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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T』 9호 미리 보기 #4 극장 간판화가 백춘태 선생

    타이포그래피 매거진 『the T』 9호 미리 보기 ― 극장 간판화가 백춘태 선생


    글. 임재훈

    발행일. 2017년 07월 21일

    『the T』 9호 미리 보기 #4 극장 간판화가 백춘태 선생

    이 글은 국내 유일의 타이포그래피 전문지 『the T』 제9호(혁신호) 중 
    ‘특집 · 한국 디자인 생태계 1 ― 1950~1960년대 영화 타이포그래피’ 섹션의  
    「개봉날이 나의 전시 개막일 ― 극장 간판화가 백춘태」 전문을 옮긴 것입니다.
    사진 제공: 국가기록원

    이곳은 종로3가. 이른바 ‘종로 극장가’라 불리는 번화가다. 오랜만에 한껏 차려입은 당신은 몹시 고민 중이다. 하필이면 오늘 보기로 한 영화가 동시 개봉작이었던 것이다. 동일한 작품이 서로 다른 극장 두 곳에서 상영되는 상황. 어디를 갈까. 어차피 똑같은 영화일 텐데도 극장을 고르게 된다. 문제의 동시 상영관은 서울에서 가장 성황이라는 단성사와 반도극장이다. 도로를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두 영화관. 당신의 시선은 자연스레 극장 간판에 집중된다. 어느 극장의 간판이 더 잘 그려졌나를 따져보기 위해서다. 배우들의 얼굴, 영화 속 한 장면일 간판 배경, 제목 글씨 등을 유심히 살펴본다. 실물과 흡사한 화풍을 띈, 보다 유려한 레터링을 보여주는 간판 쪽으로 눈과 발이 옮겨 간다. 저런 훌륭한 간판을 그려내는 극장이라면 왠지 영화 보는 맛이 더 살아날 것 같다. 마침내 결정. 거대한 입상 간판에 압도당한 달뜬 마음은 관람료 약 20원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한국 극장가의 풍경을 재현해본 장면이다. 상영작 정보를 신문 광고와 포스터만으로 습득했던 당시 예비 관객들에게 간판화가의 존재는 귀중했다. 극장들은 ‘미술부’를 부속하여 유능한 간판화가를 특채하고 대우해주었다. ‘오야지’라 불리는 미술부장(메인 화가), 보조 화가, 레터링 작가로 구성된 미술부 직원들은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특히 보조 화가들은 미술부장 밑에서 일종의 도제 교육을 거치며 업계 입지를 다져갔다. 40년간 극장 간판을 그린 백춘태(1943~) 선생도 그렇게 장인이 됐으며 숱한 제자들을 키웠다. 

    백춘태 선생 / 사진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1950~1960년대 외화 수입의 활황과 1970년대 한국 영화의 중흥은 곧 간판 전쟁을 의미했다. 전국에 걸친 극장들끼리 누가 더 간판을 잘 그리는지 경쟁이 붙은 것이다. 간판 완성도가 흥행과 직결되던 시절의 모습이다. 이 시기 30~40대였던 백춘태 선생은 성실함과 실력으로 충무로에 이름을 알렸다. ‘백춘태가 그리면 흥행한다’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 은밀히 그를 찾아온 어느 무명 배우는 간판에 자기 얼굴을 크게 그려달라고 통사정하기도 했단다. 간판화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다.

    1990년대 실사 간판과 복합상영관(Multiplex)의 등장은 간판화가들을 극장가 뒤안길로 들어서게 했다. 백춘태 선생 역시 붓을 내려놓아야 했으나, 여러 매체를 통해 자신의 작업과 간판장이들의 생활 등을 알림으로써 1950~1970년대 극장가 문화상을 그려왔다. 2011년에는 김영준, 김형배, 강천식 등 극장 간판화가들과 함께 〈사라진 화가들의 영화〉라는 전시를 열기도 했다. 전시장이었던 충무아트홀 갤러리(현 충무아트센터 갤러리)에는 ‘간판장이’들이 제작한 수제 영화 간판 14점이 선을 보였다. 이 즈음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백춘태 선생은 해당 전시 준비가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될 것 같다는 말도 남겼다.

