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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태의 저작권 이야기 #3 ‘판권’ 아니고 ‘저작권’이 맞습니다

    판권(X) / 저작권(O) ― 김기태 교수가 알려주는 미디어 저작권 상식


    글. 김기태

    발행일. 2020년 04월 24일

    김기태의 저작권 이야기 #3 ‘판권’ 아니고 ‘저작권’이 맞습니다

    베른협약(Berne Convention)은 저작권 보호에 관한 최초의 국제협약이다. 1886년 출범 후, 189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보충되었다. 개정된 규정은 1899년 7월 15일 발효되었고, 이와 함께 일본이 동양 최초로 베른협약에 가입한다. 그해 일본은 자국 내 저작권법을 제정해 1970년 말까지 시행했다. 이를 일본에서는 ‘구 저작권법’이라고 하는데, 당시로서는 선진 외국 저작권법에 뒤지지 않는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유인즉, 베른협약을 기초로 했기 때문.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던 일본은 이미 판권조례, 각본악곡조례, 사진판권조례 등을 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보호 대상은 문서, 도화(圖畫), 사진 등의 제한적 범위에 그쳤고, 외국인 저작물 보호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미숙한 저작권법 제도 하에서, 저작권 사상의 성취는커녕 저작권이란 단어를 아는 사람도 극소수였던 토대에서, 어떻게 베른협약에 기초한 진보적인 저작권법을 제정할 수 있었을까.

    일본이 ‘어쩔 수 없이’ 저작권법을 만든 까닭

    그 배경에는 이른바 ‘안세이 불평등조약(安政の不平等條約)’이 있다. 1853년, 미국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은 배 네 척을 이끌고 일본 우라가(浦賀)에 입항하면서 도쿠가와 막부에 대해 개항을 요구한다. 갑작스러운 개항 요구에 막부(幕府)는 안세이(安政) 5년(1858)에 미국·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와 이른바 ‘안세이 불평등조약’을 맺고 요코하마, 나가사키, 하코다테, 미토 등지에 외국인 거류지를 설치하게 된다. 이에 영지재판(領事裁判) 외에 행정 및 경찰권을 외국인이 장악하고 영구차지권(永代借地權)을 취득하는 사례가 생기게 되었다. 이로써 필연적으로 식민지적 성격을 가지는 지역이 일본 각지에 발생했다. 이처럼 불평등조약으로 인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일은 결국 메이지 정부의 최대 과제로 남기에 이르렀다.

    메이지 정부는 불평등조약을 바로잡기 위한 전제로서, 근대적 법치국가의 형태를 다지고자 했다.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을 시작으로 1898년 민법, 이어서 상법을 제정해 근대법전 정비를 서둘렀고, 그 일환으로 1899년 저작권법도 제정하게 된다. 불평등조약을 시정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1894년 런던에서 영일통상항해조약(英日通常航海條約)이 조인되었는데, 그 내용 중에 “일본 정부는 자국 내 영국영사재판권 폐지에 앞서 공업 소유권 및 저작권 보호에 관한 만국동맹조약(베른협약)에 가입할 것을 약속한다”는 사항이 있었다. 이 규정을 이행하려면 베른협약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미국, 러시아, 독일 순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해 나갔다.

    이렇듯 일본의 근대적 저작권 법제 구축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부 또는 국민 스스로의 노력으로 저작권 사상이 무르익어 이루어졌다기보다, 외세의 개입에 이끌려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결과였던 셈이다.

    일본어 잔재 중 하나인 ‘판권’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 그는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일본인들에게 저작권 보호의 당위성을 맨 처음 호소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막부 말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그 문물과 법 제도를 접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노동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념을 갖게 되었다. 자연스레 그는 저작 및 실천 활동을 통해 무체재산이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를 설파했는데, 바로 이런 점에서 일본 저작권 역사상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인물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초기작 『서양사정외편(西洋事情外編)』(1868) 제3권에서 「사유(私有) 책을 논한다」라는 제목으로, “사유에는 두 종류가 있어, 하나를 이전(移轉)이라 하고, 하나를 유전(遺傳)이라고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이전’이란 동산(動産)을, ‘유전’이란 부동산을 뜻한다. 이 문장에 이어서는 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유의 종류에는 또한 한층 아름다움을 다하여 번영하는 비밀스러운 것이 있는데, 즉 발명면허, 장판면허(藏版免許) 등이 그것이다. (···) 책을 저술하고 그림이나 도안을 제작하는 사람도 그것을 그 사람의 장서로 만들고, 개인의 이익을 얻기 위한 면허를 받아 사유재산으로 만든다. 그것을 장판면허(카피라이트)라고 부른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바가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장판면허’를 “저술가가 홀로 그 책을 판목(版木)으로 제작하여 전매 이익을 얻는 것”이라 정의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는 1873년(메이지 6년) 7월 15일자로 작성한 문헌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카피라이트(copyright)’는 이전에 ‘장판면허’라 번역했지만 이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 ‘카피(copy)’는 옮기는 것을 뜻하고 ‘라이트(right)’는 권리를 뜻한다. 즉 저술자가 책을 저술한 뒤 이를 옮겨 판본으로 만들고 당사자가 자유롭게 취급하여 다른 사람이 이를 복제할 수 없게 하는 권리이다. 이 권리를 얻은 자를 ‘카피라이트’를 얻은 자라 칭한다. 그러므로 ‘카피라이트’라는 단어는 출판특권, 혹은 이를 줄여서 판권(版權)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일본인의 생각대로 이 책을 저술하는 데 지장이 없고, 어떠한 일을 적음에 있어서도 남이 꺼려하고 싫어하는 내용으로 비위를 거스르는 일이 없는 한 정부에서 그 출판을 허가하는 취지와는 다르다. 책을 쓰고 사건을 기술함은 그 사람의 견해에 따라 자유로이 할 수 있으며, 타인의 저술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지장이 될 것이 없다. 단지 정부의 직분은 약속대로 위판(僞版)을 막는 것뿐이다.”

