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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 디자이너 이재진

    뉴욕 한복판에서 온 힘을 다해 ‘규정’과 ‘고정’에서 벗어나기


    인터뷰. 임재훈

    발행일. 2021년 01월 11일

    그래픽 디자이너 이재진

    그래픽 디자이너 이재진은 미국 뉴욕의 디자인 에이전시 2×4(투 바이 포)에 근무하고 있다. 한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뒤 칼아츠(CalArts, 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서 석사를 마쳤고, 그러고는 뉴욕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이탈리아의 패션 브랜드 프라다(Prada) 관련 프로젝트들,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Wes Anderson)과 일러스트레이터 유만 말로프(Juman Malouf)가 큐레이팅 한 전시 〈Spitzmaus Mummy in a Coffin and other Treasures〉(‘관 속에 잠든 스피츠마우스 미라와 또 다른 보물들’)의 카탈로그 디자인 등 꽤 규모가 큰 작업들에 꾸준히 참여했다.
    
    그런 중에도 〈타이포잔치: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이하 ‘타이포잔치’) 같은 한국에서의 디자인 활동도 겸해 오고 있다. 생활인 이재진의 근거지는 뉴욕이지만, 디자이너 이재진으로서는 딱히 정주하는 거처를 두지 않는 셈이다.
    
    이 디자이너는 자기 커리어가 국적 혹은 신원에 의해 규정/고정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는 것 같다, 라는 인상을 에디터는 받았다. 이재진을 인터뷰해보고 싶었던 이유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으며 칼아츠 대학원 생활을 하셨더군요. 대학(학사) 졸업 무렵 자기 계발에 대해 상당한 각오를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먼 타국에서 유학과 디자이너 생활을 해보기로 결심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목표를 이루었다기보다는, 막연한 희망과 순간순간의 선택에 따라, 그리고 적당히 따라준 운 덕분에 현재 외국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학사 시절에는 매일매일 학교 과제에 시달리느라 외국에서 일하겠다는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은 가지고 있지 않았었습니다.

    다만 제가 학교에 다닐 당시, ‘슬기와 민’ 선생님들이 한국에 돌아와 왕성하게 활동하셨던 시기였기에 유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친한 친구가 풀브라이트라는 장학금을 알려준 시기도 이때쯤이었습니다. 집안 형편상 유학을 준비할 수는 없었고, 제가 할 수 있었던 건 학점 관리밖에 없었기에 주어진 학교 과제만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새 졸업하게 되었죠.

    졸업 후에는 프리랜서 모션 디자이너로 여기저기서 일하면서 경험을 쌓았지만, 좀더 배우고 싶다는 욕구가 커져서 뒤늦게야 유학을 결심했고 풀브라이트를 준비했습니다. 운 좋게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된 덕분에 미국으로 건너와 석사 생활을 시작했고, 졸업 후 지금까지 뉴욕의 디자인 에이전시 2×4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2×4의 오랜 클라이언트 중 한 곳이 프라다입니다. 2019년 여름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프라다가 브랜딩 전략을 대폭 손질했습니다. 경쟁사인 구찌(Gucci)나 루이비통(Louis Vuitton)과 달리, 프라다만 유독 매출 하락세가 이어진 탓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의 몇몇 경제지들을 통해 접했습니다만, 프라다의 브랜드 리뉴얼은 한마디로 대성공이었다고 하더군요. 디지털 세대를 겨냥한 마케팅 성공 사례로 소개된 기사 몇 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프라다가 1913년 만들어진 브랜드잖아요. 100살도 더 먹은 회사가 ‘젊어지는 일’이란 게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2×4의 2019~2020년 프라다 관련 프로젝트들이 흥미로웠어요. 100여 년 된 회사의 ‘젊어져야 하는’ 욕구를 세련되게 충족시켜주는 일이 관건이었을 듯합니다. 프라다와 함께한 대표적인 프로젝트들 몇 가지만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2018년 이전까지 프라다의 소셜미디어 관련 프로젝트는 주로 2×4나 OMA에서 진행했었습니다. 소셜미디어를 위한 프라다 인하우스 디자인팀이 만들어진 후로는 프라다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디자인 작업을 했어요. 그렇다 보니 2019~2020년 2×4가 맡았던 프라다 프로젝트들은 프라다의 리브랜딩과는 거리가 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제가 참여했던 몇몇 프로젝트를 소개해드리는 것이 에디터님의 궁금증에 대한 답변이 될 수도 있을 듯하네요.

