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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感(감)

    '감(感)'은 정확하지 않다. 가변적이다. 매번 다르다. 각기 다르다. 고유한 것이다.


    글. 백영주

    발행일. 2013년 03월 19일

    感(감)

    공간(空間)은 간격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간격(interval)이란 어떤 요소와 요소가 만들어 내는 사이, 틈, 거리를 뜻한다. 간격은 어떤 관계의 구성을 암시하는데, 이는 시간적이고도 공간적인 것이다. ‘사이(間)’ 만들기는 일상의 레벨에서 실천되고 있다. 하루의 일과를 짤 때, 길을 걸을 때, 자동차를 운전할 때, 음식을 만들 때, 사람을 만날 때, 조직을 재편할 때, 물건을 구입할 때조차 내 몸을 중심으로 상하, 좌우, 전후로 거리 두기, 선 긋기, 각 잡기, 위와 계 세우기가 실행된다. 예컨대 나와 너, 안과 밖을 구분하고, 위아래를 따지며,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어디에 그어야 할까 고민한다. 언뜻 이는 수학적 사고에 기반을 둔 이성적인 행위 같지만, 실상 우리는 수시로 경계 허물기와 위치 재조정을 번복하며 온갖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을 투사한다. 구분과 구획은 다름의 인지이고, 융통성이라는 것은 정해진 경계선을 때에 따라 가로지를 줄 아는 판단력이며, 소통이란 서로 다른 존재임을 인정한다는 전제 아래 그 사이를 터 놓는 일이다. 분리하고, 배치하고, 구성하고, 허물고, 세우는 모든 공간적 행위는 물리적인 현상인 동시에 사회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관계의 망 안에 있는 우리는 몸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접촉하며 느끼는 감각적인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불확실과 불안정의 속성을 지닌 시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생물체, 인간과 사물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어우러져 어떠한 상황을 이루고 있다. 상황이란 자연법칙적 세계가 아닌 의미를 가지는 현실이며, 여기에는 사회적 역학 관계가 내제하게 된다. 관계는 힘의 논리로 움직이다가도, 특정 개인의 의지나 바람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관계는 친밀하다, 차갑다 등의 수많은 촉각적 표현으로 존재의 상태를 드러낸다. 동시에 이는 멀어지고, 식는다 등의 진행 과정으로 표현된다. 때문에 이는 유동적이고 전이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시간이란 것은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게 흐르는 것이지 움켜쥐거나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경험을 과거, 현재, 미래로 삼등분하는 것은 인간적 인식의 틀이요, 영원이란 개념도 인간적 바람이 만들어낸 상(象)일 뿐이다. ‘빨리빨리’, ‘느림의 미학’ 등, 속도의 개념으로 시간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다. 이는 시간의 간격을 특정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우리 인식의 구조, 가치관 문제이다. 집 나간 고양이가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고 있거나, 옆집 강아지가 다가올 미래를 고민하며. 하루가 빨리 간다고 조바심내고 있을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눈에 좀 보이던가, 냄새라도 나면 ‘감'(感)이라도 잡겠는데, 실체가 없는 시간은 그 속성상 불확실한 것이고 불안정한 것이다.

    ‘감’보다는 객관적인 틀에 의지하며

    축복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을 과학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세상에 태어났다. 자본주의 세계에 태어나 길든 이 몸은 애매하기 그지없고 천차만별인 ‘감’보다는 아무래도 객관적인 숫자와 숫자로 만들어진 틀에 의존하길 원한다. 하루는 24등분으로 파이 조각처럼 균일하게 쪼개지고, 한 달은 반듯하게 칸칸이 나누어져 있다. ‘구획’이라는 공간적 행위 덕분에 시간은 그릇에 담기듯 구분되고 가두어진다.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이 생긴다.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칸에 맞춰 하루의 동선을 짤 수도 있으니, 효율적으로 하루를 움직일 수 있다.