    이렇듯 후쿠자와 유키치는 카피라이트라는 말을 ‘출판권(出版權)’ 혹은 줄여서 ‘판권’이라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여겼고, 그래서 판권이라는 단어를 제창하게 된다. 그 결과 1875년 출판조례에는 법조문상 저작자, 번역자의 권리를 ‘판권’이라고 한다는 점이 분명하게 규정되었다. 시간이 흘러 ‘판권’은 더 이상 법률용어로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말은 일반에 널리 퍼져 쓰였고,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흔한 단어가 되고 말았다.

    영화 판권, 사진 판권(×) / 영화 저작권, 사진 저작권(○)

    ‘저작권(著作權)’이란 용어를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은 누구일까? 일본의 구 저작권법(1899년 제정) 입안자로 알려진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郞, 1868~1949)라는 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독도는 한국 땅’이라 말하기도 한) 학자 구라다 요시히로(倉田喜弘)의 『저작권 사화(著作權史話)』(1983)라는 책에 따르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1883년 9월 10일부터 스위스 베른에서 국제문예협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발의된 베른협약 초안 및 의사록을 스위스 정부는 세계 각국에 송부하면서 대표의원 파견을 요청한다. 그중엔 일본도 포함돼 있었다. 1884년 3월 26일 일본 정부의 외무대신, 문부대신, 내무대신, 농상무대신 앞으로 공문을 보낸 것이다. 같은 해 5월 16일자로 회신한 농상무성 답변서에 이런 표현이 있었다. “이 나라는 아직 미술상의 저작권을 보호하는 법이 없어 스위스 정부에서 제안한 ‘문학 및 미술의 저작권보호동맹’(베른협약)에 가맹하는 것은 사절(謝絶)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다.

    이 문서가 바로 ‘저작권’이란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례라는 게 구라다 요시히로의 주장이다. 스위스 정부에 대한 일본 농상무성의 답변서 이후, 저작권 관련 국제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석하는 사람들의 보고서에서 자연스럽게 ‘저작권’이란 용어가 사용된 것이지, 미즈노 렌타로가 처음 만들어낸 말은 아니라는 반론인 셈이다.

    아울러 신문 기사에도 이미 1887년 ‘저작권’이란 말이 사용된 것으로 나타난다. 1887년(메이지 20년) 4월 19일자 메사마시 신문에 「문학 및 기예상 저작권 보호조약 확정회의」라는 제목으로 “베른회의에 위원으로서 참가한 외무성 서기관 쿠로가와 세이치로 씨가 이번 회의의 의결보고서를 이노우에 외무대신에게 송달했기 때문에 현재 번역 중이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이러한 여러 정황을 토대로 살펴볼 때, ‘저작권’이란 용어는 어느 특정인이 창안한 것이라기보다는 관계자들의 회의 과정에서 누군가에 의해 제안된 것이 자연스럽게 쓰인 결과일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1887년 제정된 판권조례, 1893년 제정된 판권법 등의 용례와 맞물려 혼용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그런가 하면, 1903년 10월 일본과 청나라 간 조인된 ‘추가통상항해조약’에서 일본어의 ‘판권’이 중국어로는 ‘인서지권(印書之權)’으로 번역되었는데, 이때는 ‘저작권’이라기보다는 ‘출판권’을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판권’ 얘기로 돌아오자. 이 용어는 우리나라에도 유입돼 지금까지도 ‘저작권’을 뜻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심지어 음반 발매나 영화 제작 분야에서는 ‘저작권’보다 더 널리 쓰이는 형국이다. ‘출판권’이라고 해야 할 것을 ‘저작권’이라고 하거나, ‘저작권’이라고 해야 할 것을 ‘출판권’ 또는 ‘판권’이라고 하는 사례도 많다.

    예를 들어, 번역 도서에 등장하는 ‘한국어판 저작권’이란 용어는 ‘한국어 출판권’이라고 해야 옳으며, ‘영화 판권’ 또는 ‘사진 판권’이란 말은 ‘영화 저작권’ 또는 ‘사진 저작권’으로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여전히 저작권을 공식적으로 ‘판권’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한 번 각인된 식민지 사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 깨닫게 된다.

    저작권 연구자, 세명대학교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교수.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미디어와 저작권의 상관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출판 편집자로 일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문헌번호운영위원장, 한국전자출판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연구재단 연구윤리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각종 기관과 단체에서 저작권 및 연구 윤리에 관한 자문, 강의를 맡고 있다. 2018년 ‘생활 속의 표절과 저작권’이 K-MOOC 강좌에 선정되었다. 저서로 『출판실무와 저작권』, 『김기태의 저작권 수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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