    2×4는 다양한 클라이언트와 함께하고 있는데, 제 경험으로는 프라다가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인 클라이언트라고 생각합니다. 이 브랜드가 트렌드에 민감하면서도 전통을 중시하고, 고급스러우면서도 못생긴 것들을 사랑하거든요. 이른바 ‘Ugly Chic’입니다. 그래서 프라다 프로젝트를 할 때면 미학적 측면에서 좀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서 재미를 느낍니다. 프라다 월페이퍼 프로젝트가 이러한 면모를 살펴보기에 가장 적절할 것 같네요.

    월페이퍼는 뉴욕 소호 스토어 내부의 60m 정도 되는 벽면에 설치되는 거대한 작업으로, 2×4에서 지난 20년간 디자인을 맡아왔습니다. 매 시즌마다 새로 설치되는 월페이퍼를 위해 회사 내 모든 구성원이 자유롭게 참여하니까 굉장히 흥미로운 스케치들이 많이 나옵니다. 프라다의 아카이브 사이트에서 그동안 설치되었던 월페이퍼를 살펴본다면, 아름답고 세련된 이미지들도 많지만 이게 뭔가 싶을 정도로 이상하고 기이한 이미지들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또 다른 프라다 프로젝트를 꼽으라면, 2018 Women’s Show 공간을 위한 프로젝트가 가장 먼저 생각나네요. 2018 Women’s Show 바로 전에 미술가 제임스 진(James Jean)과 협업한 2018 Men’s Show를 같은 공간에서 먼저 했었는데, 주요 콘셉트가 ‘만화’였습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프라다는 이 만화 콘셉트의 공간을 유지하면서 Women Show를 위한 여성적인(Feminine) 콘셉트를 발전시키려고 했습니다.

    오랜 기간 아이디어 회의와 스케치 끝에 여성 그래픽 노블 작가들이 만들어낸 ‘강인한’ 여성 캐릭터들을 만화 공간 위에 덧씌우는 방향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여성의 사회적 정체성/역할이 어느 시기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의성을 고려해 볼 때 의미가 깊은 작업이었습니다.

    프라다 2018 Women’s Show 런웨이 공간 디자인, 2017

    웨스 앤더슨과 그의 연인이기도 한 일러스트레이터 유만 말로프가 공동 기획한 전시 〈Spitzmaus Mummy in a Coffin and other Treasures〉의 카탈로그 제작을 담당하셨죠. 이 전시가 2018년에 오스트리아의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에서 개최된 다음, 이듬해 이탈리아 밀라노의 ‘폰다치오네 프라다(Fondazione Prada, 프라다가 운영하는 미술관)’에서 앙코르전을 연 것으로 아는데요. 제가 웨스 앤더슨 감독의 팬이라, 이 전시가 두 번이나 열렸음에도 관람하지 못한 게 무척 한스럽습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이 직접 큐레이팅을 맡은 전시인 만큼, 카탈로그의 만듦새 하나도 본인이 직접 체크했을 것 같습니다. 카탈로그 제작 후기를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웨스 앤더슨과의 에피소드도요!(웃음)

    이 프로젝트는 배경부터 굉장히 흥미로운 작업이었습니다. 빈 미술사 박물관은 2012년부터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을 큐레이터로 초청해 전시를 구성하는 시리즈를 시작했는데, 웨스 앤더슨과 유만 말로프도 초청되어 2018년 〈Spitzmaus Mummy in a Coffin and other Treasures〉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열었습니다.