    시간은 공간적 논리로 관리되고 통제되고 있으며, 우리 삶도 이에 따라 직조된다. 누가 내 인생을 좌표로 찍어주겠다는 날이 올 수도 있다. 로드 매니저 엄마가 짜준 스케줄과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에 온몸을 내맡긴 어린 학생들을 보면, 그날은 이미 왔는지 모르겠다. ‘다름’은 ‘틀림’ 이고, ‘차이’는 ‘차별’이 되며 ‘평등’이 ‘똑같음’을 뜻하는 세계의 논리는 수치와 그리드로 재단되는 획일적 삶을 양산한다. 삶의 다양한 리듬과 굴곡을 탄다는 것은 불안하고, 귀찮기까지 한 것이다.

    위치를 바꾸면 보이는 풍경도 변한다

    내가 거주할 공간과 삶의 경험도 찍어내고, 관리하고, 거래하기 편하게끔 규격화되고 표준화된 여러 개의 형식 중의 하나를 고르면 된다. A, B, C, 1, 2, 3급으로 구분되어 비교하기도 편하다. 삶의 조직을 짜는 일이, 성의 없이 구성된 종합세트를 구입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이 매우 의심쩍지만, 주어진 틀에 길든 몸은 이를 ‘보편적인 것’이라 철썩같이 믿는 듯하다.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며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몸은 고정관념을 형성한다.

    편견과 차별은 몸의 지각 문제이다. 관점(viewpoint)은 내가 자리 잡은 위치에서 보는 것이다. 내 위치를 바꾸면 보이는 풍경도 변화한다. 관습은 몸의 습관이 만들어낸다. ‘감성’의 사전적 정의는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이다. 내가 외부세계와 상호 접촉하며 느끼고 생각한 것은 내 몸의 감각기관을 통해 내면화되고, 이는 다시 외부로 표현된다. 우리는 공간환경의 산물인 동시에 주체이다. 감성은 구조적인 문제이다.

    내 몸이 발견하고, 기억하고, 움직이며 만드는 이야기

    ‘감’은 정확하지 않다. 가변적이다. 매번 다르다. 각기 다르다. 고유한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의 경험을 계측하고 표준화하여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이를 보강하며 그 가능성을 확장하려는 욕망을 내려놓질 않는다. 기술 매체와 몸의 결합을 꿈꾼다. 기술 매체는 이미 일상의 조직에 깊이 침투하였고, 온몸의 감각을 매개한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와 기억 대부분이 매체가 보여주고 들려준 것들이다. 스크린을 누비며 문자를 날리는 손가락의 놀림은 빨라지고, 넘어가는 화면 소리에 묘한 쾌를 느낀다. 그만큼 직접 보고 듣고 말하며 체온을 느끼고, 너와 나 사이의 차이를 느끼며 고민하는 촉각적 경험의 기회는 감소한다. 말초신경을 마사지해주는 정보 홍수에 상시 노출되어 있고, 맥락 없는 이미지를 자르고 붙이는 표면적 경험은 늘었다. 외부자극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면 신경쇠약에 걸릴 수 있다. 자극에 노출된 몸은 피곤하다. 생각하기 귀찮아진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는다. 감각은 편중되고 감성은 무뎌지며, 시야는 좁아지는데, 쾌에 대한 욕구는 강해진다. ‘감으로=대충대충’, ‘자기표현=제멋대로’란 자기편의적 해석이 나올 만도 하다.

    합리와 이성의 산물이라는 테크놀로지가 발달하면 할수록 비평적 사고 능력은 오히려 저하되는 듯하다. 표면적 자극은 피로감을 유발한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보다,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타인의 시선이 중요한 세계에서는 외부로 보여주는 것에 집착한다. 때문에 표면을 ‘치장’한다. 번쩍거리는 쇼(show) 무대는 화려하다. 표면적 효과가 아닌, 표현적 삶의 방식으로서 몸시간공간의 상관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세상에 단 하나인 내 몸이 발견하고, 기억하고,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차이와 틈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싶다.

    백영주
    현재 중앙대학교 공연영상창작학부 공간연출전공 교수이다.
    뉴욕파슨스 디자인스쿨과 예일대학 드라마스쿨에서 연극과 디자인을 전공하였다.
    주요 관심사는 사람, 공간, 매체 간 상호관계에 관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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