    1961년 아카데미 극장 / 사진 제공: 국가기록원
    1977년 허리우드 극장 / 사진 제공: 국가기록원

    2012년 국립민속박물관이 발행한 단행본 『의성 성광성냥공업사와 극장 간판화가 백춘태』에는 백춘태 선생이 제공한 사진 자료, 회고와 더불어 극장 간판 제작 과정이 퍽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극장 미술부 직원들이 간판을 세는 단위는 ‘판’이었는데, 간판 ‘한 판’을 제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보름 내외였다고 한다. 첫 단계는 기존 상영작 간판 철거다. 목재 간판 틀을 덮은 광목천에 그림이 그려져 있고, 여기에 흰 페인트를 덧칠해 백지화시키는 것이 두 번째 단계다. 광목천 교체 비용을 아끼기 위해 3~4회 정도 재사용 뒤 새것을 씌웠다. 기존 간판 활용이 아닌 새 간판을 만드는 경우, 목수가 간판 틀을 짰다. 이 목수들은 극장 미술부 소속이 아니라, 간판 한 판 제작 때마다 투입되는 프로젝트 팀 개념이었다고 한다.

    백춘태 선생이 그린 극장 간판들 / 사진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본격적인 그리기는 메인 화가의 밑그림 작업부터 시작된다. 극장에 영화 상영이 결정되면 메인 화가는 제일 먼저 영화부터 봐야 했다. 밑그림 구상을 위해서다. 혼자 혹은 영화사 관계자와 관람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시나리오까지 읽으며 머릿속에 장면을 그려두었다. 스틸 사진 같은 기본 자료가 영화사로부터 제공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생생한 장면을 그려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밑그림이 뚜렷한 윤곽을 갖출 만큼 완료되면 보조 화가들이 투입돼 색칠을 했다. 관건은 실사와 최대한 흡사하게 그리는 것. 이 점은 간판화가의 실력이 발휘되거나 탄로 나는 척도였으며, 관객 유치를 좌우하는 지표이기도 했다. 백춘태 선생은 “내용과 주인공은 50대 50으로 봐야” 하며 “그것을 함축성 있게 잘 조화를 시켜서 금방 보고 무슨 영화다 관객들이 알 수 있게끔 표현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설명했다.(앞의 책, 302쪽)

    그림 작업이 끝나면 레터링 단계로 넘어간다. 영화 제목, 출연진 이름, 홍보 문구 등을 쓰는 전문가들이 따로 있었다. 백춘태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홍보 문구 레터링은 극장 내 ‘선전부장’이 정해준 것을 글씨 담당자가 받아 쓰는 방식이었다. 일어 독해가 가능했던 선전부장이 『스크린(スクリーン)』, 『에이가노 도모(映画の友)』 같은 일본 영화 잡지들을 참고해 카피를 뽑고 레터링 작업을 지시했던 것이다. 간판 글씨의 외래어 표기 오탈자를 잡아내는 일도 선전부장의 몫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 판의 간판이 완성된다. 영화사 및 극장 관계자가 형식적 절차로서 검수를 마치고 나면, 설치 전문 업체가 간판을 매단다. 설치는 일반 시민들과 경쟁 극장의 눈을 피해 새벽이나 밤에 이루어졌다. 간판이 걸린 뒤에도 간혹 수정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미술부 직원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붓질을 다시 해야 했다. 작업자는 낮은 곳에, 작업물은 높은 데에 있다는 물리적 위치 관계는, 간판화가들의 작업 태도에 어떤 엄숙함을 부여해주지 않았을는지. 

    백춘태 선생의 작업실을 채운 화구들 / 사진: 『the T』 편집팀(2016년 12월 촬영)

    영화 포스터라 하면 지금은 사진이 떠오른다. 간판화가 시대에는 그 연상의 대상이 ‘그림’이었을 것이다. 간판화가들은 철저히 관객 입장에서 그렸다. 최대한 사실적으로, 실제 영화 장면과 인물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이 과정이 단순 모사가 아니라는 근거는, 간판화가들이 영화를 감상하고 해석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화 한 편을 간판 한 판으로 시각화하는 작업이며, 달리 말하면 간판 한 판 안에 영화 한 편의 핵심을 담는 과정이다. 즉 그들은 ‘판’과 ‘편’이라는 프레임을 넘나들던 작업자들이었다. 또한, 관객들이 판과 편 사이를 단숨에 건널 수 있도록 ‘이미지의 다리’를 놓아준 설계가들이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간판화가들은 어엿한 시각디자이너들이었다. 

    상영 종료된 간판에 흰 페인트칠이 덮이듯, 간판화가들과 그들이 활약했던 극장들은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간판의 내려짐이 영화 자체의 사라짐은 아니듯, 간판화가 시대는 꾸준히 분석되어야 할 작품으로서 재개봉을 거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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