    박물관 큐레이터들의 일반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두 작가는 자신들의 취향과 직감만을 기준으로 오브제들을 선별하고, 그것들의 맥락을 제거한 채 색, 크기 등과 같은 시각적 특징들을 기준으로 전시를 구성했습니다. 예를 들어 ‘녹색 섹션’은 시대적/지역적 맥락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녹색인 오브제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미니어처 섹션’ 또한 마찬가지로 작은 오브제들로만 구성되었습니다.

    이후 두 작가는 폰다치오네 프라다에도 초청돼 거의 동일한 구성의 전시를 다시 한 번 밀라노에서 열었는데요. 이 전시의 카탈로그 디자인을 2×4가 맡은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전시 때 이미 카탈로그가 나와 있었기에, 밀라노 전시에서는 기존의 카탈로그보다 조금 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카탈로그의 구조부터 구성품과 재료에 이르기까지 ‘아카이브 도구’라는 콘셉트를 구현하려고 했습니다.

    웨스 앤더슨과 유만 말로프가 큐레이팅했던 모든 오브제들을 디자인 작업 내내 지겹게 들여다봤는데(웃음), 두 작가의 안목에 몇 번이나 감탄했었습니다. 초상화 섹션에 모아두었던 거인과 난쟁이의 초상화라든지 털이 복슬복슬한 가족의 초상화들도 너무 기이해서 기억에 남고, 다양한 녹색의 물질들(도자기, 청동, 천, ···)이 어우러진 녹색 섹션도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한국인이라 그런지 19세기 조선 시대 세자를 위한 예복을 보관하는 함이 있었던 것도 기억에 남네요.

    두 작가가 선택했던 오브제들을 통해 웨스 앤더슨 영화 소품들의 원형을 엿보는 느낌이 들기도 해서 재미있게 작업했습니다. 전시는 끝났지만 카탈로그에 있는 대형 포스터를 통해 전시되었던 모든 오브제들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으니 한 번 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카탈로그 디자인은 주로 폰다치오네 프라다의 큐레이터 마리오 메이네티(Mario Mainetti)와 작업했기에 아쉽게도 두 작가와 직접적인 소통은 거의 없었습니다. 가끔 진행 과정을 두 작가에게 공유하면서 간단한 피드백을 받는 정도였죠. 다만, 프로젝트가 끝나고 웨스 앤더슨과 유만 말로프의 사인이 들어간 책을 받았을 때는 기분이 새삼 좋았습니다.

    〈Spitzmaus Mummy in a Coffin and other Treasures〉 포스터, 2018

    개인 사이트 대문 하단에 작게 소개된 한 작업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TypEmoji’(2017)라는 작업요. 회사 홍보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운영사인 윤디자인그룹이 최근 ‘글자티콘’을 표방한 서비스(CONT.kr)를 론칭했습니다. 사용자가 입력한 텍스트 메시지를 텍스처 이미지로 변환해주는 서비스예요. 글자티콘이란 게 ‘글자’와 ‘이모티콘’의 합성어거든요. 왠지 TypEmoji의 맥락과도 얼마간 상통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이 작업의 기획 의도와 콘셉트가 궁긍합니다.

    typEmoji는 칼아츠 대학원 졸업 작품입니다. 글자와 이모티콘을 합성한다는 관점에서는 말씀해주신 ‘글자티콘’과 맥락을 공유하는 것 같네요! 신기해서 한 번 찾아봤는데, ‘메시지’를 ‘이미지’ 형태로 ‘변환’해주어 마치 이모티콘처럼 상대방과 소통을 한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typEmoji는 타이포그래피의 합자를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문자’를 ‘이모지’와 ‘합성’하여 새로운 글꼴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입니다.

    컴퓨터가 발달하고 휴대전화가 우리 일상에 녹아들면서 문자로 소통하는 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사소통을 할 때는 메시지 자체뿐만 아니라 그 외적인 요소들이 소통을 원활하게 도와주고 있죠.

