. 현재까지의 모든 신원 정보가 삭제되고 심지어는 지문까지도 지운 채 J라는 이니셜로만 통하는 외계인 대응 부서의 신출내기 요원이 된 것이다. 요원이 되자마자 위수 지역을 이탈하려는 외계인 체포 출동 명령을 받는 J. 그가 MIB 국장의 방에서 앉아 있던 의자 또한 낯익다. 바로 덴마크의 건축 디자이너 아르네 제이콥슨(Arne Emil Jacobsen)이 1958년 코펜하겐의 로얄 호텔을 위해 디자인했던 ‘스완 체어(Swan Chair)’다. 말 그대로 ‘백조 의자’.

    [위] MIB 본부의 인테리어와 잘 어울리는 스완 체어
    [아래] 건축가 겸 디자이너 아르네 제이콥슨과 스완 체어

    디자인 사조를 잠깐 살펴보자. 19세기말 화려하게 꽃피웠던 아르누보(Art Nouveau)에 이어 1930년대를 구가했던 아르데코(Art Deco)는 불황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그 위세가 사그라졌고, 모던 디자인(Modern Design)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아르누보와 아르데코가 형태적 차이는 있으나 장식적인 데 반해, 모던 디자인은 장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유선형을 그 특성으로 한다. 여기에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 즉 구 소련과 미국의 우주 산업 경쟁이 끼친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Sputnik)의 모양은 모던 디자인의 대표적 표상처럼 보인다.

    유사한 형태를 가진 볼 체어와 구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영화 〈맨 인 블랙〉에 등장하는 모던 디자인의 흔적은 의자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바퀴벌레 외계인과 최후의 결전을 치루는 장소는 뉴욕주 외곽인 퀸즈의 플러싱 메도우 코로나 파크(Flushing Meadow-Corona Park)다. 극중 외계인들이 지구에 와서 처음 인간과 접촉하고 화친을 맺은 곳이자, 자신들이 타고 온 우주선을 조형물로 위장해 놓는 곳이다.

    플러싱 메도우 코로나 파크는 1964년 뉴욕세계박람회가 열렸던 장소다. 이 박람회의 테마가 ‘이해를 통한 평화’, ‘인간의 성취에 의한 확대된 우주와 축소된 세계’였다. 이러한 테마와 거대한 지구본 모양이며,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조형물이 영화의 배경으로는 안성맞춤으로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격전지는 뉴욕세계박람회가 열렸던 플러싱 메도우 코로나 파크

    등장인물이 착용하는 선글라스와 정장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수트(Lounge Suit, 라운지 수트의 준말)의 발생 시기를 1840년 정도로 추정한다고 하는데, 초기 형태에서 그다지 많은 변화가 없다. 더구나 상복과도 같은 검은색 정장은 색상마저 절제되어 있어서 시대를 초월하는 디자인이다. 그런 이유로 검은색 정장은 〈맨 인 블랙〉 외에도 SF 영화의 단골 의상이기도 하다. 〈메트릭스〉(1999)의 스미스 요원, 〈가타카〉(1997)의 주인공 빈센트도 검정 정장을 입었다.

    검은색 정장은 시대를 초월하는 디자인의 대표적인 예

    영화 도입부에서 K가 제임스에게 말한다. “인간들은 1500년 전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했고, 500년 전에는 지구가 편평하다고 생각했어. 5분 전에 너는 지구에 인간만 사는 줄 알았지. 내일은 어떤 진실이 기다릴까?” 흔히들 SF 작가를 현대의 예언자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는 현재와 미래의 사이를 연결하는 예언의 실현자가 아닐까?

    장성환

    디자인 스튜디오 203 대표.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 타이포분과 이사, 디자인단체 총연합회 실행위원을 역임했다. 홍익대학교 재학 시절 홍대신문 문화부장을 맡으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졸업 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입사해 잡지를 만들며 서체 디자인 작업을 했고, 이후 『주간동아』 및 『과학동아』 아트 디렉터로 활동했다. 『시사저널』, 『까사리빙』, 『빅이슈 코리아』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서울대학교·서울여자대학교·호서대학교 등에서 편집 디자인 강의를 해왔다. ‘홍대앞’(서교동·망원동·연남동·합정동 등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일대를 일컫는 고유 명칭)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2009년 홍대앞 동네 잡지 『스트리트 H』를 창간하여 홍대앞이라는 역동적 장소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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