    예를 들면 목소리 톤이라든가, 말하는 속도, 크기, 손의 제스처, 눈빛, 눈썹의 각도 등에 따라 같은 메시지라도 미묘하게 뉘앙스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문자 소통에는 항상 이런 뉘앙스 전달에 한계가 있었기에 이모티콘, 이모지 같은 보조 도구를 사용하여 보완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문자만 쓰면 무표정으로 말하는 것 같고, 이모지/이모티콘을 붙이면 발랄하게 이야기하게 되는 이분법적 한계를 느꼈습니다.

    typEmoji는 글자에 이모지가 붙여질 때, 이모지에 반응하여 폰트를 변화시켜 무표정과 발랄함 사이의 미묘한 뉘앙스를 찾아보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기존 콘셉트는 이모지에 따른 서체 시리즈를 제작하려 했지만, 현재까지는 고스트 이모지를 기반으로 제작한 ‘typEmoji: SF Ghost’ 하나만 완성되어 있습니다. 문자를 입력하고 고스트 이모지를 덧붙이게 되면 자동으로 ‘typEmoji: SF Ghost’ 서체로 변환되어 발랄하지만도 않고, 무표정이지만도 아닌, 뭔가 귀엽기도 하지만 으스스하기도 한, 그런 미묘한 뉘앙스를 만들어 냅니다.

    2019년 〈타이포잔치〉 때 신상아 디자이너와 한 팀으로 참여하셨죠. 당시 “느슨한 협업 활동”을 이어가는 관계라고 소개하셨던데요. 이게 어떤 관계인 거죠?(웃음)

    느슨한 협업 관계라고 말한 것은 우선, 각자 디자이너로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필요할 시에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협업을 이어가는 선택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신상아 디자이너는 학사 시절 한국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특별한 정서적 친밀감과 신뢰감을 쌓아온 파트너입니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내며 관심사나 취향을 공유해왔지만 최근 들어서야 ‘귀여움의 양가감정’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조금씩 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신상아 디자이너는 서로 굉장히 편하고 허물없는 사이라서, 적당한 거리 조절이 필요한 관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느슨한’이라는 단어는 협업 관계에 있어 저희가 지향하는 심리적 거리감이기도 합니다. 학부 시절엔 보고 듣는 것이 서로 매우 비슷했지만 저는 미국의 칼아츠로, 상아 씨는 네덜란드의 베르크플라츠 티포흐라피(Werkplaats Typografie)로 석사 공부를 하며 매우 다른 디자인 교육 및 환경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작업을 풀어가는 태도나 시각에 있어서 각자만의 개성이 더 뚜렷해진 부분이 있어요.

    이 부분이 쉽게 마찰로 이어지기도 하므로 느슨한 관계를 통해 서로의 독립적인 부분을 인정하고 존중하려고 합니다. 앞으로는 더 꾸준한 협업을 이어나갈 계획이어서 최근 ‘Formless Twins’라는 팀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귀여움과 키치함에 대해 재밌게 풀어나갈 생각이에요.

    2019 〈타이포잔치〉 출품작 ‘마스코트(Mascot)’
    디자이너 신상아와 협업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로서, 2021년을 맞는 기분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트럼프/공화당 정부에서 바이든/민주당 정부로의 정치적 변화, ···. 이런 요소들이 현지 디자이너의 일상에 크든 작든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2021년엔 뉴욕시장 선거도 있죠? 여러모로 변화무쌍한 한 해를 맞이하실 듯한데요. 디자이너 이재진은 어떤 새해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지난 3년간 2×4라는 에이전시에 소속된 디자이너로서 값진 경험을 쌓아왔기에, 이제는 이재진이라는 한 명의 독립된 디자이너로서 활동 반경을 확장해보고자 합니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발을 넓혀보겠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클라이언트 프로젝트가 아닌 저의 관심사에서 비롯된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해보고 싶습니다. 신상아 디자이너와 함께 ‘Formless Twins’라는 팀명으로 활동하려는 계획도 그 일환이 되겠네요.

    대학원 시절 작업들이나 〈2019 타이포잔치〉 작업들 같은 개인 작업들이 저에게는 디자인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게 해주는 원동력입니다. 이러한 작업을 지속해야 즐겁게 오래 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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